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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종학대학원, 경전·역사·수련 아우르는 열린 교리교육 중심지로 부상지난주 천도교신문 취재진이 찾은 천도교종학대학원(서울 수운회관)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학습의 열기로 가득했다. 종학대학원은 경전교육·교양강좌·수련 프로그램을 아우르는 ‘열린 배움터’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종학대학원의 핵심은 경전과 실천의 통합 교육이다. 동경대전, 용담유사, 신사법설·성사법설 등 천도교 기본 경전을 중심으로 한 정규 강좌를 운영하며, 각 강의에는 경전 독송, 수행, 명상 등 실천 프로그램이 함께 포함된다. 관계자는 “종학대학원 교육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마음공부를 통해 삶의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수요강좌와 토요강좌가 정례화되면서 학습 선택 폭이 크게 넓어졌다. 수요강좌는 교리·역사·철학·시민교양 등 일반인도 참여 가능한 공개 강좌 중심으로 편성되며, 최근 ‘한국사 이야기’ 등 현대적 교양 주제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토요강좌는 정규 교육과정의 중심축으로, 경전 강독 및 교리 심화학습이 집중적으로 진행된다. 두 강좌는 모두 온·오프라인 병행을 통해 지방 교인·직장인·해외 거주자 등 시간·공간 제약을 가진 학습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기반 수업 방식은 교단 내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접근성 높은 교육 플랫폼”으로 평가받고 있다. 종학대학원은 교육 기회의 확대와 교리학습의 대중화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학문 교육뿐 아니라 계절 수련과 동학 유적지 탐방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수련, 특강, 공동체 활동 등으로 구성된 수련은 경전의 정신을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으로, 참여자 만족도가 높은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종학대학원은 내년도 신입생 및 수요·토요강좌 수강생 모집을 준비하고 있으며, 교육 콘텐츠 고도화와 온라인 플랫폼 강화 등을 추진 중이다. 대학원 관계자는 “종학대학원은 천도교의 전통 경전을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누구에게나 열린 배움터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교단 구성원뿐 아니라 종교·역사·철학에 관심 있는 시민들에게도 문을 활짝 열고 있다”고 밝혔다. 전통 경전 연구, 실천 중심 수련, 현대 교양 교육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천도교종학대학원은 앞으로도 시대 변화 속에서 천도교 정신을 학문적으로, 문화적으로 확장해 나갈 전망이다. -
[칼럼] 동학(東學) 연구를 넘어서 천도교학(天道敎學) 정립으로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터전인 지구 행성은 급변하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물질문명의 극단적인 발달과 정신적 가치의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를 ‘개벽세(開闢世)’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혼돈(混沌, chaos) 속에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인류의 새로운 정신적 좌표를 제시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가치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도교의 근본 이념과 교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천도교학(天道敎學) 정립은 시대적 요구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또 현재 모처럼 전국적으로 열기를 띠고 있는 동학 르네상스가 천도교에 대한 관심 혹은 연구(공부)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천도교의 미래와 인류의 활로를 열기 위해 천도교학 정립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대적 소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대종정의(大宗正義)> 「오교의 신사상시대」를 보면 “우리 (천도)교의 본소(本素)는 가득히 차서 반푼의 더할 것을 요구치 아니하나, 이것을 발표하기는 사상문명으로 현대문명의 선구(先驅)를 지어야 하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다시 개벽’의 시대, 문명대전환의 시대를 이끌어갈 ‘천도교학’을 정립하여 포덕광제의 대업을 이루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정립해야 할 천도교학이란 무엇인가? 천도교학이란, 수운대신사가 창명한 천도(天道)와 동학(東學) 그리고 의암성사에 의해 근대적 종교체제를 도입·구축한 천도교(天道敎)의 교리, 역사, 문화, 사상 및 그 실천적 의미를 총체적으로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교의(敎義)를 넘어,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정신을 통해 현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법과 지구적 차원의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 현대문명의 대안을 제시하는 실천적인 학문이다. 천도교학은 기독교학, 불교학, 도교학 등과 같이 종합학문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앞으로 연구 성과가 축적된다면 이를 다시 분야별로 세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도교학은 그동안의 동학농민혁명 역사 중심의 동학(東學) 연구와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이제는 K-컬쳐(=문화)의 뿌리가 되는 K-사상 연구 흐름과 함께 기존의 동학 연구를 넘어서는 천도교학을 연구·정립해야 한다. 동학 연구가 천도교의 뿌리와 발생 배경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천도교학은 그 뿌리를 바탕으로 현대에 살아 숨 쉬는 종교로서의 천도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가치를 학문적으로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천도교학 정립은 천도교를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살아있는 종교'이자 '미래 문명의 대안'으로 확립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작업인 것이다. 물론 천도교학 정립 과정에는 기존의 동학 연구의 축적된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엄밀한 문헌비평을 바탕으로 해체(解體, deconstruction)하는 작업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천도교학 체계 정립의 기본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종교학을 핵심으로 하되, 철학,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등 다학문적 방법을 통합하여 천도교 현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천도교의 핵심 교리(시천주, 사인여천, 후천개벽 등)와 역사(동학혁명, 3·1혁명 등), 조직(중앙총부, 교구), 수행/의례(주문, 시일식 등)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종합적 학문 분야로 정립한다. 마지막으로 천도교 사상이 현대 사회의 문제(환경, 평화, 인권 등)에 제시하는 의미를 찾아 실천적 역할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천도교학은 우선적으로 천도교의 다섯가지 핵심 교리를 중심으로 현대학문을 참조하여 그 내용을 체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시천주(侍天主)의 종교학·신학적 정립이다.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이 근본 교리의 신관(神觀)과 인간관(人間觀)을 현대 종교학·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심화해야 한다. 특히 한울님과 인간의 내재적 합일이라는 독특한 사상을 서구 종교와의 비교를 통해 보편성과 독창성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학적 정립이다.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가르침은 인류 평화와 공생의 시대를 여는 현대 윤리의 핵심 원리이다. 인간 존엄성을 극대화하는 이 사상을 생태 윤리, 사회 윤리 등에 확장하여 적용하는 학문적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문명사적 해석이다. ‘다시 개벽(開闢)’을 통해 오는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의 비전은 시대적 변혁과 새로운 문명 건설의 동력을 제공한다. 이는 미래학, 사회 변동론 등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째,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수양론적 정립이다.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한다"는 수양법은 현대인의 정신 건강과 영성 회복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이는 심리학, 명상학 등의 학문과 연계하여 그 과학성과 실천성을 입증하고 보급해야 한다. 아울러 의암성사의 ‘이신환성(以身換性)’ 수행법과 비교분석하여 천도교 수행법의 변화발전 양상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이웃 종교의 수행법과 비교하여 그 독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궁극적 목표로서의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론이다. 천도교의 최종 목적인 '이 세상에 한울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여 구체적인 사회 개혁 모델과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구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을 도출해서 구현해야 한다. 이와 함께 천도교의 역사를 철저한 고증(=실증)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 사실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공정하게 기술해야 한다. 특히 그동안 미흡했던 천도교 제도변천사의 연구·정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향후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천도교백년약사<상권> 이후 중단되었던 교사 편찬을 차근차근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 천도교학 정립의 실제적인 방법론은 무엇일까? 우선 천도교 중앙총부 산하에 독립적인 (가칭)천도교학연구원이나 천도교학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대학교를 설립하여 천도교학과를 설치·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현재 운영 중인 천도교종학대학원과 연구소 등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이를 위해 먼저 전문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교단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종교학, 철학, 역사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연구 인력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지원하여, 학문적 객관성과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 다음으로 경전의 현대적 해석(解釋) 및 교재 편찬이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의 핵심 경전을 현대어로 풀이하고 주석을 달아 일반 대중과 학계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교인과 일반인을 교육할 체계적인 천도교학 교재를 편찬해야 한다. 경전의 현대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교인들의 정성과 지혜를 모아 시간이 걸리더라도 질높은 번역과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앞으로 도래할 통일시대를 생각한다면 북한 천도교경전에 대한 비교 연구도 함께 병행해야 한다. 천도교종학대학원의 교재로 우선은 ‘천도교학 개론’ 같은 것을 편찬하여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외 학술 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 국내외 주요 대학 및 연구 기관과의 학술 교류를 통해 천도교 사상의 글로벌 보편성을 검증하고 확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천도교학 학회나 연구회 등 연구 네트워크를 조직·운영해야 한다. 물론 현재 운영 중인 동학학회와 연계하여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각 분야(교리, 교사, 의례, 사상사 등)별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천도교학 총서'를 발간하여 학문적 권위를 확보하고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이와 함께 천도교의 예복, 노래(천덕송과 송가), 건축 등 종교 예술과 문화적 표현을 분석하여 한국 종교 문화사 내에서의 위상도 정립해야 한다. 이러한 천도교학 정립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첫째, 종교적 정체성 및 위상 강화이다. 학문적 기반 위에 교리가 정립되면, 천도교는 근대적 민족 종교라는 역사적 수식어를 넘어 현대 인류 문명의 대안을 제시하는 종교로서 새로운 위상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둘째, 대사회적 영향력이 증대될 것이다. 정립된 학문적 논리를 바탕으로 교육, 윤리, 환경, 통일 문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천도교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참여와 영향력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셋째, 천도교 세계화의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인내천, 사인여천 등 천도교의 보편적 가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국제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천도교의 세계화를 위한 단단한 발판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천도교학’ 정립으로 용시용활(用時用活)해야 할 시점이다. ‘다시 개벽(開闢)’의 정신은 단순히 과거의 구호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맞게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는 천도교의 생명력이다. 지금은 천도교학 정립을 통해 천도교의 빛나는 사상을 현대 학문 체계 안에서 새롭게 부활시켜야 할,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다시 개벽'의 시점이다. 교단과 학계, 그리고 모든 동덕들이 힘을 모아 천도교학 정립의 대업(大業)에 매진할 때, 천도교는 민족의 구심점을 넘어 인류의 정신 문명을 선도하는 종교(=인류교)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천도교학 정립,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요 우리의 소명이다. 글 박돈서(선도사, 공주교구장, 감사원장대행) -
뜻의 전달『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천도교신문에서는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학의 지혜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꽃피우는 동학의 길을 함께 사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뜻의 전달 저녁 무렵 눈썰매장에 제설작업을 하기에 부지런히 올라가 봤어요. 하얀 눈이 하늘이 아니라 기계에서 내리더군요. 강원도 스키장에서나 볼만한 장면을 처음 보니, 설렘으로 가득했지요. 눈썰매장을 개장하면 아이들이 듬뿍 온다는군요. 집에 와 모자를 벗는데 앗, 방정환 선생의 중절모에 잔가지가 달려 왔네요.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느낍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꽂아 주신 겁니다. 아이들과 신나게 놀으라고, 당신의 꿈 잊지 말라는 당부의 현신. 아~ 선생님 제가 지금 감성적으로 느끼고, 받을지라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흐린 기운을 쓸어버리고 맑은 기운을 어린 아기 기르듯 하라. <동경대전 : 탄도유심급> 착각도 가지가지라.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보는 것이다. 모자의 잔가지를 보면서 경주 책 놀이텃밭을 떠올려 본다. -
대구 감영과 관덕당동학이라는 가르침이 맹위를 떨치며 퍼져간다는 소문이 조선의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을 임명하고 무예별감 두 사람과 군관 한 사람, 그리고 하인 한 사람을 딸려 동학의 진원지인 경주로 급파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의하면, 선전관에 정운구(鄭雲龜)를 선임하고, 수행원에는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豊)과 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군관(左邊捕盜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이 임명되었다. 이 밖에 정운구의 종자인 고영준(高英晙)까지 합하여, 일행은 모두 다섯 명이 된다. 宣傳官鄭雲龜書啓 臣於十一月十二日 敬奉傳敎 率武藝別監梁有豊張漢翼 左邊捕盜廳軍官李 殷植等 以慶尙道慶州等地 東學魁首詳探捉上次 忙出城外 藏蹤秘跡 星夜馳往 선전관 정운구가 서계를 올리니다. 신은 11월 12일에 전교를 받들어 무예별감 양유풍 장한익 좌 변포도청군관 이은식 등을 인솔하여 경상도 경주 등지에서 동학 괴수를 자세히 탐지하여 체포 하고자 성문을 나서 남모르게 밤길을 도와 달려왔습니다. - 『고종실록(高宗實錄)』 원년 12월 24일 임진(元年 十二月 二十日 壬辰) 그날로 서울에서 출발하여, 남대문을 나선 일행은 어명을 개봉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임을 확인한 다음 며칠을 머문 뒤, 11월 22일 길을 떠나 밤낮으로 목적지인 경주로 향하였다. 문경 새재를 넘어서면서 이들은 동학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탐문하기 시작하였다. 새재를 넘어 영남지방에 이르자 각 주(州) 군(郡)마다 밤이면 동학의 주문이 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이 심각하게 많이 퍼졌음을 이들은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경주부에 들어가 명을 받고 왔음을 신고하고 경주부의 지원을 받아 경주와 용담 일원의 시장이나 절간 등을 중심으로 탐문을 하였다. 탐문이 끝난 12월 9일 양유풍과 종자 고영준을 직접 용담에 보내 상황을 조사토록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용담으로 들어가는 동구 근처에 있는 장(張) 모라는 사람을 통해 용담정으로 들어가 대신사를 만나 입도하러 왔다고 거짓을 말하고는 접근을 하며, 내방하는 사람들의 동정과 대신사의 언동, 용담의 지형 등을 자세히 살핀 다음, 피곤하다는 핑계를 꾸며대고는 다시 용담을 빠져나온다. 12월 10일 새벽 급습하여 용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여 경주부 감옥에 넣는다. 다음 날에 신상 파기를 한 이후 대신사를 비롯한 몇 사람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올라가는데, 문경 새재에 동학도들이 집결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돌려 상주 화령을 거쳐 보은으로 압송 길을 다시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과천에 이르러 죄인을 서울로 압송할 것을 조정에 품의하니, 당시 철종(哲宗)이 승하를 하였기에, 국상(國喪)이 났으니 죄인을 본부 감영으로 다시 돌려보내라는 명을 받고는 본부 감영이 있는 대구(大邱)로 발길을 돌린다. 이리하여 추운 겨울 서울로 압송되던 대신사 는 다시 길을 돌려 대구를 향하여 압송되었다. 대신사 일행은 다시 길을 돌려 충주를 지나 새재를 넘어 초곡(草谷)을 지나 유곡리(幽谷里)에서 과세를 하고 대구에 이르러 감영에 수감되었다. 당시 대구 감영에서의 대신사 계신 상황과 문초 과정 등이 『도원기서』에 실려 있다 대구 감사가 주관하여 대신사를 문초하고, 사형이라는 엄형을 내리고자, 당시 막 등극한 어린 임금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조대비(趙大妃)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대신사를 사형 집행하였다. 달성공원에서 멀지 않은 반월당사거리 현대백화점과 그 맞은편 일대가 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하신 관덕당(觀德堂)이 있던 곳이다. 현대백화점 앞에 대구시교구가 중심이 되어 세운 대신사 순도비가 자리하고 있고, 길 건너편에는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서 있다. 이 지역은 당시 아미산이라고 불렀는데, 잡범들은 이곳 아미산에서 처형을 했다. 천주교 신도들은 잡범으로 분류되어 아미산에서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이곳에 들어선 것이다. 현대백화점 뒤에서 종로초등학교에 이르는 넓은 부지가 대구 감영이 있던 곳이고, 대신사께서는 참형 직전까지 그곳에 구금되어 계셨다. 종로초등학교 마당에 ‘최제우 나무’라고 명명된 큰 회화나무가 서 있는데, 수령이 400여 년에 이른다. 대신사께서 감옥에 있으면서 내다본 나무라고 하여 이 나무를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달성공원에는 1964년 3월 31일 대신사 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신사순도백주년기념동상건립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건립한 대신사 동상이 있다. 함께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대신사께서 대구 감영에 갇혀 있을 때 해월 신사께서 옥리의 하인으로 분장하고 들어와 진지상을 올렸다. 이때 해월 신사에게 시를 한 편 내리고 또 멀리 달아나라는 ‘고비원주(高飛遠 走)’의 글을 내렸다고 한다.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등불이 밝아 물 위로는 아무러한 혐의의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 『동경대전』 윤석산 교수의 풀이에 의하면 등불의 빛이 물 위로 퍼져, 환하게 모든 것을 비추어 주듯이 자신은 아무런 혐의가, 또 아무런 잘못된 틈이 없다는, 자신의 무혐의와 결백을 노래한 시이다. 그런가 하면, 한울님의 도란 바로 물 위에 비추어 조금의 틈도 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저 등불과 같이 세상의 모든 곳을 밝혀주는, 바로 그러한 참된 진리라는 의미가 이중(二重)으로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세상의 잘못된 제도에 의하여 죽게 되어도, 그래서 자신이 펼친 무극대도가 지금은 죽은 나무와 같이 보이나, 그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후일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의 도가 이내 올바르게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시이다. 대신사의 거룩한 피는 대구 관덕당에 뿌려졌지만, 무극대도는 이어져 해월 신사의 지도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갑오년 동학혁명의 뜨거운 불길로 번졌다. 의암 성사에 의해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도 300만 교인들이 힘을 합쳐 3·1혁명 만세 소리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대신사 순도의 피는 지금도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어 흐르고 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서운포, 해월 신사의 숨결 따라 정선 동학 유적지 순례서운포(도훈 윤석산)는 지난 10월 17일부터 18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정선 일대의 동학 유적지를 순례했다. 이번 답사에는 서울교구 교인을 중심으로 여주교구와 인근 교구 교인 30여 명이 함께했다. 첫날 정오 무렵, 정선 현지에 도착한 답사단은 고종호 전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의 안내로 황기족발과 정선의 향토 음식인 콧등치기국수로 점심 식사를 했다. 이후 5일장이 열리는 정선아리랑시장을 방문해 활기 넘치는 재래시장을 구경하는 한편, 현지 농가에서 재배한 농산물 등을 구매하기도 했다. 또 아리랑센터에서 매주 토요일 상설 공연하는 「뗏꾼」을 단체로 관람한 후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타고 정선의 가을 절경을 감상했다. 한편, 서운포 답사단이 정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선 도접주 유시헌의 증손자 유돈생 어르신이 답사단을 찾았다. 올해 90세인 유돈생 어르신은 정식으로 입교는 하지 않았으나 평소 주문과 수련 등 수행을 계속해왔으며, 윤석산 도훈은 이 자리를 빌려 유돈생 어르신의 복교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첫날 저녁에는 숙소인 파인포레스트 정선알파인리조트 구내식당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일부 참가자들의 소감 발표와 함께 윤석산 도훈이 서운포의 유래를 강의하는 등 깊은 교감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번 답사 진행에 큰 도움을 준 고종호 선생은 윤석산 도훈과의 특별한 인연을 언급하면서 정선문화원 사무국장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동학을 향한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열띤 발언으로써 증명했다. 둘째 날 아침,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은 맨먼저 정선군 화암면 미천리에 자리한 싸내(米川) 유적지를 방문했다. 이곳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부인 박씨 사모님이 해월 최시형 신사의 도움으로 피신해 살다가 환원하신 곳으로, 정선 지역 동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은 “싸내는 동학의 여성사와 신앙공동체의 뿌리를 함께 보여주는 성지”라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그다음으로 찾은 곳은 정선 남면 무공리 무은담터였다. 무은담은 해월 신사가 포덕 16년(1875) 설법제와 포덕 17년(1876) 구성제 등 주요 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로, 동학 교단의 재건이 시작된 역사적 현장이다.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은 “이곳에서 해월 신사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가르침을 실천적 신앙으로 확장했다”며 “무은담은 동학 교단이 다시 일어선 출발점이자 ‘시천주’의 뜻이 생활 속에서 구현된 자리”라고 전했다. 특히 무은담은 정선 도접주 유시헌이 해월 신사를 직접 모시며 동학 교문을 재건한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유시헌은 포덕 19년(1878)년 이곳에서 『도원기서』 편찬과 『동경대전』 간행에 참여했으며, 그의 집은 정선 교단의 비밀 포교처로 쓰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윤석산 도훈이 집필한 『도원기서 역주』와 포덕 163년(2022) 동학역사문화선양회에서 설치한 유시헌 부자 안내판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해월 신사가 포덕 13년(1872) 가을, 49일간 특별기도를 올린 적조암이었다. 이곳은 해월 신사가 영월에서 정선으로 피신한 뒤 교단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시천주’의 참뜻을 체득한 곳이다. 이번 순례를 준비한 윤석산 도훈은 “정선은 수운 대신사, 해월 신사, 의암 성사의 사상이 맞닿은 생명 신앙의 고장”이라며 “앞으로도 교단 차원의 정기 순례를 통해 동학의 생명력을 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
“동학 정신을 우리 삶의 가치철학으로 가져가는 것, 그것이 제 꿈이자 바람”나이 마흔에, 서울살이를 끝내고 강원도 홍천 서석면에 새로 둥지를 튼 권소영 대표는 원래 동학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프랑스 출장길, 관계자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친 프랑스혁명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존재의 존엄성을 인정한 동학사상에 대해 현지인들에게 설파한 뒤, 그다음 날 회의가 믿기지 않을 만큼 술술 풀렸던 경험이 동학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일 터였다. 한데 2007년, 그가 살러 온 홍천 서석면 풍암리가 동학혁명 전적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 인연이 오려는 길이었구나.” 하고 직감했다. 홍천에 내려온 뒤에는 마을 주민들 요청으로 4년 동안 아이들에게 동학과 동학혁명을 이야기했다. ‘시천주’ 사상에 담겨 있는 존엄과 평등, 공존과 존중을 가르쳤다. 홍천에 자리 잡을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코칭도 하고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를 키우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2017년, “동학 사업을 좀 키워보자”는 서석면 면장의 제안으로 국가유산청 공모사업에 나선 것이 본격적으로 ‘동학 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이후 홍천 서석면 풍암리 동학혁명군 전적지를 알리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기 시작해, 2024년까지 동학혁명 전적지 탐방, 휘호대회, 백일장, 보드게임, 메모리카드, 동학탑놀이, 동경대전·용담유사 목활자 퍼즐, 선양극과 추모음악회, 명상과 심리 치유 프로그램 등 수많은 콘텐츠를 탄생시켰다. 그 무수한 콘텐츠의 아이디어 창구이자 이를 실제 구현으로 이끈 장본인이며, 11월 6일 발대식을 갖는 '강원동학21'을 이끌어나갈 권소영 대표를 만나, 그의 삶과 동학, 앞으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진행: 노은정 전 편집장) ▶ ‘강원동학21’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와 단체 설립 과정, 지금까지의 주요 활동을 소개해 주신다면? ‘강원동학21’이라는 이름에 세 가지 축을 담았습니다. 하나는 강원 지역 동학의 역사예요. 인제, 정선, 영월, 평창, 원주, 강릉, 고성, 홍천 등 곳곳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동경대전」이 발간되고 보국안민의 기포가 다시 일어난 지역이기도 합니다. 둘째는 동학의 핵심 사상, 시천주와 삼경사상, 인내천과 사인여천 정신입니다. 셋째는 이 사상을 21세기 현재의 언어와 삶으로 풀어가겠다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강원동학’ 뒤에 ‘21’을 붙였습니다. 제가 홍천에 온 지 20년이 되어 갑니다. 2017년에 당시 서석면 면장님이 제가 기획·컨설팅하는 걸 알고 “서석면에 동학혁명 유적지가 있는데, 이걸 제대로 키우고 싶다”며 동학 관련 사업을 제안하셨어요. 당시 서석면동학혁명추모사업회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주축 어르신들만 남아서 사실상 활동이 거의 없던 상태였어요. 한데 공모사업을 하려면 단체에 소속돼야 하니, “단체 이름을 좀 빌려 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해서 2017년 국가유산청 지역유산활용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동학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17년부터 2024년까지 14개의 프로그램 개발은 거의 완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동학 정신을 서예로 표현하는 전국 휘호대회와 학생들이 동학농민혁명 과정을 공부하며 글을 쓰는 백일장, 역사 흐름과 인물을 게임으로 배우는 보드게임과 메모리카드, 시천주·존엄·존중·공경 같은 키워드를 몸으로 익히는 ‘동학탑놀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목활자본 퍼즐과 인쇄 체험, 지역주민이 만든 선양극과 추모음악회, 동학 아카데미, 초등학교 체험, 중학교 자유학기제 프로그램, 동학사상과 명상을 결합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과 동학군 복장을 입어보고 행진하는 체험과 동학 관련 유튜브와 캐릭터, 이모티콘 대회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초등학생, 중·고생, 학부모, 마을 주민과 군인들까지 합치면 대략 5천 명 정도가 홍천 동학과 동학혁명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 기반을 바탕으로, 홍천을 넘어 강원 전역으로 확장하기 위해 ‘강원동학21’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 개발해 오신 프로그램이 매우 다양합니다. 휘호대회, 보드게임, 심리 치유 프로그램, 음악회 등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기획을 할 때 ‘한정된 틀’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산 1,000만 원이면 2,000만 원 이상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늘 고민합니다. 그래서 동학 프로그램들도 교육, 놀이, 예술, 심리를 한데 묶어 설계하고 있어요. 먼저 휘호대회는 강원도 교육감님께서도 칭찬하신 행사입니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공부하게 되거든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 누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고, 글씨에 담긴 마음도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다섯 번 진행했습니다. 심리 치유 프로그램은 동학사상을 현대 심리학 기법과 결합한 것입니다. 참가자들이 시천주·삼경사상, 수심정기를 체험형으로 접하도록 설계해서,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음이 굉장히 차분해졌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습니다. 이건 제가 아이들 코칭과 부모 상담을 오랫동안 하면서 쌓은 경험과 동학 공부가 만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이 음악회입니다. 저는 어릴 때 클래식을 전공해볼까 고민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동학 스토리텔링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11월 6일 강원동학21 발대식에서도 음악과 동학 이야기를 엮으려 합니다. 이번 행사에서 첫 곡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시작합니다. 인트로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되는 자각의 느낌이 있거든요. 이어서 「나 하나 꽃 피어」라는 가곡이 불립니다. 나 혼자만 피어서는 숲이 되지 않지만,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꽃을 피울 때 어떤 세상이 열리는지를 동학 정신과 연결해 설명하지요. 또 영화 「미션」에 나오는 「가브리엘스 오보에」를 들려줍니다. 이 곡을 들으며 동학군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존엄과 평화의 가치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나눕니다. 이렇게 곡마다 스토리텔링 해설을 붙입니다. 음악적 분석만이 아니라 이 곡이 동학과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감응 매치하여 이야기하면, 관객들이 깊게 공감합니다. “난 동학은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들으니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시죠.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비슷합니다. 밥을 먹을 때 “농부가 쌀을 안 만들었으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엄마가 밥을 해 줄 때와 안 해 줄 때의 차이, 그 사이의 정성과 마음을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면, 생각의 폭과 깊이가 확실히 달라집니다. 저는 그 과정을 ‘동학식 수심정기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 최근 홍천군의회 본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 조례안’이 부결되면서 지역사회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떤 생각이 들었고, 이후 어떤 대응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말씀드린 대로 어이없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났습니다. 그동안 쌓아 온 기념사업과 주민들의 호응, 전국적인 평가를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학 정신을 이야기하는 내가, 동학이 말하는 수심정기와 시천주를 어느 만큼 실천했는가를 먼저 돌아보게 됐습니다. 일부에서는 군의회 내 갈등, 몇몇 기사에 따른 감정적 반향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해 온 활동의 진정성과 필요성을 더 깊이 이해시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지금은 2026년 재발의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군의회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기념사업의 의미와 내용, 강원특별자치도 조례와의 연계, 홍천이 갖는 상징성을 차분히 설명할 예정입니다. 또 하나는 추모일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추모일이 양력 10월 23일로만 알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음력 10월 23일입니다. 올해부터는 이 부분도 바로잡고, 음력 추모일을 기준으로 강원동학21이 준비하는 추모·기념 행사를 체계화해 보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과 논쟁도 결국 조금 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보고, 끝까지 책임 있게 풀어가려 합니다. ▶ 조례 제정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조례가 통과될 경우 지역사회와 동학 기념사업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시는지요? 조례는 결국 공공의 약속입니다. 강원특별자치도에는 이미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조례’가 있어서, 큰 틀에서 강원동학21 사업을 하는 데 제도적 장애는 없습니다. 하지만 홍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의 실제 무대는 홍천군입니다. 홍천군에 조례가 제정되면, 다른 시·군에 선도적인 모범 사례가 될 수 있고, 기초자치단체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과 동학 정신 계승을 법적 책무로 인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민간의 열정과 자발적 재능기부에 의존한 측면이 크다면, 조례 제정 이후에는 예산·인력·교육·관광 정책과의 연계가 훨씬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동학 정신을 강원도 정체성의 한 축으로 삼겠다는 공적 선언이 되는 셈이지요. ▶ 강원동학21이 비영리 사단법인, 궁극적으로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재 추진 상황과 법인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지요? 현재는 비영리 사단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고, 최종 목표는 재단법인화입니다. 사단법인은 사람 중심의 조직이고, 재단법인은 재정과 자산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플랫폼입니다. 강원동학21이 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재단법인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은 강원도 곳곳에서 동학과 동학 정신에 공감하는 분들을 모아 ‘강원동학21 재단법인 추진위원회’를 꾸리고 있습니다. 이 법인을 통해, 재정적 안정화를 이루고, 동학 해설사, 강사, 프로그램 기획자 등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학교·지자체·문화재단·시민단체·천도교 교구와의 협력 구조를 정비해, 동학 정신을 강원의 정체성과 공동체성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플랫폼을 만들고자 합니다. 특히 저는 천도교 입교 여부와 상관없이, 현대화된 동학 정신을 삶의 철학으로 전하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의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동시에 천도교중앙총부와도 마인드 교육, 직무·인성 교육 등에서 협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천도교도 함께 알려지고, 강원도의 정체성 확립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강원 지역의 동학 유적을 잇는 ‘동학길’ 사업과 2027년 해월 최시형 신사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준비 중인 계획이 궁금합니다. 강원동학21이 준비하는 큰 축 중 하나가 ‘강원 동학길’ 역사 투어예요. 원주–홍천–인제 권역, 홍천–평창–횡성 권역, 홍천–고성–강릉 권역, 홍천–영월–정선–원주 권역으로 나누어 1박 2일 또는 2박 3일 코스를 구상하고 있어요. 단순히 “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수준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과 시천주·삼경사상, 인내천·사인여천의 의미를 몸으로 느끼는 여행이 되도록 설계 중입니다. 특히 2027년 해월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을 앞두고, 해월 선생 평전을 쓴 분들의 책을 거의 다 구입해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월 신사의 삶과 사상을 담은 선양극·뮤지컬 시나리오를 세 편 정도 써 두었고, 앞으로 검토를 받아 무대에 올려보려 합니다. 해월 선생이 걸었던 길을 실제로 따라가며, 공연과 강의, 명상과 음악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해월의 길을 따라서’라는 이름으로 강원도와 함께 개발하는 것이 목표예요. 이 과정에서 춘천교구, 원주교구, 강릉교구 등 강원 지역 천도교 교구들과의 네트워크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합니다. 각 교구가 지닌 역사와 인적 자원을 살리면, 교구 입장에서도 창조적인 선도 역할을 할 수 있고, 강원동학21은 종교색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동학·천도교의 가치를 넓게 알릴 수 있다고 봅니다. ▶ 여러 자리에서 “정치는 멈춰도 동학 정신은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동학 정신은 어떻게 되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창도하신 이후, 해월 최시형 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 이어지는 차원이 다른 생각의 가치혁명이었습니다. 희망이 거의 없던 시대에 ‘하늘이 사람 안에 있다(시천주·인내천)’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빛이었죠. 지금 우리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는 것 같지만, 자기 삶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자질은 오히려 부족해진 부분을 많이 보곤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면 환경과 타인 탓만 하고, 정치·사회적 문제도 내 마음과는 별개라고 생각하지요. 시천주 사상은 한울님을 모시기 위해 수심정기,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 세우라고 가르칩니다. 삼경사상은 만물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걸 오늘의 언어로 정리하면 존엄, 존중, 공존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존엄한 한울님으로 여기며 수심정기를 실천하고, 타인과 다른 존재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고, 함께 어우러지는 공존을 목표로 삼는 것.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소통 이전에 존중이 없습니다. 만나서 각자 자기 말만 하고 돌아가면서 그걸 대화라고 부르기도 해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과 감정이 앞서다 보니 조율과 조화가 설 자리가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 정신을 AI 시대, 포스트휴먼 시대의 K-철학, K-동학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평화, 타인과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동학 정신이 오늘의 사회 가치로 뿌리내린다면, 정치적 양극화와 혐오, 차별, 공동체 붕괴 같은 문제의 뿌리가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어려움, 그리고 시민사회나 지방정부, 중앙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서석면동학혁명추모사업회는 1976년부터 있었지만, 오랫동안 일부 주축 인물 중심으로 돌아가며 조직의 임무와 기능, 목표와 가치가 거의 사장된 상태였어요. 2018년부터 제가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공모사업을 따오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예산을 끌어오며 조직의 틀을 새로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서석면 원주민도 아니고, 여성, 그것도 아줌마라는 이유로 괜한 트집과 반발을 겪기도 했습니다. 서석면 안에만 동학을 가둬두고 싶어 하는 분들은 “왜 홍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느냐, 왜 강원 전체를 이야기하느냐”며 반대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같이 일하자”고 나서는 사람보다, 멀찍이 서서 지켜보거나 트집을 잡고 험담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참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시·군이나 도 단위에서 이 사업을 바라보는 분들은 ‘너무 필요한 일’이라고 평가해 주시더라고요. 사회 문제와 조직 문제로 고민하는 리더들은 동학 정신 계승 사업을 보면서 “우리 지역에도 이런 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가까이에서는 홀대받고, 멀리서는 부러움을 사는 모습이 종종 헛헛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앞으로는 강원동학21 발대식을 계기로, 강원 지역의 뜻있는 인재와 명망 있는 추진위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실 생각이에요. 시민사회에는 “이건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공동체의 가치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 지방정부에는 “정신문화의 토대가 튼튼해야 지방자치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중앙정부에는 동학 정신을 전국적 가치로 확산하는 데 꾸준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드리고 싶고요. ▶ ‘동학’과 ‘예술’을 결합한 문화기획이 권 대표님만의 강점인 듯합니다. 앞으로 꿈꾸는 음악·예술 프로젝트와 5년 안에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지요? 저는 동학을 책 속의 사상으로만 두고 싶지 않아요. 노래와 연극, 클래식과 국악, 뮤지컬, 영상과 유튜브 채널 등 사람들이 실제로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형식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이미 홍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여러 공연과 강연, 프로그램을 올리고 있고, 이번 강원동학21 발대식에서도 클래식과 동학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문 음악인들이 “우리끼리만 좋다”고 만족하는 데 머무르면 확장이 안 된다고 늘 말합니다. 예술은 결국 남이 듣고 감동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5년 안에, 강원동학21을 재단법인으로 세우고, 해월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에 맞추어 해월 선생 선양극·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고, 정치·사회·교육·문화·예술 전반에 동학 정신을 녹여낸 가치 프로젝트를 단계별로 수행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로 ‘21세기형 동학운동’을 거창한 혁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자가 스스로를 존엄한 한울님으로 여기고, 그 눈으로 타인과 자연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이미 개벽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명상도 결국은 ‘자기라는 한울이 자기 마음을 경계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매일이, 지금 이 순간이 이미 동학운동의 현장입니다. 강원동학21이 그 현장에서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강원도에는 동학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느리지만 또 저 같은 분이 나오셔서 이어간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기억을 남기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의 사명으로 넘겨주는게 제 마지막까지의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오늘도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
흥해 손봉조의 집남원 은적암에서 돌아온 이후 대신사는 각 처로 다니며 가르침을 폈다. 이러한 결과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도 나날이 늘어나고, 또 그 지역도 넓어져 다만 경상도 일원만이 아니라 충청도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인원을 보다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하나로 떠오른 것이 ‘접(接)’을 조직하는 것이다. 본래 접이라는 이름은 유생들이 쓰던 용어이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만든 접은 이와는 다르다. 흥해 매곡동(현재는 매산리) 손봉조의 집에서 행한 접주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포항시 흥해 손봉조의 집은 매우 중요하다. 동학 교도가 늘어나자 대신사는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접(接)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각 처의 지도자들을 이곳으로 오게 하여 접주를 정해 주었다. 이때가 임술년(1862년) 12월 말이다. 본래 ‘접(接)’이라는 용어는 우리 전통 사회에서 쓰던 말이다. ‘접’은 예전에 글방 학생이나 과거를 보는 유생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었다. 또 보부상(褓負商)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구성한 ‘접’은 이러한 개념과는 다르다. 접은 철저한 속인제(屬人制)에 의한 구성이다. 내가 한 사람을 포덕하면, 그 사람은 나의 접이 된다. 일컫는바 점조직과도 매우 유사하다. 한 사람이 잡혀도 그 사람을 포덕한 사람만 알 뿐, 그다음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된 이내겸(李乃謙)은 본래 영천(永川)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듯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이 된 것은 동학이 본래 속지제(屬地制)를 따르지 않고 속인제(屬人制)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도자(傳道者)와 도를 받는 사람 사이에 인적 유대를 중요시 여긴 까닭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의 전수(傳受)는 ‘정신의 전수’라는 면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접 제도는 오늘까지 천도교에서 연원제(淵源制)로 전승되고 있다. 대신사는 이러한 접 조직을 통하여 갑자기 늘어난 동학 도인들을 조직하고 관리하였다. 그래서 손봉조라는 제자의 집에서 각처의 지도자들을 오게 하여 각 접의 접주(接主)를 정해 주었던 것이다. 각 접주가 마치 지역별로 정해진 듯하지만,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이사를 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죽을 때까지 몇 대를 이어가며 살았다. 그래서 비록 속인제이지만, 속지제와 같이 지역을 중심으로 접주를 정해 준 것이다. 접주를 정해 준 뒤에 새해인 계해년(1863년) 1월 1일 아침 대신사는 이에 대한 시를 쓴다. 訣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 成功幾時又作時 莫爲恨晩其爲然 時有其時恨奈何 新朝唱韻待好風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 春來消息應有知 地上神仙聞爲近 此日此時靈友會 大道其中不知心 도를 묻는 오늘, 아는 바가 무엇인가. 뜻은 새해 계해년에 있도다. 공을 이룬 것이 언제인데, 또 때를 만나겠는가. 늦는다고 한하지 마라. 그렇게 되는 것을. 때는 그 때가 있나니, 한탄한들 무엇 하리. 새해 새 아침에 운을 불러 좋은 때를 기다린다. 지난 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봄이 오고 있음을 마음으로부터 응하여 알 수 있으니, 지상신선의 소식 가까워지네. 이날 이때 신령한 벗들의 모임이여, 헤아릴 수 없는 마음, 그 가운데 자리한 대도(大道)여. - 『동경대전』 “지난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이라는 이 구절이 바로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접주를 정한 사실이다. 지난해는 접주제를 행한 임술년(1862년)이다. 그해 말에 서쪽 북쪽에서 온 영우(靈友)들이란 다름 아닌 접주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접주제는 훗날 동학혁명을 보다 조직적으로 이끈 중요한 바탕이 된다. 손봉조가 살았다는 흥해 매산리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훗날 지은 집이 서 있다. 손봉조의 집 앞으로는 제법 큰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건너편에는 마을 사람들이 쉬고 노는 정자와 당수나무인 팽나무가 서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인 이곳에는 그간 표지판 하나 없었다. 다행히도 필자가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동학역사문화선양회와 (사)동대해문화연구소가 2022년 11월 18일, 팽나무 부근에 ‘최초 동학 조직 안내 표지판’을 설치했다. 또한 포항시에서도 동학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발굴하고 이곳을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 시설로 홍보하는 것과 동시에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장소로 개발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 다음 회 예고 : 대구 감영과 관덕당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설교의 목적과 방법설교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한 번은 심도 있게 논의해 보고 싶었다. 설교, 수련, 천덕송 보급, 교리의 체계화, 천도교 용어사전 편찬, 각주 경전 편찬, 어린이 강재 보급, 자선사업, 봉사활동 등이 모두 포덕․교화의 한 방편이 되겠지만, 이 중 설교가 포덕․교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이다. 한울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정성, 공경으로 한울님의 성령이 충만한 설교자의 말씀은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병을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신적 평화와 안정감을, 사업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성공에 대한 확신을, 사랑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영적 에너지가 있다. 이처럼 설교는 복잡한 현대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울님에 대한 좀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하고 인생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좌표를 제시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나와 가정, 나아가서 사회 및 국가에 대해 폭넓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분명한 목적을 세우고 노력할 때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듯이, 설교에서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게 되면, 이에 맞게 계획을 수립하고 노력하여 설교 원고를 만들고 몇 번의 연습을 통해 본래 계획한 의도를 성취할 수 있다. 또 설교를 한 뒤에는 무엇이 잘못 되었나 스스로 반성해 보는 교역자의 자세가 될 때, 우리 교회의 장래는 그만큼 더 밝아질 것이다. 천도교에서의 설교 목적은 대신사님의 『동경대전』<포덕문〉에 밝혀놓으신 것처럼, 첫째 동덕들이 주문 수련을 통해 ‘영부(靈簿)’를 받아 세상 사람들의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건지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 동덕들이 주문수련을 통해 한울님의 은덕을 깨닫고 ‘시천주’ 한울님의 진리를 온 세상에 밝히며, 한울님의 진리에 맞게 올바른 생활과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선 천도교 내의 설교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각 교당에 설교를 할 만한 신앙의 실력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며, 게다가 대부분 충분히 준비된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적인 내용 위주라는 점이고, 둘째, 동덕들의 일용행사와 가정문제, 사회문제를 도외시한 ‘자아완성’, ‘이신환성’, ‘보국안민’, ‘남북통일’, ‘포덕천하’와 같은 너무나도 크고 이상적인 목적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경전내용을 고지식하게 인용, 열거하는 식으로 실생활이나 시대조류와 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현행 설교의 문제점 등을 고려해 형식적 ․ 내용적 측면에서 설교의 올바른 방향과 설교의 단계를 한 번 정립해보자. 먼저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형식적 조건으로 첫째, 설교에 임하는 사람은 설교를 명(命) 받은 그 주에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한다. 둘째, 고저장단에 따라 물 흐르듯 어조 및 성량을 조절해야 하며, 설교 내용에 알맞게 감정이입이 되어야 한다. 셋째, 설교 시간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교중에서 시간 문제가 가끔 거론되는 경우를 듣게 된다. 설교시간은 기왕이면 짧으면 좋다는 견해, 1시간을 다 채워야 한다는 견해 등이 있지만, 규모일치를 위해 설교시간도 의절에 분명히 명시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청중의 수준 또한 고려해야 한다. 즉 노년층, 장년층, 청년층, 유소년 층이냐에 따라 그 수준에 알맞은 언어 선택과 설명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청중의 수준에 맞는 언어를 선택할 때 더욱 많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내적 조건으로, 첫째 설교 내용은 수련을 통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수련하면서 깨달은 보편적인 생각은 누구에게나 가슴 속 깊이 심금을 울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경전은 이의역지[(以意逆志) : 읽는 이의 생각으로 스승님의 생각을 거슬러 구하는 방법]로 공부해서 반영한 내용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승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설교 내용에는 시대에 맞는 시사 내용이나 스승님 또는 선인들의 예화를 적절히 인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흥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폭넓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진리의 말씀을 보강하거나, 증명하는 논거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불교계의 성철 스님도 그러한 분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의 인연설, 윤회 사상 등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영적 세계를 공부한 학자들의 책을 인용했고, 사후세계를 증명하기 위해 영혼사진을 예로 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물리학까지 섭렵해 불교사상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또한 프랑스의 미셸 노스트라다무스, 조선조 명종 때 철인 격암 남사고,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루스 몽고메리 등의 예언가 말들을 인용하면서 후천 개벽의 운수를 설파하여 비판이 되기도 한 증산도의 『이것이 개벽이다(안경전 편저)』란 책도 이런 아류에 들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우리 종단은 어떠한가? 우리 도의 가장 근본인 수련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더구나 경전과 교사를 연구하는 사람도 극소수이며, 나아가 폭넓은 독서와 연구로 천도교의 진리를 좀더 시대에 맞게 체계화하고 증명하여 널리 알리려는 도인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다음으로 설교의 단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설교의 단계는 편의상 원고 설교, 메모 설교, 강화(降話) 설교로 나눌 수 있는데, 초보자 입장에서는 원고 설교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하다가 메모를 해서 설교한 뒤, 차원 높은 경지에 가면 강화 설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제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설교도 다양하게 바꿔져야 한다. 일용행사를 다루는 설교, 개인의 삶과 가족 문제를 다루는 설교, 사회문제, 국가문제를 다루는 설교 등 다양한 설교가 필요한 때이다. 이상 수련의 목적과 방법 및 설교의 단계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이고 수박 겉핥기 식의 논의를 해 보았다. 동학은 여느 종교와는 달리 믿음의 종교요, 깨달음의 종교이기에 무극대도에 신명을 바칠 수운 학도는 정성, 공경, 믿음으로 공부와 수련에 능한 자가 되어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진정한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깨달음은 로고스(이성)의 분석력과 파토스(감성)의 직관력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불이 붙는다. 이럴 때, 우리는 황홀감을 느끼고 영대(靈臺)가 환하게 열린다. 부디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나와 동덕님들에게 이런 경지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글 운암 오제운( 신태인교구장, 동귀일체 고문) -
남원 은적암대신사께서 신유년(辛酉年, 1862년) 6월 용담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향해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신사로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용담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문을 열고 맞이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開門納客 其數其然].’ 또 일 년이 지난 후에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이러한 풍경을 대신사의 수양딸이 회상하는 기록이 있다. 대신사의 수양딸은 1920년대 후반까지 살았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팔순이 되었다. 이 수양딸을 천도교의 이론가인 김기전(金起田)이 인터뷰한 기록이 있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신유년 포덕 당시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신사께 예물로 곶감을 많이 가지고 왔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용담정 부근에 버려진 곶감꽂이만을 짊어지고 가도 인근 마을 사람들의 땔나무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손님들 조석(朝夕) 준비에 수양딸과 부인 박씨 부인은 나날이 바쁘고 힘이 들었으며, 특히 날이 저물어 저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다 잠을 자나 하고, 아직 어렸던 수양딸은 혼자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담으로 들어가는 작은 산길은 마치 장터마냥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小春, 「大神師 收養女인 八十老人과의 問答」, 『新人間』 통권 16호, 1927. 9.) 이렇듯 많은 사람이 용담으로 모여들고 동학을 공부하니 유생(儒生)들과 관이 관심을 두게 되고, 마침내는 탄압을 하게 된다. 이에 대신사는 용담을 떠나 전북 남원으로 가게 된다. 용담을 떠난 대신사는 먼저 울산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러 도인을 만나고, 며칠을 머문 후 부산으로 간다. 부산에는 누이동생이 살았다고 한다. 표영삼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 대신동에 누이동생이 대신사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산당(山堂)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부 산에서 배를 타고 오늘의 진해시(鎭海市)에 속한 웅천(熊川)이라는 마을에 가서 유숙하게 된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나 승주(升州)를 지나며 충무공(忠武公)의 사당에 배알하고, 충무공이 남겨 놓은 보국(輔國)의 정신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기도 한다. 이어서 전라도 무주(茂州)에서 잠시 머문 뒤에 다시 길을 떠나 남원(南原) 땅에 이르게 된다. 대신사는 이렇듯 며칠을 걷고 걸어 남원에 이르게 되고, 남원 광한루(廣寒樓) 근처에 살고 있는 서형칠(徐亨七)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다른 기록에는 서공서(徐公瑞)라는 사람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가 12월 중순 무렵으로 추정된다. 길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뒤이다. 서형칠은 한약방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신사의 제자 중 최자원(崔子元) 등 약종상을 하는 사람이 있어, 이들 제자들의 알선으로 남원의 한약상인 서형칠의 집을 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형칠의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형칠의 생질(甥姪)되는 공창윤(孔昌允)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열흘 가까이 머물게 된다. 이곳에 머물며 대신사는 서형칠, 공창윤,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國三),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을 포덕하기에 이른다. 남원에 도착한 지 10여 일이 지난 12월 그믐쯤 대신사는 이들의 안내를 받아 남원 교외의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을 찾아가게 되고, 이곳에서 산속으로 조금 떨어진 덕밀암(德密庵)이라는 작은 암자로 가게 된다. 이곳에 머물면서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스스로 이곳에서 ‘자취를 감춘다’라는 뜻의 은적암(隱跡菴)으로 그 암자의 방 하나를 이름하고, 1862년 3월까지 머물고 나서 경주로 돌아온다. 은적암이 있는 덕밀암은 전북 남원 동편, 교룡산성(蛟龍山城) 속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에 딸려 있던 작은 암자이다. 이 산성은 원래 백제 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시대에 쌓은 것이다. 이곳은 국방상 매우 중요한 요새지로서 남으로부 터 침략하는 왜구를 견제하기 위하여 산성을 구축했다. 당시는 남원부(南原府)의 관리를 받아왔고, 남원부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일대와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을 수비하던 전략 요새의 외성(外城)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성 입구에는 이 산성을 지키고 수비하던 비장(碑將)들의 비석이 줄줄이 서 있어, 험난했던 지난 역사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은적암을 품에 안듯이 둘려 있는 교룡산성 뒤쪽으로 솟아 있는 산을 황룡산(黃龍山)이라고 부른다. 산등선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산의 정상으로는 제법 기암괴석이 작은 병풍마냥 펼쳐져 있다. 이 산의 골짜기마다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흔아홉 개의 우물이 돌무덤으로 만들어져 있다. 산성의 이름이 교룡(蛟龍)이듯이, 백 개의 우물을 만들면 용이 승천을 한다는 전설에 따라 아흔아홉 개의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교룡이라는 산성의 이름처럼 아직 은 용이 되지 못한, 그러므로 이무기의 슬픔과 잠재적 가능성이 꿈틀거리듯 자리하고 있는 산성. 이 산성의 이름은 이곳 지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곳에 은거한 대신사는 달이 뜨는 밤이면 능선에 올라 「처사가(處士歌)」를 부르기도 하고,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하는, 상원갑(上元甲)의 새로운 전기를 이룰 때가 왔음을 암시적으로 노래한 「검결」을 부르며, 목검을 잡고 검무를 추기도 하였 다. 대신사께서 제세(濟世)를 위한 열망과 심신을 아울러 단련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 은적암에 머물면서 대신사는 앞의 『도원기서』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동학의 중요한 경편인 「논학문」과 「도수사」, 「권학가」를 짓는다. 은적암은 대신사께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 곳이자 동학의 중요한 경전이 저술된 곳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자리에는 다만 천도교서울교구 동덕들이 세운 표지판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1989년 대신사 탄신 165돌을 기념하여 서울교구에서 7일간 특별수련회를 개최하고 마지막 날인 10월 29일(시일) 은적암으로 서울교구 교인 226명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은적암 터’ 성지 표지판을 세웠다. 저자도 표지판을 세울 때 청년회 부회장으로 참여하여 표지판과 시멘트, 모래, 자갈, 물통 등을 등에 지고 산 중턱에 올라 표지판을 세우고 나서 대신사의 당시 상황을 그리며 남원 시내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듯 작은 표지판이라도 세운 까닭에 은적암을 세상에 알리고 이곳을 성역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듯이 동학의 유적지 발굴을 비롯한 표지석 또는 표지판을 세우는 사업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다음호 예고 : 흥해 손봉조의 집 '수운 대신사, 최초로 접주제를 시행하다'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천도교 경전이 궁금해요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1860년 동학을 창명한 이후 교도들에게 가르칠 자신의 종교적 교의를 담은 글을 지어요. 이 글들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어요. 첫째는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 등 동학의 본체를 밝힌, 한문으로 쓰인 글들이에요. 둘째는 「용담가」, 「교훈가」, 「안심가」, 「도수사」, 「권학가」, 「몽중노소문답가」, 「도덕가」, 「흥비가」 등 한글 가사체 작품과 단가 형태의 「검결」 등 교리를 노래로 표현한 것들이지요. 셋째는 한문으로 된 「시문」들과 「결」, 「주문」, 「팔절」, 「필법」, 「축문」, 「탄도유심급」, 「좌잠」 등 수행에 필요한 글들이에요. 이 글들이 쓰인 연대는 우선 1860년에 「검결」, 1860년 후반기 「용담가」, 「안심가」, 1861년 봄에 「포덕문」, 1861년 11월 「교훈가」, 1861년 12월 「도수사」, 「권학가」, 1861년 12월에서 1862년 2월 사이 「논학문」, 1862년 6월 「수덕문」, 「몽중노소문답가」, 1862년 11월 「필법」, 1863년 1월 「탄도유심급」, 1863년 4월 「좌잠」, 1863년 7월 「도덕가」, 1863년 8월 「흥비가」, 1863년 11월 「불연기연」, 「팔절」 등이에요. 「시문」들과 「결」 등은 이 사이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여요. 이와 같은 수운 대신사의 저술들은 후대에 해월 신사가 주도해서, 한문으로 된 글[文]과 한시들, 「결」, 「주문」 등을 합해 『동경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간해요. ‘동경(東經)’은 ‘동학 경전’을 줄인 말이고 ‘대전(大全)’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뜻이에요. 이때가 1880년(庚辰年)이고 펴낸 장소는 강원도 인제 갑둔리에 있는 제자 김현수의 집이에요. 또 가사 8편을 합해 수운 대신사가 도를 받은 ‘용담정’ 이름을 빌려 ‘용담 선생이 남긴 글’이라는 뜻의 『용담유사』를 1881년(辛巳年)에 충북 단양 샘골 제자 여규덕의 집에서 목판으로 출간한답니다. 하지만 「검결」은 수운 대신사가 대구 감영에서 국문(鞫問)을 당할 때 문제가 된 노래여서 처음에는 제외되었다가 후에 다시 『용담유사』에 편입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현재 해월 신사가 주도해서 최초로 간행한 경진판(庚辰版) 『동경대전』이나 신사판(辛巳版) 『용담유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계미판(癸未版, 1883년)과 계사판(癸巳版, 1893)이 전해지고 있지요. 이 같은 경전이 판본으로 정착한 과정에서, 해월 신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영기(靈氣)로 외워 구송(口誦)한 것을 제자가 받아썼다는 구송설(口誦說)과, 해월 신사가 관의 지목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늘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녔다는 것, 그리고 목판본 후기(後記) 등을 분석해 구송설이 아닌 원본설(原本說)이 제기되기도 해요. 천도교 교령을 역임한 윤석산 전 한양대 교수는 구송설과 원본설을 통합한 절충설을 제기하고 있지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모두 동학의 교의(敎義)와 사상을 전달하고 표현한 중요한 경전들임에도 그 표현 양상은 매우 달라요. 그에 담긴 세계관의 차이 때문이지요. 『동경대전』은 당시 지배 계층의 사상이었던 유교적인 인식과 방법이 문장 진술이나 전개, 표현에 많이 원용되었어요. 반면 『용담유사』에서는 당시 기층문화를 이룬 민간 사상, 즉 풍수지리나 도참설, 역(易)사상 등이 많이 원용되었지요. 수운 대신사는 『용담유사』에 민중의 꿈과 이상이 담긴 사상을 담고, 이를 통해 보다 쉽게 자신의 사상을 펴고 고취하려 했어요. 『동경대전』이 한문 문장을 통해 지식층에게 교의와 사상을 전달하고자 한 ‘의미 중심의 경전’이라면, 『용담유사』는 민중들의 꿈과 소망을 담아내며 이들을 감화시키고 한울님이라는 존재를 깨닫게 하는 경전이지요. 이처럼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서로 다른 언어와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결국은 하나의 진리, 곧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깨달음으로 귀결돼요. 수운 대신사가 밝힌 진리는 지식인에게는 사유의 혁명이었고, 민중에게는 구원의 희망이었지요. 『동경대전』이 동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운 기둥이라면, 『용담유사』는 그 사상을 노래와 언어로 풀어 민중의 삶 속에 스며들게 한 강물이라 할 수 있답니다. 두 경전은 서로의 결을 이루며,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되는 길을 제시한 동학의 근본 정신을 오늘까지 이어오게 한 생명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참고한 자료: 윤석산 지음,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