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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준 교령,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 발표지난 17일, 서울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 2층 랑데뷰 홀에서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협의회 소속 종단 대표 및 임원진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를 대표하여 박인준 교령이 축사를 전했다. 박인준 교령은 축사에서 “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대동단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민족종교는 항상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그런 점에서 민족종교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공동체적 운명을 개척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라며 협의회의 역할 확대를 당부했다. 이번 기념식은 한국 고유 민족종교들이 걸어온 40년의 연대와 협력의 역사를 돌아보고, 향후 민족정신의 계승과 상생의 가치를 모색하기 위한 뜻깊은 자리로 마련되었다. 다음은 박인준 교령의 축사 전문이다. 축 사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민족종교 지도자와 이웃 종교 지도자 여러분, 그리고 함께 자리해 주신 종교인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창립된지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런 뜻깊은 날에 초대해 주신 김령하 회장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대동단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된 채로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민족의 동질성을 상실하고 이민족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지금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급속도로 다문화 사회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제 민족이라는 말의 개념도 다시 정립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래 민족이란 말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집단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문화의 전역적인(global) 사회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이 땅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피를 섞으며, 공통된 역사와 공통된 문화를 창조하면서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생래적 DNA가 다를지라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신민족 사회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종교의 개념과 그 역할 또한 새롭게 정립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종교는 항상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그런 점에서 민족종교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공동체적 운명을 개척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천도교 또한 창도 배경이나 역사성에 비추어 볼 때 민족종교로써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데 한치의 소흘함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천도교는 앞으로도 민족종교협의회와 함께 나아갈 것이며,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정신으로 이웃 종교와도 힘을 합하여 민족의 대동단결과 대한민국의 융성,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창립 4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며, 한국민족종교협의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포덕 166년 11월 17일 천도교 교령 박 인 준 -
[칼럼] 수운대신사 탄신 201주년의 다차원적(多次元的) 의미올해 10월 28일은 동학·천도교를 창명한 제1세 교조 수운 최제우 대신사(水雲 崔濟愚 大神師) 탄신 201주년을 맞는 매우 역사적인 날이다. 수운대신사의 탄생은 단순히 한 위대한 인물의 출현을 넘어, 혼란과 절망의 시대를 넘어 인류의 새로운 정신 문명을 열어젖힌 ‘다시 개벽(開闢)의 선언’이자 ‘시천주(侍天主) 시대의 서막’이었다. "사람의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진리는,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명사적 위기 속에서 동양의 오랜 문화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우리 땅에서 꽃피운 ‘자생적 근대화의 원천’이었다. 수운대신사의 탄생이 지닌 심오한 의미를 우주적, 지구문명적, 한국사적, 현대적, 미래적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깊이 있게 되새겨보고자 한다. 먼저 우주적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한마디로 ‘한울님의 강림과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선포’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운 대신사의 탄생은 우주적 차원의 거대한 전환을 예고한다. 1860년(경신년) 수운대신사가 상제(上帝, 한울님)으로부터 직접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은 것은, 우주의 근원적인 이치와 진리가 인간 세상에 현현(顯現)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천명(天命)의 재확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유교적 이념 속에서 추상화되었던 '하늘'을 인격적인 한울님으로 재정립하고, 그분과의 직접적인 종교적 (신비) 체험을 통해 '천명'을 새롭게 받았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영원히 존재하는 신성(神性)인 천주(天主), 즉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 사상의 출발점이 된다. 또한 ‘다시 개벽(開闢)’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수운대신사는 우주의 순환이치에 의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도래를 예언하며, 낡은 질서와 문명이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도덕 문명이 열릴 것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단순한 서구적인 종말론이 아닌,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통해 이 땅에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능동적인 개벽 의지였다. 다음으로 지구문명적 차원에서는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할 동학(東學)·천도교의 창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은 서양 열강의 침탈이 극심해지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였다. 서양의 과학 문명과 천주교(=서학西學)가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을 뒤흔들던 문명사적 위기 속에서 수운대신사는 동학(東學)·천도교를 창명하였다. 이는 서학에 대한 동학·천도교의 대응으로 볼 수 있다. 동학·천도교는 서학에 대한 자주적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서학이 하늘의 권위를 교조적으로 강조했다면, 동학·천도교는 "그 도(道)는 같으나 이치(理)는 다르다"며 내재적 천(天) 사상인 시천주를 통해 민족적 자존을 지켜내고자 했다. 또한 이는 새로운 세계관의 제시라고 설명할 수 있다. 동학·천도교는 유(儒), 불(佛), 선(仙)의 삼교 회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존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드높이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제시했다. 이는 동양 정신 문명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지구적 차원의 정신 혁명이었다. 셋째, 한국사적 차원에서는 ‘민족 자주 정신의 고취(鼓吹)와 만민 평등의 기치(旗幟)’로 말할 수 있다. 수운대신사의 탄생은 봉건 사회의 모순과 외세의 위협 속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자주와 평등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이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운 것을 말한다. 수운대신사는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보국안민)", "널리 창생을 구제한다(광제창생)"는 기치를 내걸고 사회 변혁을 위한 종교적 실천을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백성(=민중)과 유리된 봉건 지배층의 사상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진정한 민본주의 사상이었다. 또한 이는 신분 타파와 인간 존중을 의미한다. 시천주 사상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절대적인 만민 평등 사상으로 직결된다.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이 본래부터 존엄한 존재임을 천명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신분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사회혁명(=사회개벽)의 씨앗이 되었다. 이후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 등 근대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넷째, 수운대신사 사상의 현대적 가치를 ‘시천주, 다시 개벽, 인내천’을 중심으로 생각해본다. 한마디로 수운대신사가 선포한 사상은 16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시천주(侍天主)’ 사상의 현대적 가치는 ‘정신 문명의 회복과 마음의 평화’라고 표현할 수있다. 시천주는 외부에 존재하는 신이 아닌, 내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그분의 지혜와 덕을 스스로 실현해 나가는 내재적 신앙을 강조한다. 이는 복잡하고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자주적인 정신 문명을 확립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구도의 길을 제시한다. 수운대신사가 가르친 주문(呪文)과 심신 수련법은 현대인의 정신 건강 증진과 인격 수양에 큰 도움을 준다. 시천주 주문을 통한 한울님과의 합일은 곧 참된 자아의 발견이며, 이는 타인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밑바탕이 된다. 다음으로 ‘다시 개벽(開闢)’ 사상의 현대적 가치는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과 지속 가능한 삶’이라 말할 수 있다. 수운대신사가 제시한 ‘다시 개벽’ 사상은 물질 만능주의와 인간 중심주의가 낳은 ‘인류세(人類世)’의 기후 위기와 생태 파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생명 살림의 철학을 내포한다. 하늘의 조화(造化)가 만물에 내재한다고 보았기에,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모심과 섬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생태적 세계관, 생명 살림의 철학을 제시한다. 동학·천도교의 핵심 교리인 모심(侍)은 한울님을 모시듯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돌보며(養) 살리(生)는 ‘모심과 살림’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는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공존의 윤리’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현대적 가치는 ‘인간 존엄과 민주주의 완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월 신사의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삼경(三敬)을 거쳐 의암 성사의 인내천(人乃天)으로 정립된 사상은 "사람이 곧 한울"임을 선언한다. 이는 모든 인권과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인 ‘인간 존엄성’을 종교적, 철학적 차원에서 최고 가치로 확립한 것이다. 이는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인내천은 국가의 주인은 백성임을 뜻하는 후천개벽 사상과 맥을 같이하며, 현대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참된 ‘국민 주권’의 가치를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 제도의 문제가 아닌,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는 상생(相生)의 윤리를 요구한다. 다섯째, 수운대신사 탄생의 미래적 전망은 한마디로 ‘인류 보편의 도(道)로써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운대신사의 탄생과 동학·천도교의 창명은 인류 미래 문명의 방향타가 될 것이다. 동학·천도교는 더 이상 한국만의 종교가 아닌, 전 인류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인 진리, ‘인류교(人類敎)’로서 그 가치를 확대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국가, 민족, 종교,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존엄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 사상을 통해 인류는 근본적인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서구 물질문명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지금, 수운대신사의 ‘다시 개벽’ 사상은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이루는 후천의 새 문명, 즉 상생적 생태문명(=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동학·천도교의 ‘모심과 살림’의 정신은 인류 공통의 위기인 기후 및 환경 문제, 빈곤,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지구공동체(=지구행성)을 화합으로 이끄는 지혜의 보고로서 세계에 기여할 것이다. 동학·천도교는 인류가 한울님을 모시고(侍天主), 사람이 곧 한울임을 깨달아(人乃天), 이 세상에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개벽세(開闢世)’의 비전을 제시하여 장차 인류의 정신을 인도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수운대신사 탄신의 의미는 ‘인류 희망의 등불’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수운대신사는 1824년 10월 28일,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동북아의 끝 조선 땅 경주에서 탄생하였다. 태어나는 날 구미산은 3일간 울어 세상에 신인(神人)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수운대신사 탄신의 의미는 어둠 속을 헤매던 인류에게 스스로 한울임을 깨닫고〔自天自覺〕, 새로운 세상〔後天, 지상천국〕을 열어가도록〔開闢〕 ‘희망의 등불’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수운대신사의 천도(天道)에 대한 깊은 가르침은 우리 천도교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고, 나아가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인 진리이며, 앞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될 우주시대에 가장 적합한 종교(宇宙敎)인 것이다. 우리는 이 뜻깊은 수운대신사 탄신 201주년을 맞이하여 수운대신사의 숭고한 정신을 깊이 새기고, 시천주와 인내천의 참뜻을 각득(覺得)하여 새로운 상생적 생태문명(=지상천국)의 건설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공암 박돈서(선도사) -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 천도교 교령사 예방… “인내천은 헌법 제10조와 통한다”포덕 166(2025)년 10월 23일(목) 오전 10시, 국민통합위원회 이석연 위원장이 천도교중앙총부를 방문해 박인준 교령을 예방하고 환담했다. 이 자리에는 종무원장과 각 기관장들이 배석했으며, 국민통합과 종교의 공공적 역할을 주제로 심도 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분열이 심각하며, 그 여파가 사회·문화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념과 지지 대상에 따라 원수처럼 대립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통합이란 획일적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라며 “헌법 제10조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은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깊이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박인준 교령은 “종교의 본래 사명은 갈등을 치유하고 상생을 도모하는 데 있다”며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정신으로 국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종교의 길”이라고 답했다. 또한 “천도교는 나라를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감내해 왔으며, 좋은 정치를 하는 정부에는 협력하고, 잘못된 정치에는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자 정신”이라고 밝혔다. 박 교령은 특히 “‘사람을 섬기되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만큼 위대한 말씀은 없다”며 “정치도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환담에서 양측은 천도교의 역사적 역할과 종교의 국민통합적 사명,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 인내천 사상을 교육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석연 위원장은 “정치가 국민을 편가르기식으로 몰아가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며 “종교 지도자들께서 국민 통합의 관점에서 따끔한 목소리를 내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끝으로 그는 “국민통합위원회는 앞으로도 종교계와 함께 국민 화합의 길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칼럼] 정치와 종교, 그 적정(適正)한 거리근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통일교의 정교유착(政敎癒着) 의혹은 앞으로 점점 그 실체가 드러나겠지만 종교계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정치와 종교의 적정한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를 위해 먼저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 유형을 분류해 보고,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나타난 정교유착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 후에 동학·천도교 역사를 정교 관계의 시각에서 개관(槪觀)해 보고 천도교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모색해 보고자 한다. 정치와 종교는 인류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 하나는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책임지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조화롭게 기능할 때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의 관계가 늘 이상적이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 정치권력이 종교의 신성함을 이용하거나, 종교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낼 때, 그 위험한 동거는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교일치(政敎一致)’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종교 지도자가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이다. 중세 유럽의 교황청이나 이슬람 신정국가가 대표적인 예다. 둘째,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정치와 종교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여 서로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셋째, ‘정교유착(政敎癒着)’은 공식적으로는 정교분리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정치 권력이 종교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특정 종교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바로 이 세 번째 유형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라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정치와 종교가 긴밀하게 얽히고설킨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안정화를 위해 종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11년 제정된 사찰령은 조선 불교를 통제하고 일본 불교의 영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는 사찰의 주지 임명권을 갖는 등 불교계를 식민 통치의 하위 조직으로 편입시켰고, 일부 불교계는 이에 동조하여 친일 행각을 벌였다. 기독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지만, 일부 기독교 교단과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용인하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는 종교의 신념을 버리고 정치 권력에 굴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대일항전기(對日抗戰期)에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가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교단 조직은 비밀 연락망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처럼 종교가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며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 이후, 특히 군부 독재 시절에는 ‘정치권력과 종교의 위험한 유착’이 본격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과 같은 체제 동원 사업에 종교계를 적극 활용했다. 교회와 사찰은 정권의 정책을 홍보하고 국민의 정신 무장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0년대 유신 체제 하에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유신 헌법을 '하늘의 뜻'이라며 찬양하는 등 정치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개신교 민주화 운동 세력 등은 독재에 맞서 저항하며 종교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정치와 종교의 유착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일해재단 설립 과정에서 전경련과 함께 종교계가 막대한 기부금을 강요받았으며, 이것은 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금을 모으는 데 종교가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정경유착(政經癒着)과 함께 ‘정교유착(政敎癒着)’의 전형이 되었다. 또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침묵하거나 심지어 학살을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며 종교의 윤리적 역할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1980년대 ‘오대양(五大洋) 사건’이나 ‘용산 참사’와 같은 종교 관련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정치 권력은 종교 단체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된 수사나 해결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종교는 단순히 정치에 동원되는 것을 넘어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특정 대형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의 집권 초기부터 '소망교회 인맥'이 주요 공직에 대거 등용되면서 정교유착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특정 종교에 편향된 정책을 추진하고, 불교계는 이에 반발하여 '종교 편향'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최순실 게이트'는 무속 신앙과 유사한 종교적 요소가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낳았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이 창시한 영생교와 관련된 논란은 한국의 종교와 정치 유착이 단순한 제도적 관계를 넘어 개인적 신념과 사적 관계로까지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은 정치와 종교의 건강한 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요즘에도 특정 종교 단체는 선거 때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조직적 표몰이’에 나섰고,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특정 종교 시설을 찾아가거나 종교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종교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정치의 공정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정치와 종교 간 적정 거리는 과연 얼마일까? 단순히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사회 정의와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적정한 거리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첫째,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종교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를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평화·정의를 위해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한다. 촛불집회와 같이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외침에 종교계가 함께하는 것은 정의로운 행동이지만, 특정 정당의 선거 운동을 돕는 것은 종교의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다. 둘째, ‘종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특정 종교 지도자만을 만나거나 특정 종교 행사만을 참석할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공정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역대 정부에서 최고지도자의 행보가 특정 종교에 치우쳐서 비판 받은 사례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공정한 종교정책을 펴는 것은 종교 간 갈등을 예방하고, 모든 시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기본이다. 셋째, ‘비판적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종교는 권력과 단순히 유착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연대하여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종교의 본연적 역할이자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의무이다. 종교는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 혹은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조화롭게 상생(相生)해야 한다. 정치는 특정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기보다, 모든 시민의 삶을 공정하게 보살피는 ‘보편적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정치적 권력을 탐하기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윤리적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지향하는 정교분리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를 물리적으로 떼어놓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고유한 가치와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위험한 동거의 유혹을 경계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동학·천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교정일치(敎政一致)’라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왔다. 동학·천도교인의 정치적 행위는 창명된 초기에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했으나, 시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저항, 독립운동, 그리고 생존을 위한 협력 등으로 변화해 왔다. 동학농민혁명기 (1894) : 혁명과 탄압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東學)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거대한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여 정의를 내세움)'를 외치며 사회 개혁을 요구한 종교적 혁명이자 정치적 투쟁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동학을 반체제적인 '좌도(左道)'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시기의 관계는 '정교유착'이라기보다는 종교 조직에 기반한 정치적 항쟁과 국가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의 양상으로 보아야 한다. 대일항전기 (1910-1945) : 독립운동의 구심점 대일항전기, 천도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치 행보를 보였다. 1919년 3.1 혁명 당시, 천도교의 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는 종교가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시기 천도교의 정치 참여는 권력과의 유착이 아닌,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의 유착 사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해방과 남북 분단 이후 (1945-현재) : 극단적 운명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제3의 길(중도)을 걸은 천도교의 운명은 다음과 같이 남북한에서 극과 극으로 갈렸다. #북한에서의 '정치적 위장' : 천도교의 교세는 전통적으로 북한 지역에서 강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종교를 탄압하면서도 정치적 명분을 위해 1946년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이라는 정당을 허용했다. 이 정당은 실제로는 조선노동당의 하부 조직으로, 북한 정권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다당제 국가'라는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위장(파사드facade)에 불과했다. 이는 종교가 생존을 위해 독재 정권에 종속된, '생존형 유착'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남한에서의 '정치적 소외' : 남한에서는 정권과 유착된 기독교와 불교가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천도교는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며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활동에서 천도교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천도교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주로 남북통일 관련 학술대회나 시민단체 활동 등에 한정되었다. 이는 정치 권력과의 관계 형성을 위한 기반이 매우 취약하게 된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천도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정권에 대한 저항(동학농민혁명), 민족 운동의 리더십(3.1 혁명), 그리고 체제에 의한 흡수(북한 천도교청우당의 경우)와 소외(남한 천도교)라는 독특하고 극적인 과정을 거치며 정치와 얽혔다. 이는 권력과 상호 이익을 추구한 다른 종교의 유착과는 다른, 역사적 운명에 따라 형성된 특수한 정교 관계라 할 수 있겠다. 천도교는 교정일치를 지향하지만 용시용활(用時用活)하여 시대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현시대는 교정분리(敎政分離)가 대세이므로 이에 부응(副應)하면서 ‘개벽세(開闢世)’의 시운(時運)을 타고 최적의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시점에서는 정치계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천도교의 4대 목적(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 달성을 위해 중도(中道) 실용주의적으로 지혜롭게 처변(處變)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공암 박돈서(선도사) -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창립 40주년 기념식 개최한국민족종교협의회가 주관한 창립 40주년 기념식 및 민족화합과 국운융성 기원대회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전국 각계의 민족종교인 3,000여 명이 함께하며 민족적 단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 행사에는 박인준 교령과 강병로 종무원장을 비롯해 박차귀 민족종교협의회 여성회 명예회장, 김명덕 천도교여성회본부회장, 다수의 동덕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참석자들은 한마음으로 민족의 화합과 번영, 그리고 세계 평화 실현을 기원하였으며, 공연과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해져 대회의 의미를 더욱 높였다. 박인준 교령, 동학‧천도교의 역사적 사명 강조 박인준 교령은 축사에서 동학‧천도교의 역사적 사명과 민족종교협의회의 의미를 강조했다. 박 교령은 “동학‧천도교는 조선조 말, 나라가 서세동점의 위기에 처하고, 무능한 조정과 탐학한 관리들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 허덕일 때, 창생을 구제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최제우 수운대신사께서 창명하신 우리 민족의 대표적 종교”라며 “이후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으며, 천도교로 현도한 이후에도 3.1혁명,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 등 민족사의 고비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 왔다”고 밝혔다. 박 교령은 이어 “민족종교협의회 또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대동단결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 온 바, 앞으로도 천도교와 함께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정신으로 이웃 종교와 힘을 합해 민족의 화합과 대한민국의 융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족종교의 연대와 미래 비전 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이번 4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민족종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시대적 과제를 함께 해결하며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아울러 앞으로도 세계 평화 실현과 인류 공동번영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이번 대회는 한국 민족종교계의 연대와 화합을 확인하고, 미래 40년의 비전을 새롭게 세우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 -
21세기 문명 전환 프로젝트, K-동학의 비전과 실천K-팝과 K-드라마가 세계를 사로잡았다면, 이제는 ‘K-동학’이 그 길을 잇는다. 이번 호에서는 정의필 도정의 종합적 비전과 더불어 음악과 미술 분야 교인·예술가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종교와 문화가 만나는 현장을 통해 K-동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의 길을 독자 앞에 힘 있게 펼쳐 보인다. 남정포 정의필 도정은 최근 중앙대교당 시일식 설교에서 “이제는 K-동학”이라며 새로운 시대적 화두를 던졌다. 정의필 도정은 K-팝, K-드라마 등 한류 문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그다음으로 세계 무대에 내놓아야 할 것은 한국형 대문명 전환 프로젝트인 “K-동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오늘의 인류가 직면한 위기와 과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길이라는 설명이다. 정의필 도정은 먼저 K-동학의 출발 문제의식을 짚었다. 기존 동학이 19세기 봉건과 외세에 맞선 민중적 자각 운동이었고, 천도교가 20세기 민족적 자각 운동이었다면, K-동학은 21세기 인류 공동체적 자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 불평등, 공동체 해체라는 현대적 문제 앞에서 K-동학은 내적 수양을 통한 자기혁신과 공동체 참여를 통한 사회혁신을 동시에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동학의 핵심 사상인 ‘인내천’과 ‘사인여천’을 21세기 언어로 새롭게 풀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내천은 “모든 사람과 생명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으로, 사인여천은 “사람을 대할 때 그 존엄을 하늘처럼 존중하라”는 의미로 현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교육, 사회, 지구 공동체 전반에서 존엄과 상생을 실천하는 새로운 선언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어 그는 K-동학을 실천할 가장 시급한 영역으로 ‘교육’을 꼽았다. 청년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교리와 가치를 전달하고, 생활 속에서 존중과 친환경적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류와의 연결 가능성도 강조했다. K-팝과 드라마가 세계인의 마음을 열었다면, K-동학은 그 안에 사람과 생명 존중의 철학을 담아 인류 공동체적 연대의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첨단기술과의 만남도 언급했다. 정의필 도정은 AI, 빅데이터 시대에도 기술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원리에 입각한 ‘K-동학 알고리즘 헌장’을 제안했다. 알고리즘은 인간 존엄을 해치지 않고, 차별과 배제를 넘어 모두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청년과 지식인들에게도 K-동학은 중요한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인내천은 경쟁과 불평등 속에서 자존감을 잃기 쉬운 청년들에게 힘이 되고, 사인여천은 다름을 존중하는 새로운 관계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국제적 포럼이나 청년 리더십 프로그램 같은 모델도 구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끝으로 그는 교단과 교인들이 먼저 살아 있는 K-동학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리 언어의 현대화, 사회적 약자 보호, 지역사회공익 활동 참여, 환경·생명 운동, 공동체적 공간 조성 등을 구체적 과제로 제시하며, “포덕천하, 보국안민,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은 교인들의 실천 속에서 현실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학의 향기, 전주와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이 글은 포덕 166(2025)년 9월 17일, 전주문인협회 초청(완산도서관) 특강 원고이다. 1. 종교사적 관점으로 본 역사관 우리는 흔히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가톨릭, 개신교)의 역사라고 말한다.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의 상징적인 역사는 무엇인가? 보통 동양은 불교 문명권이라고 말한다. 물론 유교[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공자가 체계화한 종교적·윤리적·정치적 사상 체계이다. 유교는 인간관계 속에서의 도덕적 실천, 사회 질서의 유지, 정치적 통치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불교, 도교와 함께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이념 체계인 삼교(三敎 유교, 불교, 선교) 중 하나로 분류된다.], 힌두교[(힌두교(हिन्दू ध, Hinduism)는 인도 신화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인도, 네팔, 발리 등지에서 주요 종교이다. 2020년 기준으로 11.6억명(세계 인구의 15%) 이상이 믿으며, 신자 수는 기독교, 이슬람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이슬람교[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크교(시크교는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창시된 종교이다.), 자이나교[(자이나교(Jainism)는 인도지역에서 발원한 인도 계통의 종교로 명칭의 어원인 '지나'는 승리자라는 의미이며 '자이나'는 승리자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등 각 나라별로 민속종교까지 그 영향력은 과히 역사라 할 정도로 막대하다. 17세기 초 서양학문으로 이해되었던 서학(西學)은 18세기 후반 신앙으로 받아 들려지며 모진 탄압에서도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유교 즉 성리학이 국교라 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에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종교사상이 창명되었고, 훗날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동학은 1860년 4월 5일(음력) 경주 용담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창명한 새로운 도(道)요, 종교철학사상이다. 동학의 명칭이 확정되기 전 처음에는 무극대도 (無極大道)라 칭하였고, 그 다음에는 천도(天道)로 칭하다가 결국 동학(東學)이라 반포하였다. 그런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동학 명칭을 세상에 알릴 때 전라도 남원땅 은적암에서 동학론, 즉 논학문을 지어 반포함으로 훗날 전라도에서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사상적 계기가 된다. 당시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남원을 중심으로 전주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동학을 포덕하게 된다. 2. 동학이라는 명칭의 유래 동학의 동(東)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동의보감(東醫寶鑑)(조선 시대, 1596년에 임금의 명을 받아 1610년에 허준이 완성한 의학 서적),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東醫寶鑑)조선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 병풍식의 첩 형식을 채택하여 1861년에 간행한 지도집. 지도첩.]’ 등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조선(朝鮮)의 국명(國名)에서도 동(東)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어원이 ‘동방’과 ‘광명’이라는 뜻으로, ‘동쪽의 해 뜨는 곳, 또는 아침의 나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곳,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학은 ‘동방의 학문’이란 뜻으로,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어둠을 걷어내고 다시 밝음을 열어가는 새로운 세상의 학문이자 사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앞서 설명했듯이 무극대도, 천도, 동학이라는 여러 명칭을 사용하였다. 훗날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 뒤를 이어 동학 3세 교조가 된 의암 손병희 성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세상에 크게 선포하였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저술한 〈교훈가〉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논학문(동학론)〉에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東)에서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學)인 즉 동학(東學)이라.”라고,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는 동학의 명칭에서 서학(西學)에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생겨났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짧은 생각에 머무른다. 어느 사상이나 종교가 탄생할 때 무엇을 반대하고 대응하는 차원에서 나왔다고 정의하면 그 사상에 대한 정당성은 물론 바른 이해를 하는데 너무 협소해진다. 물론 당시 서학과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은 분명 존재했다. 동학이 창도되는 전후에 서학만이 문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외부 세력 못지않게 조선의 내부문제도 심각하였다. 인간을 구별 짓는 신분차별과 탐관오리의 착취, 외세에 대응하지 못하는 조선조정,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깨어나는 민중, 나라의 주인이라 자각하는 백성들, 인권과 자주,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시대적 상황 등 수많은 원인들이 있었다. 3.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사상에 근거하여 일어난 우리 근대사의 반봉건·반외세 자주독립운동이다.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의 관계는 ‘근원 없는 물이 없고, 뿌리 없는 나무 없다’로 비유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생과 전개에서 동학사상이 빠질 수 없다는 의미다.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시천주(侍天主) 즉,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즉천(人卽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수운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의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하라’는 인내천(人乃天)·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가르침을 펼쳤다. 4. 동학 집강소 설치와 민주자치시대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무장기포와 황토현 승전, 그리고 장성 황룡에서 전라감영군과 경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또한 장성, 정읍, 태인, 원평, 독배재, 삼천동, 효자동, 용머리고개를 거쳐 1894년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조선 건국자의 본향이자 호남의 수부(首府) 수부(首府)(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도시, 한 도의 감영이 있던 곳)였던 전주성을 무혈입성(無血入城)으로 함락시켰다. 전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의 수부였기 때문에 전주지명을 확장하여 호남, 즉 전라도까지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조선 역사에는 호남의 가치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말이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나오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전라도는 오늘날의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를 포함하였다. 그 행정구역의 중심지가 전주였다. 당시 전주성 안에는 전라감사가 근무하는 감영 즉 선화당이 있어 명실상부하게 전라도의 행정중심지이자 지방정치를 총괄하였다. 그래서 호남제일성, 호남제일문 등 역사적 건물에도 전라도 상징의 명칭이 따라 붙었다. 바로 그 전라도 행정의 중심이자 조선 왕조, 즉 이씨 조선의 본향인 전주성을 동학혁명군이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호령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특히 조선 정부와 동학혁명군이 전주화약을 통해 집강소에 의한 민주자치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짓게 한다.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 수부인 전주성 점령은 여느 지방도시를 점령한 사건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전라도 각 군현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더욱이 전주성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격의 자치, 통치기구가 있었다. 이는 동학혁명군의 일방적 자치행위가 아니라, 전봉준 총대장, 손화중 총관령 등 혁명군 대표와 조선왕조의 위임을 받은 홍계훈 초토사와 김학진 전라감사 간의 협약에 의해 폐정개혁을 수행한 국가적인 차원이었다. 5. 전주동학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람 전주동학농민혁명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서영도 장군과 이복용 장수 이야기다. 서영도 장군은 완산 접주 출신으로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전주성 밖 완산 집강소 책임자로서 폐정개혁을 혁명적으로 단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 좌절 후 1895년 3월까지 최후 항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남문 밖 초록바위에서 ‘동학거괴 서영도’ 이름으로 공개 총살형을 당했다. 이는 그의 역할과 활동이 대단히 컸음을 보여준다. 이복용 장수는 소년접주 출신으로 완산전투 시기에 선두에서 큰 활약을 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복용은 애기접주의 별칭으로, 혁명군의 사기진작은 물론 관군들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였다. 애기접주 즉 소년접주들의 활약은 전국적으로 용맹을 떨쳤는데, 대표적으로 해주접주 김구(김창수), 장흥접주 최동린, 전주접주 이복용 등이 상징적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전주성 점령 과정에서 여성 동학군들이 큰 몫을 해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여성 동학도들이 성안에 몰래 들어가 대포 총구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등 목숨을 건 일화들이 많다. 여성접주의 상징적 인물은 장흥 지역에서 활약한 이소사 여장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6. 2차 동학농민혁명과 항일무장투쟁 일본군의 침략에 맞선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과 대규모로 항쟁한 우금티 전투 패배 후 각 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보은, 장흥, 대둔산 최후항쟁처럼 집단적으로 저항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 전주지역도 마찬가지로 최후항쟁 후 쫓기고 죽임을 당한 참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주 초록바위 천변에서부터 다가산 천변에 이르는 지역에서 체포당한 동학의병들은 숱한 죽임을 당했다. 일본 국왕 메이지의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하라"는 특명을 받은 일본군과 그 지휘를 받았던 관군은 초멸작전을 펼쳐 총살형은 물론이고 참수형, 산 채로 불태우는 화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다. 접주는 물론 무명 동학혁명군 수백, 수천 명이 처형을 당해 전주천의 물이 1개월 이상 핏물로 흘렀다는 말들이 전해오고 있다. 바로 이런 역사의 현장에 기념비는 물론 표지판을 세워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1차 기포, 반외세 2차 기포, 보국안민· 광제창생·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대의를 위해 기포하여 엄청난 피해로 풍비박산이 난 듯 했으나, 천도교로 거듭난 동학은 기미년 3‧1혁명을 통해 제2의 동학혁명으로 전개되었으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세계 혁명사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역사였다. 그 혁명 정신은 독립운동은 물론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민중항쟁, 6‧10민주항쟁, 최근에는 촛불혁명, 빛의 혁명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분단된 남북통일을 달성해야만 동학농민혁명은 성공한 혁명이 될 것이고 희생된 동학선열들의 후손된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특히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동학농민혁명의 진정한 명예회복과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될 것이다. 7. 동학농민혁명과 문학의 향기 동학농민혁명을 시나 소설로 펴낸 대표작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동학혁명 1백주년(1994년) 즈음 우리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를 말할 때 남한의 송기숙 교수(역사소설 『녹두장군』), 북한의 박태원 선생(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꼽았다. 송기숙 교수는 ‘녹두장군’ 개정판 후기를 통해 '민중이 자발적 합의에 이르면,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송기숙 교수께서 살아생전 나와 몇 번 만나 대하소설 『녹두장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녹두장군』도 원래 10권으로 계획했지만 12권으로 늘어나면서 글이 중간 중간에 늘어졌다”고 고백하였다. 박태원 선생은 『갑오농민전쟁』 집필 과정에서 시력과 전신마비 등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부인 권영희의 도움으로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박태원은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까지 방대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1894년 당시의 법제와 풍속,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하고 고증하였다 한다. 동학과 관련한 수많은 문인들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분 더 말씀드리자면 신동엽 시인의 대서사시 「금강」을 뺄 수가 없다. 나는 동학 관련 책 중에 「금강」을 가장 신명나게 읽었다. 읽고 또 읽고 한 열 번은 읽은 것으로 기억난다. 「금강」은 실존인물인 전봉준과 가공인물인 신하늬로 대표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동학혁명을 형상화하였다. 「금강」은 동학혁명이 상징하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의 과정이 이 땅 역사의 비극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해주며, 새삼 이 땅의 주인이 한민족 스스로이며 민중 그 자체임을 소중하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큰 의미를 남겼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 고장 이곳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두 분을 소개한다. 하나는 동아일보 신춘당선작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이다. 안도현 시인은 한 때 나와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그리 길지 않은 시이다. 시 전문을 그대로 소개하고 각자 느낌을 알아서 평가해보기 바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문학동네, 1997년 1쇄, 2002년 4쇄) 중에서. 작가들을 소개할 때 빼먹으면 좀 서운해할 사람이 있다. 바로 이광재 소설가이다. 이광재 작가가 동학 관련 책자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 등 여러 권을 출간했지만 최명희 선생기념 혼불문학상 수상작 『나라 없는 나라』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나라를 잃어가는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동학농민군, 선비들, 정치가들,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치열하고 진지한 삶을 담아냈다는 평가들이다. 이광재 작가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불렸던 김근태 선생의 조직에 들어가 함께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동학 관련 유적지도 함께 도보로 탐방했던 기억들이 솔솔 난다. 이 작가는 최근에 장편소설 『청년 녹두』를 펴냈다. 끝으로 여기에 계시는 시인, 소설가 중에 한강 작가의 뒤를 이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분이 꼭 나왔으면 하는 말로 본 강연을 마칠까 한다. 글 송암 이윤영 전주동학혁명전시관 관장. 저서로는 수운 최제우 선생 일대기 『만고풍상 겪은 손』, 동학농민혁명장편소설 『혁명』, 전주역사문화의 자부심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출간 예정. 오마이뉴스 74화 연재작, 동학문화대상 수상작) 등이 있다. -
[칼럼] 수운 대신사 출세 200년 이후 프로젝트지난해 10월 28일 동학을 창명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출세 20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들썩였다. 오랜 준비 끝에 마련한 출세 200주년 기념식에는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각 종단의 성직자와 정부 대표가 기념식에 참석해 동학의 창도와 수운 대신사 출세 2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경축했다. 기념식의 식전과 식후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축하 공연이 펼쳐졌다. 출세 기념일을 전후해 국제 컨퍼런스가 개최되어 석학의 입을 통해 동학 창도가 지닌 문명사적 의미와 현대 문명이 가진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수운 대신사의 통시적 혜안과 통찰을 들을 수 있었다. 개벽의 새 길을 연 수운 대신사를 받아들이지 못한 구체제에 의해 당했던 수난로(受難路) 걷기를 통해 고난과 질곡의 수난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2024년 연말에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 자료집>의 간행으로 출세 200주년 행사가 막을 내렸다. 화려한 출세 200주년 기념식은 끝났다. 1924년 수운 대신사 출세 100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역량을 모아 “수운 대신사 출세 100년 기념관”을 건립해 민족 구성원들을 위한 공회(公會)의 장을 제공한 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화려한 기념식은 끝났다. 기념식이 끝났다고 수운 대신사의 업적을 이 땅에 펼치는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친다. 이제 출세 200년 이후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운 대신사 출세 200주년 기념행사의 성과를 확산해 수운 대신사 출세의 의의와 동학을 세상에 알리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수운 대신사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기, 수운 대신사와 초기 동학에 관한 사료를 정리한 자료집,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천도교회월보>와 <신인간>의 수운 대신사에 관한 기사 모음집 등등 수운 대신사와 초기 동학에 관한 저술을 출판해 연구자 및 동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수운 대신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수운 대신사의 저술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 당시의 형태로 재현해 수운 대신사와 동학을 알리는 선물로 활용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세상 사람들이 동학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동학을 접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제공해야 한다. 다음으로 미래 세대들이 수운 대신사와 동학을 알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즐겨하는 웹툰(Webtoon)과 그래픽노블(Graphic Novel), 게임화된 학습 앱, AR/VR 체험 등 미래 세대를 위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통해 ‘손안에서 만나는 동학’을 창출해야 한다. 최근 열린 동학학회 학술대회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게임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주제의 발표가 있었다. 이처럼 미래 세대들이 수운 대신사와 동학을 알 수 있게 하는 동영상 제공과 젊은 감각으로 만들어 제공하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이번에 간행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 자료집>에는 수운 대신사와 관련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한 성과물이다. 특히 자료집의 가장 큰 성과로 수운 대신사의 사적지 조사를 꼽을 수 있다. 이를 활용해 수운 대신사와 동학을 알리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자료집을 보면 알겠지만, 수운 대신사의 사적지 가운데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몇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경주 관아의 감옥, 용담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대구 경상감영으로 이송되는 수난로(受難路), 수운 대신사의 마지막 길인 순도로(殉道路) 등에는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사람들이 이를 알고 찾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있듯이 한꺼번에 다 하려고 욕심내지 말고 계획을 세워 순차적으로 늘려가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수운 대신사의 사적이 정비되면 그 가운데 수운 대신사의 수난로를 ‘동학 순례길’로 명명해 순례길로 활용할 수 있다. 동학 순례길을 걸으며 세상 속에서 다친 마음을 치유하고, 나아가 한울님 마음을 찾는 길을 걷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 땅에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을 잘 실현하고 있는지 살피는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수운대신사의 표현으로 각자위심을 벗어나 동귀일체를 실천하는 사람과 단체,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단체 등을 발굴해 알리고 함께하는 사업이다. 이를 위해 “수운상”을 만들어 수여하는 것이 좋은 방안이 될 수 있겠다.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을 일상의 표현으로 하면 “타인을 한울님처럼 존중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공동체를 위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나 단체를 선정해 시상하고 동학의 가치를 펴는 사회적 활동도 전개해야 한다. 아직 이 땅 곳곳에 시천주의 본원적 평등이 실천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을 펼치는 이들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은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며 포덕의 다른 표현이다. 덧붙여 수운 대신사 출세 200주년 행사를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행사 담당자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행사의 좋았던 점을 살리고 미비한 점은 보충해 앞으로 있을 행사를 보다 규모 있게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당장 2년 후인 2027년은 해월 신사 출세 200주년이다. 2년 후의 더 나은 행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번 행사를 돌아보는 평가가 요구된다. 여기에 외부 전문가도 참여시켜 귀를 열고 조언을 들어야 한다. 생각나는 대로 수운 대신사 출세 200주년 이후에 해야 할 프로젝트 방안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이처럼 수운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행사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수운 대신사의 가르침이 여전히 필요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글, 성강현(천도교 대동교구장, 동의대학교 강사)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청년의 열정과 선배의 울림이 하나 된 축제천도교청년회 창립 106주년 기념식이 지난 8월 31일 오전 11시, 중앙대교당에서 봉행되었다. 1919년 창립 이래 한울님의 진리를 바탕으로 청년의 사명을 실천해 온 청년회는 이번 기념식에서 지난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미래의 비전을 함께 모색했다. 이상미 청년회장은 기념사에서 “106년이라는 세월은 선배님들의 피와 땀, 헌신과 열정이 쌓여 이룬 역사이자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강병로 종무원장은 격려사에서 “네 분 스승님은 우리 마음에 살아 있는 영원한 청년이며,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천도를 지켜주신 선배들도 영원한 청년”이라며 “청년회원 여러분은 밝고 긍정적인 비전을 가진 한울사람으로, 스승님들께서 보여주신 높은 기상과 의지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기념식은 1부 공식행사와 2부 축하공연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청년들의 재기발랄한 무대와 선배들의 기타 연주가 어우러져 세대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청년회는 앞으로도 교단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으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명을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한 기념사의 전문이다.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천도교 청년회장 이상미입니다. 먼저,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해주신 모든 동덕님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특히 멀리서 일부러 발걸음을 해주신 분들, 또 청년회와 늘 마음으로 함께해주시는 선배 동덕님들께 각별한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천도교 청년회 창립 106주년을 맞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106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며, 수많은 역사적 격동과 사회적 변화를 지나온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청년회의 맥을 이어오며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이라는 천도교의 대의를 지켜내고 실천해 오신 선배님들께 먼저 깊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그 숭고한 뜻과 실천 위에서 오늘의 청년회가 존재하고, 저 또한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천도교의 가르침은 언제나 명확합니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은 곧 한울이다. 이 한마디 안에 우리의 신앙과 실천, 그리고 삶의 방향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울로 태어나 서로를 존귀히 여기며, 인간과 자연과 만물을 공경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정신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언제나 유효하며, 또한 우리 청년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기준입니다. 청년회는 바로 이 가르침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해 온 주체였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민족을 깨우치고 독립을 위해 나섰으며, 사회가 불안할 때는 정의와 연대를 외쳤습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도 청년회는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봉이었고, 이는 오늘 우리에게 큰 자부심과 동시에 막중한 책임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저는 역대 회장님들에 비해 나이가 어린 편이며, 또 여성 회장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부담이 적지 않았습니다. 선배님들처럼 해낼 수 있을까, 청년회라는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청년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언제나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통을 이어가되, 그 속에서 미래의 길을 찾고, 새로운 시대의 언어와 행동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바로 청년입니다. 제가 여성으로서, 또 지금 시대의 청년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청년회의 역사와 정신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선배님들의 지혜와 가르침을 받들어, 다른 시선과 감각을 지닌 청년들이 더욱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습니다. 오늘의 청년회는 100여 년 전처럼 직접적으로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깨우치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청년회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일상 속에서 교리를 실천하며, 사회 속에서 따뜻함과 연대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작은 배려와 나눔이 곧 현대의 포덕이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서로를 살피는 것이 곧 광제창생이고,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 올바름을 세우는 것이 곧 오늘날의 보국안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작은 실천들이 모여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지상천국의 기초를 놓게 된다고 믿습니다. 앞으로 청년회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활동을 이어갈 것입니다. 과거의 발자취를 존중하며 선배님들의 뜻을 계승하고, 현재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하며,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지상천국 건설의 주역으로 세워나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청년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다양한 교류의 장을 마련하겠습니다. 또한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교리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문화를 바탕으로, 시대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며 포덕의 길을 활짝 열어가겠습니다. 존경하는 동덕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06년은 단순히 숫자가 아닙니다. 이는 선배님들의 피와 땀, 헌신과 열정이 쌓여 이룬 역사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청년회는 앞으로도 그 역사 위에 새로운 역사를 쌓아가겠습니다. 과거와 단절되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으며,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청년회의 정신으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이 귀한 자리에 함께해주신 모든 동덕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청년회의 앞날에 많은 관심과 지도, 그리고 아낌없는 응원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청년회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천도교와 3 · 1운동(17)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3·1운동의 준비 포덕 60년(1919) 당시의 교구장은 이종수(李種秀)였다. 구성교구는 태천교구와 합하여 구성대교구로 되어 있었다. 대교구장은 태천의 이정점 어른이었으나 구성교구장은 이종수 어른이 맡았다. 교구의 중요 직책은 전제원(典制員)에 백응구, 공선원(共宣員)에 전중록, 금융원(金融員)에 박응준, 서기에 원명준이었다. 각 전교실의 전교사는 모두 20명이었으며 다음과 같다.(포덕 60년) 구성면 김정상, 동산면 김관화, 오봉면 김상련, 방현면 임찬흡, 이현면 강만영, 노동면 배윤직, 운계동 허희경, 깅상동 이치언, 서산면 최봉호, 백운동 김낙용, 송수동 이천길, 대성동 최광한, 신음동 전학수, 관서면 이대화, 사기면 윤태화, 왕당동 김용연, 조악동 이시영, 이 밖에도 중방동·청용동 였다, 장동 전교실이 있었는데 전교사는 정기환·노인화 였다. 교회건물은 구성면 우부동에 4동(38間), 서산면 남평동에 2동(6間), 백운동에 1동(4間), 동산면 덕화동에 2동(9間), 방현면 하단동에 1동(5間), 청룡면에 2동(8間), 처나면 탑동에 2동(7間), 사기면 송백동에 1동(3間), 신시에 1동(5間)이 있었다. 연원은 이종수·백웅구 계통과 원치영·김정삼 계통이 주가 되었고 선천의 김상열(月鳳 金商悅) 계통이 약간 있었다. 3·1운동 준비는 연원계통으로부터 착수되었다. 제1차 준비사업은 자금조달이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3·1운동 거사자금으로 포덕 59년(1918) 11월부터 본격적인 모금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문헌인 ‘천도교일반’이란 글에 보면 “동년 12월 28일 이미 약 9만원의 건축비를 신도로부터 연사(捐捨)케 하고 그 중에는 전혀 신도의 임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반환해주도록 명한 바…”라고 하였다. 총독부는 천도교가 교당건축비라는 명목으로 모종의 자금을 모은데 대해 의심을 갖고 강제로 반환조치토록 하였던 것이다. 각 교구는 11월 초부터 모금에 착수, 1인당 5원 내지 10원씩을 목표로 약 50만 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구성에서도 약 1천호 정도가 모금에 응했으므로 그 금액은 5천 원이 넘는다. 포덕 52년(1911) 1년간에 납부한 월성미 총액이 8백9십7원(포덕 52년도 금융관 금전출납표)이었으므로 6배에 가까운 자금을 모아 올렸던 것이다. 다른 군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상한 각오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논밭을 팔고 소도 팔아 바쳤던 것이다. 이 자금 각출을 간과하고 3·1운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제 총독이 강제로 돌려주라고 하여 그 대책을 논의한 끝에 돌려준 것처럼 영수증만 발행하였다. 이런 사실이 후일에 발각되어 강계교구에서는 간부들이 기소되어 처벌받은 사실도 있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12월 1일 경운동 현 교당 기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모금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어 1월 말에 목표 액수가 완료되었다. 한편 총부는 정신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즉 중앙총부는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에 걸쳐 매일 하오 9시에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염원하는 기도를 봉행토록 하였다. 중앙총부는 이 기도를 각별히 진행시키기 위해 경성·해주·의주·길주·원주·경주·서산·전주·평강 등 9개 처에 대표기도소를 특설하고 주요간부를 파견하여 지도하였다. 각군 교구에서도 주요 간부들이 날마다 교당에 모여 기도식을 봉행하면서 장차 어떤 큰 일을 치르기 위한 마음다짐을 굳혀나갔다. 3·1만세운동의 본격적인 준비는 선천의 김상열(勉菴 金商悅)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월봉 선생은 선천에서 사기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보냈으며 이것을 다시 구성군에 비밀히 송달했다”고 사기면 허철 )선생이 증언하고 있다. 구성군교구에서는 선언서를 등사기로 비밀리에 더 많이 복사하여 각 면에 배포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운동 전개 연원과 지역관계로 운동은 3개소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즉 영북지방(사기면·천마면·관서면)은 신시(사기면 소재지)에서, 영남지방은 구성읍과 남시(방현면 소재지)에서 추진되었다. 구성읍은 구성면·서산면·동산면 등 3개면이 합쳐 준비하였고, 남시에서는 방현면·노동면·이현면 일부, 오봉면 등 4개면이 합쳐 준비하였다. 일본 총독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3월 10일(확인 곤란함)과 3월 11일에 구성읍과 남시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국독립운동사 1』에는 다음과 같이 일제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五) 철산·구성군 : …다음 구성군내의 운동은 읍내와 신시에서 주목을 끌 운동이 일어났다. 읍내운동은 3월 11일에 발생하여 3월 20일과 4월 1일에 각기 1천명 내지 3천명의 군중이 회집, 일 군경의 발포제지를 무릅쓰고 몇 차례씩 시위를 전개하였다. 신시에서는 3월 31일과 4월 1일의 양일간에 걸쳐서 약 1천 명 내지 1천 5백 명의 군중이 회집, 시위를 벌였으며 양일 다 살상자가 적지 아니 발생하였다.” (360면) (3월 10일과 20일의 시위운동은 확인하기 어려움) 평북도 장관이 정무총감에게 3월 31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四) 구성군 관내 : 동군 방현면 남시에서는 3월 11일 오후 2시 폭민 약 3백명이 일단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여 특히 헌병주재소에 쇄도코자 하였으나 미리 경계중인 구성 분견 소장이 해산시키고 주모자 15명을 체포하였음.”(760면) 三. 구성군 관내 : “3월 18일 오후 2시 사기면 신시의 장날에 편승, 야소교도 등을 중심으로 하는 폭민 약 3백 명이 독립기를 날리며 만세를 고창하고 헌병주재소에 밀려왔으나 즉시 퇴산시켰으며 주모자 10명을 검거하였음.”(762면) “본일(3월 11일) 삭주군 읍내에서 약 2천명, 구성군 읍내에서 약 3백...의 군중이 소요하여...”(764면) “三, 구성군 관내 : 읍내에서 31일 약 3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단 해산되었으나 재기하여 수(遂)히 사상(死傷) 3명을 내었으며 의하여 파병을 하였음. 동군 남시에서도 동일(3월 31일) 폭민 5천명 이상이 집합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음. 또한 동군 신시에서도 동일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선주수비대에서 15명의 파병을 하였음.”(766면) “二. 구성군 관내 : 4월 1일 약 3천명의 폭민이 읍내에 습래(襲來), 사방의 문에서 진입코자 함을 발포 해산시켰으나 계속 불응하여 평양에서 소위이하 병정 4명의 응원을 받아 엄중 경계중임.”(769면) 이상의 평북 도지사가 총독부 정무총감 앞으로 보고된 보고서에 의하면 구성군 읍내에서 두 번(31일, 4월 1일), 방현면 남시에서 두 번(3월 11일, 31일), 사기면 신시에서 세 번(3월 18일, 31일, 4월 1일)씩 모두 7차례의 시위가 있었다.(3월 10일의 만세시위는 확인이 안됨). 이밖에 자료로써 주목할 만한 것은 이병헌(李炳憲)의『3·1운동비사』가 있고, 이용락(李龍洛)의 『3·1운동실록』이 있으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3·1운동)』가 있다. 세 가지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 (十二) 구성군 의거 : 3월 11일 오후 2시 경에 천도교 주동으로 남시에서 약 4백명이 회합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헌병의 총칼에 사상자 3명을 내고 주모자 15명이 체포되었고, 그 후 3월 30일에는 읍내와 남시에서 다수의 군중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적의 총칼에 사상자가 10명이나 되었다. (3월 30일은 31일의 잘못인 것 같음) 이용락의 『3·1운동실록』 구성 : 3월 11일 오후 2시경 남시에서 약 4백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사상자 3인을 내고 해산을 당하였다.“3월 30일 읍내와 남시에 2만 여명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해산을 당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10여인이 총살을 당하였고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3월 30일은 31일의 오기인 것 같음) 『독립운동사』 제9절 구성군 : 3월 11일 하오 2시경 군내 남시에서 군중 4백여 명이 시위투쟁을 벌여 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들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피검자 15명을 내었다. 3월 30일(31일의 오기인 것 같음)에는 오전과 정오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3백 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여 읍내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헌병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경찰과 충돌, 사상자 수명을 내고 해산했다. 3월 31일은 남시 장날이었다. 이날 정오를 기하여 5천여 명의 군중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일본 기록에는 이날 군중은 낫과 도끼를 들고 헌병주재소를 포위, 헌병들에게 폭행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자기네들 발포의 구실을 삼기 위한 과장 보고이려니와 이날의 투쟁이 심상치 않았던 양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 7명과 피검자 5명을 내었다. 같은 날 31일에 신시에서도 일어났다. 즉 이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벌였다가 헌병주재소로 몰려드니 헌병이 발포하여 부상자 1명을 내었다. 4월 1일에는 읍내와 남시와 신시 세 곳에서 일어났다. 읍내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 9백 명 가량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측은 헌병과 군대가 연합하여 이를 제지 해산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들은 끈덕지게 투쟁을 계속, 하오 5시에 이르러서야 부상자 3명을 내고 해산하였다. 남시에서는 전날의 투쟁을 이날에 재개하였다가 강제 해산되었으며, 신시에서는 이날 상오 10시경에 전날보다도 더 많은 1천 5백명 이상의 군중이 시위투쟁을 재개하였다가 경찰의 발포로 군중측에 부상자 5명, 피검자 30명과 일본 측 부상자 4명을 내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확실한 것만 추려보면 구성군에서의 3·1만세시위는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즉 3월 11일에는 남시에서, 3월 18일에는 신시에서, 3월 31일에는 읍내와 남시 및 신시 등 세 곳에서, 4월 1일은 읍내와 신시에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고 여겨진다. 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