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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 한울님의 가르침 되새기며 미래를 다짐하다지난 8월 20일, 강원도 홍천군 두천면 천현2리에 자리한 가리산수도원에서 개원 43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가 원장으로 있는 가리산수도원이 걸어온 43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수도원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하며 미래의 발전을 다짐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인준 교령, 김명덕 여성회본부 회장,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 석영기 춘천교구장, 성충모 강남교구장, 서종환 의창수도원장, 임형진 동학학회장을 비롯한 40여 명의 교인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는 기념사에서 “모시고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기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을 내 형제, 내 아들·딸, 내 손자라고 부릅니다. 여기 모이신 내 자식들이 항상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제가 오늘까지 100살의 나이에도 죽지 않고 이 자리에 나와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내 나이 57세에 개원해서 지금 100세가 되었습니다. 작년 8월 20일에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한울님이 한 번 더 만나게 해 주셔서 오늘이 더욱 기쁩니다.”라며 후학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 “주문을 많이 외우시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셔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지 말고, 내 배가 고파도 더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허리를 졸라 그 사람을 먹이려는 덕을 피우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내년 8월 20일에 또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섭섭해하지 마시고, 정성과 공경으로 후학에게 잘 이어가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당부했다. 인사말과 함께 <탄 도유심급>, <내수도문> 등 스승님의 말씀을 품고 실천하는 삶을 강조했다. 박인준 교령은 축사에서 “오늘 가리산 수도원 개원 43주년을 맞아 이렇게 축사를 드리게 되어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방금 종법사님 말씀을 들으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경전의 구절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체화하고 실천하신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그 진심이 바로 종법사님의 정신이고, 또 가리산 수도원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며, "저는 그 정신을 ‘인내천 아리랑가’에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시천주, 불사약, 남북통일, 그리고 세계 포덕의 꿈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천도교의 길이며, 민족이 하나 되는 동귀일체의 정신이라 느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아 함께 애써주신 혁암 김혁태 종학대학원장님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천도교가 미래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도력을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수련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고, 완성된 삶을 세상과 남을 위해 희생하며 쓰는 것이 도의 참된 길입니다. 그런 인물을 길러내는 곳이 바로 이 수도원이며, 천도교의 미래가 수도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돌아보면 의암 성사께서 3.1혁명을 준비하며 봉황각에서 수련으로 수많은 지도자를 길러내셨듯, 오늘의 수도원 역시 그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리산 수도원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종법사님의 피와 땀, 그리고 모든 수도 가족들의 정성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그 공덕이 차곡차곡 쌓여 더 큰 결실을 맺으리라 믿습니다."라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종법사님과 혁암장님, 그리고 수도원 가족 여러분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리며, 늘 건강과 평안을 한울님께 간절히 심고드립니다. 오늘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도 행복과 기쁨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명승철 연원회 부의장은 이날 축사를 통해 "오늘 가리산 수도원 창립 43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은성당 종법사님의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개원기념일에 많은 분들께서 참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실 거라고 우리는 믿고 또 힘들 때 어머님 품이 생각나듯 항상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은성당 종법사님께서 건강하셔서 우리들 마음의 고향으로 오래 남아 계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서종환 의창수도원장은 축사에서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에게 이곳은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저 자신까지 수도와 수련을 통해 도를 닦아온 고향 같은 곳이며, 종법사님은 제 어머니 같은 분이라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모두가 수도원의 발길과 주문을 이어가 천도교의 도를 완성하고, 종법사님과 수도원이 오래도록 건강하고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김명덕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은 “오늘은 원장님께서 피와 땀으로 여성들의 힘을 일깨워 주신 가리산수도원 개원 43주년 되는 날입니다. 해월신사님 말씀처럼 여성 수도의 길을 몸소 실천해 오신 종법사님은 100세를 맞으신 오늘까지 수많은 수도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건강하시어 우리 여성들의 믿음과 정진에 큰 힘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리산수도원 43주년을 맞이하며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과 교단을 지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가리산수도원이 개원 이래 43년 동안 걸어온 역사를 함께 되돌아보며, 교인들은 그 시간 속에 쌓인 정성과 신심을 마음 깊이 새기고, 무엇보다도 한울님의 가르침을 다시금 확인하고 실천을 다짐하는 매우 뜻깊고 감동적인 자리가 되었다. -
용담 성지를 신혼 여행지로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입니다. 지난 4.12~13일 양일간 경주용담 동학교육수련원에서 율암 신명식 도정님의 주재하에 순원포 동덕들의 워크숍을 계기로 영등포, 수원, 성남, 부산시, 대동, 사천, 삼천포교구의 동덕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회를 주관한 도암 선도사께서 각자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교단 발전과 연원 발전을 위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시간을 갖자면서 남성 동덕 한 분, 여성동덕 한 분 이런 순으로 발언토록 진행해 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단의 현실을 걱정하고 후손들이 신앙을 기피하려는 사회 풍조와 맞물려 걱정하면서 어린이 시일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발전방안을 꾸밈없이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의 차례가 되어 남편(운암 최도수)을 만나게 되면서 천도교 신앙을 하게 되었고 용담으로 신혼여행을 오게된 것을 털어 놓으면서 저의 발언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없으며 또한 도력높은 숙덕 어르신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여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나는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한울님을 제 마음속에 모시고 생활한다는 확신만은 항상 갖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요. 이제부터 썩 대단하지도 못한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할아버님을 비롯하여 아버님, 그리고 시아주버님들까지 대대로 뿌리 깊은 천도교 집안 자손인 운암 최도수 동덕을 만났던 38년 전은 벚꽃이 만발하고 온 세상이 꽃 천지였던 봄날이었습니다. 저는 경남 고성이란 작은 지역에서 태어나 여중, 여고를 나왔고 대구대학교를 거쳐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무렵 남편의 고향인 삼천포에 처음으로 종합병원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1987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온 남편을 만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만나면서 대화도중 천도교 사상과 1대 2대 3대 교조이신 스승님들의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그때까지 사실 저는 무신론자에 불과했으므로 솔직히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여겨졌습니다. 3년여 동안 만나오면서 첫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으나 그때 저를 데리고 간 곳이 경주 용담정이었습니다. 조그만 트럭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려 겨우 찾아갔던 그곳, 용담정에서 처음으로 이 사람을 계속 만나고 또 미래를 설계한다면 나는 천도교 집안의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무게감과 저를 짓누르는 뭔가를 느끼며 고민도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 천도교인으로 살아가는 방법, 신앙생활의 첫걸음과 어떤 공부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포덕131년(1990) 10월 28일 수운대신사님 탄신일에 맞추어 지금은 환원하신 현암 최영윤 선도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주례사 내용 중 딱 한 가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념일만 되면 생각나는 쩌렁쩌렁하게 힘주어 말씀하셨던 그 내용! 어머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 세 양동이의 피를 흘릴 만큼 큰 산고 속에서 너희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부모님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는 것 같이 봉양하라시던 그 말씀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혼식 후 창녕 부곡 하와이로 신혼여행지를 정했다는 애길 듣고 그나마 기대를 했건만 결국 또 저의 신혼여행지는 경주 용담정이 되었습니다. 샛노란 한복을 차려입고 꽃고무신을 신고 비탈진 길을 둘이서 오를 때 쪽 길옆 산에서 반겨준 건 그나마 날다람쥐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딸 아이가 태어나 두 돌이 지날 무렵 화악산이란 곳으로 수련하러 같이 가자는 큰댁 형님이신 박둘덕 봉신당님의 애길 듣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굽 높은 신발까지 신고 성큼 따라나섰습니다. 그때 아마 총부에서 주최하는 여성회 수련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삼천포교구에서는 윤상선 정미당님을 필두로 다섯 분 정도 참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새벽부터 출발하여 오후 늦게 화악산 밑 민들레 슈퍼 앞에 도착했을 땐 강행군에 이미 지쳐 있을 때였지요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름이라 신발을 벗고 계곡물을 건너서 늦은 저녁이 다 되어야 수도원에 도착했으니까요. 일주일이 일 년처럼 느껴졌던 고행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조언과 아낌없는 격려로 우리 일행을 이끌어 주셨던 정미당 윤상선 내수도님과 봉신당 박둘덕 큰형님의 은덕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첫걸음마를 내딛게 해주신 희생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화악산 수도원 수련을 기점으로 살아가면서 삶에 지치고 어려운 난간에 봉착했을 때 경주 용담수도원, 가리산수도원, 명동산 수도원 등으로 저의 마음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올해로 12년째가 되는가 봅니다. 남편의 하던 일마저 큰 어려움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저 또한 3교대 근무에 온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딸이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뜻을 가지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보겠다는 이야길 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새벽길을 가방 하나만 챙겨서 나섰습니다. 20여 년 전 한 번 가봤던 길을 묻고 물어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쯤에서야 화악산 입구 민들레 슈퍼 앞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 혼자의 몸으로 어둠 속 깊은 산을 오른다는 공포와 무서움이 먼저 앞서더군요. 마음을 다잡고 소리 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간절한 심고를 드리고 주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깜깜한 밤, 엎어지고 미끄러지면서 오르길 반복했을 무렵,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궁을기가 보였습니다. 저의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안도의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면서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 혹시 산짐승이라도 나올까 봐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워가며 도착한 화악산 수도원. 그렇게 반갑고 고마워서 수도원에 계신 분들 앞에서 소리 내 울어 버렸습니다. 당시 영등포교구 소속 여성회에서 수련 오신 몇 분들과 같이 일주일간의 수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련 4일째 되던 날 새벽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도 이젠 떳떳한 천도교인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끝도 없고 수도 없이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쏟아지던 폭포수를 처음 보았으며 온몸과 머릿속이 하얗고 저에게 끊임없이 내려와서 안기던 궁을기와 일심이란 글자를 어떻게 글로 표현을 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심(一心)이란 글자를 흰 종이 위에 수도 없이 썼었던 그때 그 감동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숙덕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수도원 옆 샘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앞날까지 몸살 기운이 있었던 제가 샘물을 다 퍼내고 파랗게 끼 이끼를 씻어내면서 흘렸던 눈물은 분명히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일주일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마지막 날 내려오는 그 산길은 올라갈 때와는 정반대로 뛰어서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울 고시원에서 공부하던 딸의 베개 속에 고이 간직해온 영부 한 장을 정성스럽게 넣어두고 심고를 드린 후 조용히 내려왔고 딸은 첫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11년 차 시청에 근무 중입니다. 저는 누가 뭐라 해도 분명히 한울님의 은덕이며 조화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이 조금 넉넉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저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한울님이란 든든한 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매년 그러하듯 5월이 왔습니다. 양가 부모님 모두가 환원하셨지만, 그 성령은 항상 저희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기에 5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그 흔하디흔한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한울님 스승님 양가 부모님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지난 겨울 천도교여성회 동계수련에 남편 운암 최도수 동덕과 참가하여 둘이서 용담정을 오르면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운암, 만약 먼 훗날 어느 한쪽이 먼저 육신이 떠나게 된다고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지금처럼 혼자 용담정을 찾아오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그 옆에는 서로가 함께하고 있다고 믿읍시다. 그리고 가능한 지금처럼 함께 손잡고 육신이 떠나는 날까지 오래오래 천도교인으로서 한울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갑시다." 워크숍을 마치면서 동학 교육수련원이 하루속히 우리 천도교에서 운영해야 주문 수련, 새벽기도 등 자유롭게 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있었고 앞으로 동덕들이 꾸밈없이 토론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주신 용담수도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올리게 되어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이 또한 한울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나가는 천도교인으로 남겠습니다. 동덕님 사랑합니다. 글, 삼천포교구 선우당 김명숙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
준암 박인준 교령, 조동원 종법사 예방지난 11일 준암 박인준 교령은 가리산 수도원을 찾아 조동원 종법사를 예방하였다. 조동원 종법사는 박인준 교령에게 “잘난 체하지 말고 있는 체하지 말고 아는 체하지 말고 항상 우·목·눌 세 글자를 항상 잊지 말고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일상 생활에 도가 있으니 항상 평상시의 삶 속에서 한울님 모심을 잊지 말고 주문을 염염불망하면서 스승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제 새로운 교령이 되셨으니까 앞으로 우리 교단 발전과 포덕 교화를 위해서 많이 힘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고 당부하였다. 박인준 교령은 “이제 종법사님 뜻을 잘 받들어서, 좋은 말씀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우리 교단을 위해서 제가 열심히 우리 총부 직원들과 힘을 합쳐서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종법사께 다짐하였다. -
가리산수도원 개원 42주년 기념식지난 8월 20일 강원도 홍천군 두천면 천현2리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원장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에서 개원 4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남수 전 교령, 이미애 교화관장, 정갑선 교무관장, 신명식 천도교유지재단이사장 등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는 기념사에서 "한울님의 감응으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후학을 내 놓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높은 후학들이 많이 계십니다. 늘 강조하였듯 부화보순, 탄도유심급, 내수도문을 매일 같이 봉독하고 가슴에 새기며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새벽에 해월 신사님을 뵈었는데, 오늘 천도를 살릴 분들이 오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잘 해낼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단을 위해 힘써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이미애 교화관장은 축사를 통해 "가리산수도원 42주년을 맞이하며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함께해주신 여러분들과 함께 교단을 지키고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신명식 천도교유지재단이사장은 "개원 42주년을 축하드리며 교인들이 마음 편하게 수련할 수 있는 수도원이 되도록 재단에서도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가리산 수도원이 걸어 온 42년의 역사와 함께 교인들의 깊은 마음 속 한울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였다. -
윤석산 교령, 가리산 수도원 방문해 조동원 종법사 예방지난 6월 13일 윤석산 교령은 가리산 수도원에 방문하여 조동원 종법사를 만났다. 조동원 종법사는 윤석산 교령에게 "교령 취임을 축하드린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서 교단을 위해 열심히 일해달라. 일용행사가 도 아님이 없으니 생활 속에서 한울님을 잊지말고 열심히 수도와 신앙에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 각 교인들은 스승을 잘 만나 바르게 알고 도를 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윤석산 교령은 "오랜만에 종법사님 건강하신 모습을 뵈오니 정말로 기쁩니다. 오래 오래 저희 곁에 계시면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답하며 포부와 다짐을 밝혔다. -
천도교여성회100년사 출간“여성이 천도교의 주인이다! 여성이 다음(새로운) 세상의 주인이다!”를 표방하며 창립된 천도교여성회가 2024년으로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천도교여성회는 1924년 4월 5일, 천도교 제3세 교조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부인 수의당 주옥경(守義堂 朱玉卿, 1894~1982) 초대회장을 중심으로 천도교의 여성들이 창립한 단체로, 창립 당시 이름은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이다. 전성기에는 전국 200여 개 지부에 3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때도 있었으나, 현재는 전국 60여 개 지부 3천여 명의 회원을 망라하고 있다. 역대 임원은 초대회장 주옥경을 비롯하여 42대에 걸쳐 모두 20명의 여성회장(중임 또는 3연임 이상 포함)이 재임하였으며, 부회장 이하 임원 숫자만 1천 명에 육박한다. 처음 이름인 ‘내수(內修)’는 천도교의 핵심 교리인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따라, 내 안(內) 모신 한울님 마음을 갈고 닦아서(修) “인내천 세상”을 이루는 주역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도교여성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6.25 전쟁과 근대 산업화시기를 거쳐 오는 동안, 안으로는 수도연성을 통한 도가완성과 교회발전을 도모하고,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는 한편, 밖으로는 사회봉사 활동, 여성인권 신장 운동, 남북 천도교여성 교류사업, 선열 선양사업, 수도원(修道院) 및 기념관 건립 사업 등 굵직한 대외 사업 등을 전개해 왔다. 또한 대외적으로 (사)한국여성단체연합,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여성위원회 등의 연합단체와 연계하는 등 종교 및 사회 평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천도교여성회 100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모심과 살림의 길이었으며, 천도교 여성들은 그 길을 정성과 공경과 믿음의 자세로 걸어왔다. 모심과 살림이란 안으로 나 자신을 한울여성으로서 고귀한 존재로 모시고, 밖으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 전체를, 나아가 기후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생존-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전 지구적 재난 상황을 생명살림의 자세로 살려나가는 주역을 (천도교)여성들로 설정하는 사상적 근거와 역사적 실천의 경험을 통해서 제시한다. 천도교에서 여성운동은, 일찍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노비를 해방하여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는 실천을 몸소 행한 것은 물론, 시천주, 즉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가르침에 따라 남녀 평등한 조건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수련에 임하게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제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은 “베 짜는 며느리가 곧 한울님”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또한 “부인(여성)은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하고, 또 “구녀일남(九女一男: 남성 1명이 도통하는 동안 여성은 9명이 도통함)의 운수가 도래한다”고 하였으며, 또 “나(=최시형)는 부인(여성)도 스승으로 삼는다”고 하는 등 여성 존중의 교리를 설파하였다. 또한 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법은 나를 향하여 제사상을 차리는 혁명적인 제사법이고, 훗날 ‘청수 한 그릇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천도교 특유의 제사법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또한 과중한 제사 문화에 시달리는 여성해방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는 그때까지 이름이 없이 ‘○씨 부인’ 등으로 불리던 여성들에게, 모두 이름을 짓도록 하였으며, 동덕여학교(오늘날 동덕여대) 등의 여학교를 운영 또는 지원하여 여성 인재 양성과 계발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바탕 위에 창립한 천도교여성회는 그 후 천도교내성단, 천도교내수회, 천도교부인회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시련을 거쳐, 1968년 ‘천도교여성회’라는 이름을 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도교여성회100년사』는 100년간의 천도교여성회 역사를 제1부에서 여명기(창립 전) - 창립기(1924~1936) - 시련기(1936~1956) - 재건기(1956~1968) - 준비기(1968~1980) - 성장기(1980~2001) - 개화기(2001~2019) - 전환기(2019~현재)로 구분하여 시간 흐름을 축으로 여성회 활동사를 살피고, 제2부에서 ‘기념사업’, ‘조사 및 학술연구사업’, ‘문화사업’, ‘사회활동 및 대외협력사업’ 등으로 공시적으로 살피면서 천도교여성회 역사와 주요 여성 지도자들을 조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여성으로서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에 초대회장 주옥경(1894~1982)을 비롯하여, 양이제(1892~1985), 차기숙(1899~1994), 최시영(1904~1992, 이상 환원), 조동원(1926~ 생존) 등 5명이 추대되었으며, 현재 천도교단의 유일한 종법사는 ‘조동원(전 가리산수도원장)’이다. 결론부에서는 천도교여성회 과거 100년사를 기반으로 미래 100년의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이 책이 과거사 정리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선언문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천도교여성회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종교 내의 여성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천도교여성회가 겪은 시련과 그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신적 강인함과 사회적 기여는, 단순한 종교 단체의 활동을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천도교단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천도교여성회의 역사 또한 내적이며 종교적인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사 속에서 시대 흐름과 시대적 과제에 적극적으로 응전해간 민족운동사, 여성운동사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으므로 그러한 내용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여성회100년사』는 한국 여성사와 사회사의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천도교여성회의 100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에서 여성들이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천도교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과 도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간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종교 단체의 역사를 넘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이끌어왔는지에 대한 귀중한 사례이다. 한편 이 책은 천도교여성회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조직으로 편찬위원, 자료위원, 집필위원으로 구성되어 집필하였다. 최종 집필은 박길수, 노은정이 담당하였다. 기획은 천도교여성회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담당하였다. 추진위원회는 박징재 현 천도교여성회회장을 위원장으로 여성회 원로, 고문들을 자문위원으로, 여성회본부 상임위원, 중앙위원과 전국 여성회지부 회장들을 추진위원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천도교여성회는 오는 3월 25일 창립 100주년을 맞아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삼일대로 457)에서 제100주년 창립기념식과 함께, 『천도교여성회100년사』 출판봉고식(기념식)도 함께 봉행한다. -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3)<지난 호에 이어>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1925년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참새골에서 태어난 조동원 종법사는 아버지 조만경, 어머니 김문채 사이에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오십 리 밖에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다니지 못했다. 길쌈과 바느질 등의 일을 배우며 18세가 되어 열 여섯 살이 많은 천도교인 故김동화 선생과 혼인한다. 일제강점기와 전쟁기의 상흔 속에서 살아왔다. 천도교의 진리를 깨닫고 수련을 이어나가며 수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리기 위해 염주알을 손에 쥐고 주문을 외웠던 삶의 길이 촘촘히 수도원 가는 길에 이어졌다. 인생은 때로 너무 짧다. 전쟁이 일어났지. 6.25 때야 뭐 말도 못하게 죽을 고비 다 겪었어요. 스물세 살에 남편을 따라 월남을 했습니다. 삼팔선을 넘어왔지요. 남편이 몇 달 먼저 월남하시고 내가 뒤따라 왔어. 그때 북한은 공산당이 독재를 할 때였어. 살 수가 없는 거야. 삼팔선을 넘어 남한 땅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지. 남편을 만나러 춘천으로 갔어요. 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지요. 월남해서 춘천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밤 춘천 시내에 포가 떨어져요. 밤새 총소리가 나더니만 아침에 공산당이 춘천에 점령했어요. 방공호에 숨었지. 사흘을 있었어. 인민군이 집까지 쳐들어와서는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는 방공호로 쳐 넣어서 따발총으로 쏘았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죽었어. 피난을 가다가, 첫 아기 낳은 거를 안고 있었는데, 애가 죽었어. 두 살된 첫아기가. 방공호 속에서 남편을 찾았지. 이렇게 살펴보니까 문턱에 염주를 두른 팔뚝이 보이더라고. 아, 저기다 하고서는 죽은 사람을 막 비집고 나가서 팔을 탁 쳐드니까, 눈을 반짝 뜨면서 날 더러 죽은 이처럼 하고 가만히 있으래요. 그래서 아이고, 남편이 살아있으면 됐다, 하고서는 아이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 죽은 애를 안아 올렸더니, 피가 주르르 흘려. 그 자리에서 염주를 올려놓고 정신 빠지게 주문만 외웠지. 밖에서 소리치는 여자가 하는 말이 “공산당이 사람 살리려고 나왔지 사람 죽일려고 나온 줄 아느냐”고 말이야. 공산당들이 나더러 남편 내놓으라, 그래. 남편 돌아가시고 애들만 데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거짓말이라면서 총을 갖다가 가슴에 대고 쏘려고 하더라고. 그런데 총알이 안 나가는 거야. 그러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중국 군인이 총을 메고 들어오는 거야. 총을 겨누고 있던 사람이 총을 빼앗겼지. 그런 순간들마다 주문을 외웠어. 그러니까 주문을 많이 외우니까 한울님이 살려주는 거라. 한울님이 ‘오늘은 콩밭으로 나가라.’ 하시거든. 그 말씀에 따라 콩밭으로 나가면 집에 와서 천장에 총을 쏘았어. 그리고 다른 날 콩밭에 가 있으면 한울님이 ‘오늘은 들어가라’, 하시거든. 그러면 콩밭에 와서 사람들을 다 잡아갔어. 그렇게 안 죽고 살았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 말로 다 못해. 옛날 어른들 하는 말이 염주만 두르고 있으면 난리가 나도 안 죽고 산다고 했어요. 피난길에 남편이 죽은 줄 알았어. 그런데 이 양반이 깨진 얼음을 타고서 건너와서 안 죽고 살아왔어. 거기서 붙들고 울고 염주 때문에 살아왔다고 했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염주 때문에 살아서 돌아온 거야. 남편은 수도원을 차려놓고 3년 만에 돌아가셨어. 일흔 아홉에. 천도교 믿는 사람들은 모든 걸 내가 해야 할 수련으로 해야해. 내 하는 모든 것이 도가 되기 때문에 일용 행사가 도야. 밥을 할 때도 쌀 다섯 번씩 씻으라고 하잖아요. 쌀을 다섯 번씩 씻어서, 안칠 적에 잘 되게 해달라고 심고하고, 밥 풀적에 심고, 먹을 때 또 심고, 다 먹고 나서 심고. 하여튼 심고를 수십 번 해야 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뭐 지금도 누가 뭐 사업이 안 된다고 하면 심고를 해요. 또 부화부순이 안 된다, 암에 걸렸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냥 심고부터 하는 거야. 그렇게 심고를 부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심고 드리는 사람은 셀 수가 없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다리를 못 쓰니까, 어떻게 보면 심고 드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한울님 뜻 같아. 그것밖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야. 제가 유방암에 걸렸을 때도, 수련을 했어요. 저는 화악산에 가서 수련을 하면서 유방암을 다 고쳤어요. 병원에서, 조동원이는 사람 못 될 거라고 그랬대. 아휴 말도 못해. 하여튼 도 닦는 일을 그저 열심히, 일용행사로 해야 해요. 딴 거 없어. 남의 말 듣고서 그렇게 되려고도 하지 말고, 내가 가정에서 으뜸가는 한 식구가 돼야 해. 내가 일용 행사를 잘하면 그 자리에 들어가고 못 하면 못 들어가는 거야. 남이야 떡을 먹든지 밥을 먹든지 남의 말 하지 말고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육부만 하나 하나 잘 간직하면 돼요. 그거는 남이 훔쳐가질 못해. 이거 못 훔쳐가. 물질이 많으면 훔쳐가죠. 말도 못해. 그러니까 묵묵부답하고 닦아도 묵묵부답하고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한울님으로 대해줘야 해. 다 한울님이지. 한울님 아닌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말고 다 일체 똑같이 대해주세요. 내 손에 귀중한 게 있다고 합시다. 먹는 거라든가, 물건이라든가 내 손에 생겨서 누군가에게 갖다 주려면, 내 자식보다 남의 자식에게 더 많이 줄 마음이 생겨야 해. 내 자식은 조금 줘도, 남의 자식 많이 주고. 내 부모를 조금 드려도, 남의 부모에게 많이 드리고. 마음을 그렇게 쓰도록 바꿔줘야지. 그거 바꾸지 못하면 주문 암만 외워도 안 되고 경전을 암만 봐도 입에서만 달달 외우지 소용이 없어. 정답으로 들어가야 해. 천도교를 왜 해야 하냐? 천도교를 해서 한울님을 찾아야지. 그리고 한울님을 찾는 것보다도 내가 바로 잘해야 해.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육부를 똑바로 잘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딴 거는 다 저절로 돼요. 범인들도 밥 먹고 나면 배부른 거 알고, 배고픈 거 알고 화장실에 가는 거 알잖아요. 알고 가잖아요. 그거는 저절로 다 알고서 느껴서 가는 거지. 도를 제대로 닦으면 그걸 느껴서 알고 가는 것처럼 매사 이래, 몸으로 느껴져. 그렇게 몸으로 느껴서 알게 되는 거야. 그리고, 중요한 것 또 하나는 남의 비밀은 말하지 말라. 지켜줘라. 나는 평생 천도교를 했어요. 내가 죽기 전에 후학들에게 왜 천도교를 해야 되는가? 이 천도교의 진리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요. 천도의 진리는 내가 깨달은 게 진리야. 내가 사람 되는 게 진리야. 하늘 사람 되는 게 진리야. 그거 안 되면 껍데기를 찾는 거지. 내가 아무리 배운 글이 없고 무식해도 내가 한울님을 위하는 마음, 식구들을 위하는 마음 그거는 알고 진리를 찾는 거지. 딴 게 없어. 그게 도야. 우리는 다 한울님 은덕으로 먹고 살아요. 땅에 실려서 하늘이 덮어주잖아. 그게 바로 땅은 어머니고 하늘은 아버지야. 그러니까 항상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야 해요. 내 엄마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한울님한테 합해진 거야. 그러니까 천지부모로 엄마, 아빠 찾으면 나를 낳아준 엄마도 거기 다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를 못 봐도 항상 어머니 아버지 감응해 주시옵소서. 하고 심고를 드리는 거지. 종법사님이 마음에 품었던 스승님 말씀이 뭐였어요? 마음에 품은 스승님의 말씀은 제일 먼저 그거지. 내가 일용 행사를 잘 해야 한다. 첫째 부화부순 부모 잘 모시는 것 그거를 100점 만점으로 해야 된다 이거야. 부화부순도 100점, 부모님 모시는 것도 100점, 자식들 키우는데 때리고 욕하고 그러지 말라. 어린아이는 한울님이기 때문에, 한울님을 못 쓰게 된다. 애 때리면 죽는다. 내수도문에 다 있잖아요. 『탄도유심급』에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을 오직 밝히는 것이 도니라. 덕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믿음에 있고 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운 데 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정성에 있고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은 듯하나 그러하고 먼 듯하나 멀지 아니하니라. 종법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지상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상천국? 지상천국이 여기가 천국이여 이게 천국이여 그러면 여기서 천당을 찾아야지. 여기서 천당을 못 찾으면은 저 세상에는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 그러니까 있다 하면 여기서 천당 찾은 사람이 거기 갈 수 있고 천당 못 찾은 사람이 있어도 못 가. 그러니까 여기서 천당 차원을 찾아야 돼요. 나 하나 다 닦아라. 한울님으로 닦아 놓으면은, 그러니까 다른 거 여러 가지 자꾸 생각할 거 없고 사심을 버리고 천심으로 발을 디디면 돼. 천심으로. 모든 게 내 말대로 전부 내 것이지, 다 남의 것이 아니야. 부모도 내 부모, 다 내 형제니까 언제든지 욕심 버리고 남을 미워하는 거 버리고 그것만 따라가면 되는 거야. 그래서 주문을 많이 외우고 주문 외워서 저절로 열어줘야지. 내가 반드시 열겠다. 이런 생각하지 말고 내가 부지런히. 생활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내 식구들한테 열심히 해주고 그게 도지 딴 게 도가 아니여 은성당 조동원 가리산수도원 원장 약력 포덕 67년 평안북도 구성군 이현면 진도동 출생 포덕 86년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혼인 포덕 88년 38선은 넘어 월남, 강원도 춘천에 정착 포덕 103년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으로 이주,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탄동전교실 운영 포덕 109년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읍으로 이주, 우암 김동화 선도사와 유성전교실 운영 포덕 110년 천도교종학원 수료, 유성전교실 전교사 포덕 115년 부산시 광안리로 이주 포덕 118년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 홍천전교실 운영 포덕 120~포덕123년 3년간 독공수련 포덕 12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초대 원장 취임 포덕 128년 남편인 우암 김동화 선도사 환원(향년 79세) 포덕 134년 천도교 금강포 연원회 도훈 포덕 14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20주년 포덕 15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30주년 포덕 163년 가리산수도원 개원 40주년 <끝>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
3월 25일, 천도교여성회 창립100주년 기념식 봉행국내 최고(最古) 역사를 자랑하는 여성단체 중 하나인 천도교여성회(회장 박징재)가 올해 3월 25일 창립 100주년을 맞아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삼일대로 457)에서 제100주년 창립기념식을 봉행한다. 천도교여성회는 창립 100주년을 맞아, 『천도교여성회100년사』 를 간행하면서, 출판봉고식(기념식)도 함께 봉행한다. 『천도교여성회100년사』 는 200자 원고지 30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00년 동안 활동해 온 천도교여성회 역사를 망라한 대작(大作)으로 선보인다. 천도교여성회는 1924년, 천도교 제3세 교조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대표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부인인 수의당 주옥경(守義堂 朱玉卿, 1894~1982) 초대회장을 중심으로 당시 천도교단의 주요 여성들이 창립한 단체로, 창립 당시 이름은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이다. 전성기에는 전국 200여 개 지부에 3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때도 있었으나, 현재는 전국 60여 개 지부 3천여 명의 회원을 망라하고 있다. 역대 임원은 초대회장 주옥경을 비롯하여 42대에 걸쳐 모두 20명의 여성회장(중임 또는 3연임 이상 포함)이 재임하였으며, 부회장 이하 임원 숫자만 1천명에 육박한다. 내수(內修) 천도교의 핵심 교리인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따라, 내안(內)에 모신 한울님 마음을 갈고 닦아서(修) “인내천 세상”을 이루는 주역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도교여성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6.25 전쟁과 근대 산업화시기를 거쳐 오는 동안 안으로는 수도연성을 통한 도가완성과 교회발전으로 도모하고,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는 한편, 밖으로는 사회봉사 활동, 여성인권 신장 운동, 남북 천도교여성 교류사업, 선열 선양사업, 수도원(修道院) 및 기념관 건립 사업 등 굵직한 대외 사업 등을 전개해 왔다. 또한 대외적으로 (사)한국여성단체연합,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여성위원회 등의 연합단체와 연계하는 등 종교 및 사회 평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천도교에서 여성운동은, 일찍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노비를 해방하여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은 실천을 몸소 실행한 것은 물론, 시천주, 즉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가르침에 따라 남녀 평등한 조건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수련에 임하게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제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 신사는 “베 짜는 며느리가 곧 한울님”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또한 “부인(여성)은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하고, 또 “구녀일남(九女一男: 남성 1명이 도통하는 동안 여성은 9명이 도통함)의 운수가 도래한다”고 하였으며, 또 “나(=최시형)는 부인(여성)도 스승으로 삼는다”고 하는 등 여성 존중의 교리를 설파하였다. 또한 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법은 나를 향하여 제사상을 차리는 혁명적인 제사법이고, 훗날 ‘청수 한 그릇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천도교 특유의 제사법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또한 과중한 제사문화에 시달리는 여성해방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성사는 그때까지 이름이 없이 ‘○씨 부인’ 등으로 불리던 여성들에게, 모두 이름을 짓도록 하였으며, 동덕여학교(오늘날 동덕여대) 등의 여학교를 운영 또는 지원하여 여성인재 양성과 계발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나갔다. 이러한 바탕 위에 창립한 천도교여성회는 그 후 천도교내성단, 천도교내수회, 천도교부인회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시련을 거치면서, 1968년 ‘천도교여성회’라는 이름을 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100주년 창립기념은 『천도교여성회100년사』 출판 기념식(봉고식)과 함께, “사진으로 보는 천도교여성회 100년사” “축하공연” 등으로 진행된다. 한편 이번에 발간되는 『천도교여성회100년사』 는 제1권 ‘본부 활동사’로서, 크라운판 496쪽에 달하며, 『천도교여성회100년사』 2권은 ‘지부(지역 교구의 천도교여성회) 활동사’로서, 내년에 출간할 예정이다. 『천도교여성회100년사』 는 100년간의 천도교여성회 역사를 제1부에서 ‘여명기 - 창립기 - 시련기 - 재건기 - 준비기 - 성장기 - 개화기 - 전환기’로 시대 구분하여 시간 순으로 살피고, 제2부에서 ‘기념사업’, ‘학술연구사업’, ‘문화사업’, ‘사회활동’ 등으로 공시적으로 살피면서 천도교여성회 역사와 주여 여성 지도자들을 조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여성으로서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에 초대회장 주옥경(1894~1982)을 비롯하여, 양이제(1892~1985), 차기숙(1899~1994), 최시영(1904~1992, 이상 환원), 조동원(1926~ 생존) 등 5명이 추대되었으며, 현재 천도교단의 유일한 종법사는 ‘조동원(전 가리산수도원장)’이다. 박징재 천도교여성회 회장은 “지난 100년의 천도교여성회의 역사는 곧 한국 여성운동 100년사이고, 다가오는 미래 100년을 살아가고 활동해 나갈 후학들에게 귀중한 지침이자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 책은 과거를 기록하지만, 앞으로의 천도교여성회 100년을 다시 시작하는 선언문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것은 훌륭한 대로, 부족하고 아쉬운 순간들은 또 그것대로 미래의 귀감이 되고 훗날의 자산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앞으로 ‘지부 편’ 발간을 위한 조사, 연구 활동과 아울러 통일의 그날을 대비하여 북한 지역 천도교 여성의 역사도 하루빨리 수집되고 통합되어 더 큰 ‘천도교여성회 역사’가 오롯이 완비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천도교여성회(천도교내수단)가 창립식(=發會式)을 가진 날은 1924년 4월 5일지만, 그날이 천도교의 창도기념일(天日紀念日)인 관계로 이후 기념식은 ‘창립 준비회의’를 열었던 3월 25일에 봉행하고 있다. (문의 : 02-6488-6839) -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2)(지난 호에 이어)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부화부순, 남편은 하늘이요, 아내는 땅이니까 첫째 부화부순을 잘해야 천지가 합일이 되겠죠. 천지 합일이 못 되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부화부순이 못 되면 그 집안은 잘 될 수가 없는 거야. 내가 하나 닦으려고 하는 건 쉬운 거지. 눈에 보이는 건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부모는 부모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다 남의 부모가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똑같은 마음을 가져야죠. 저는 잘 못하면서 남들 잘하라고 그러면 욕밖에 더 먹는 거 없어요. 그러니까 가정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은 밖에 나가도 행복해. 언제든지 웃는 모습으로, 항상 웃어야 해요. 화가 난 얼굴로 무섭게 보이면 한울님이 감응을 안 하시거든요. 한울님이 감응할 수 있도록 나부터 공부를 하자. 나부터 닦고, 내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나는 후학들에게 어려운 도를 닦으라고 하지 않아요. 춘하추동 사시절 농사꾼들은 제대로 도를 닦는 거예요. 봄이 오면 심고, 여름이 오면 가꾸고, 가을이 오면 거둬들이는 것. 하늘이 비를 주고 해를 주니 모든 것을 하늘과 땅이 먹여주고 입혀주는 걸 잘 모르는 거예요. 우리 도 닦는 사람은 앞으로 많은 지도자로 성장해서 후학들에게 바르게 가르쳐 줘야 합니다. 이 늙은이보다야 젊은이들이 더 잘하겠지마는 경전 하나 하나를 먼저 다 외워야 해요. 지극한 정성, 그리고 마음을 바로 하는 데 있어요. 마음을 똑바로 해야 해요. 지금은 서울을 차로 가지만 옛날엔 걸어서 다녔거든요. 서울 가는 길을, 대전으로 갈 수 있고 춘천으로 갈 수 있어요. 이게 바로 만 길이예요. 만 길이 흩어지는 것, 지금 치매 걸린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입버릇, 눈버릇, 귓버릇을 다 잘못 쓴 거예요. 지금부터 바른 현실의 공부를 택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여튼, 스승님의 말씀은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닦아야 덕을 알고 덕을 오로지 밝히는 것이 도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많이 들어도 소용없어요. 한두 가지 들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식사할 때도 내 마음에 꼭 맞게 식사를 해야지 지나치게 먹으면 배탈이 나고 위장병이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말도, 그대로 실천을 하게끔 해야지 말만 많이 해준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실천을 해서 앞으로의 대덕의 큰 일꾼들이 돼 주시기를 간절히 저는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게 소원입니다. (환원하신 남편분과 함께 수도원을 세우시고 신앙생활도 하신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우리 우리 부부는요 나이가 차이가 많이 집니다. 결혼할 때 우리 신랑님은 36세, 저는 19세였어요. 그때는 왜정시대예요. 왜정시대에는 처녀 공출을 했습니다. 구성군 이원면 진도에서 제가 공출에 들어갔어요. 빨리 결혼을 하면은 공출에 면제가 된다고 해서 결혼을 했어요. 남편은 천도교를 했거든요. 천도교인이에요. 저는 예수 믿었지요. 예수를 믿으면서 천도교 믿는 집에 갈 수가 없지, 안 가지. 그런데 그 급한 상황이니까 그때 처녀 공출을 가면 처녀 껍데기를 까서 그걸로 탑을..(세운다고) 그렇게 하면 전쟁에 이긴다고요. 그러니까 결혼 상대가 늙었거나, 젊었거나, 바보거나 가릴 새가 없었던 거예요. 결혼을 해가지고 제가 왜놈 때문에 내가 영감한테 시집갔다고 그렇게 일본사람들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천도교 믿는 사람한테 시집을 와가지고 천도교를 배우고 몰랐던 글을 배우고 그랬어요. 남편이 경전을 배워주면서, 몰라도 몸으로 실천을 하면 다 알게 된다고, 그렇게 가르쳐줘서 그때부터 주문을 많이 외웠어요. 남편 말이 한울님이 몸에 베어서 전부 가르쳐 준다고요. 그 말을 듣고 경전을 배우고 한문도 배우고, 책을 한 권 한 권 다 배웠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주신 분이 남편이에요. 거기서부터 천도교에 재미를 붙여가지고 나중에는 일본사람 욕을 안 하게 되었어요. 너희 때문에 내가 천도교를 찾았다. 이렇게 마음을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느새 세월이 가서 이제는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하고 싶은 데도 못 가서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떠나기 전에 앞으로 진실한 천도교인이 좀 돼 주기를, 부탁을 좀 하고 싶습니다. 수련을 하다 보면, 하품이 자꾸 나잖아요. 하품이 나는 이유를 알아야 해요. 몸 속에 찌꺼기가 빠져나오는 겁니다. 눈 감고 속으로 주문을 외우면 자꾸 눈물이 줄줄 나옵니다. 눈에 청소를 하는 겁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자세를 똑바로 하고 한울님께 어머니, 아버지 저를 잘 자게 해주셔서 잘 잤습니다. 심고 드리고 오늘 하루 모든 일을 잘 되게 해달라고 심고 드리고 거기 앉은 자리에서 경전 두 페이지를 읽어요. 그리고, 오늘 하루에 그대로 실천에 옮기게 해주옵소서, 하죠. 지금 제가 나이 100살이 다 되었는데 이제 뭘 옮기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닌데, 지금도 하고 있어요. 내가 잊어버리지 않아야 후학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해주지 않겠는가 싶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배운 글이 없어요. 일자무식이라도 몸부터 닦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잘들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 남편은 천도교를 열심히 하신 분인데, 중국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지요. 저와 결혼하기 전에 상처를 했고, 나는 공출에 들어가게 생겼으니까 급하게 결혼을 했지요. 남편은 천도교 잘해서 장가 잘 들었다고 하고, 나는 그런 분을 만난 거예요. 우리는 한울님 덕을 본 거죠. 당신도 한울님 덕을 봤지만 나도 한울님 덕 봤다고요. 저 시집을 가서 보니까, 시댁이 큰 부잣집이야. 남편의 형제가 오형제인데, 산에 가서 우물을 파고 조그마한 동이를 이고 가서 청수물을 떠 가지고 와서 밖에다 선반을 매놓고 거기다 올려놓고 9시가 되면 저에게 “동서, 가서 청수 물 떠 와라.” 그렇게 말해요. 청수 모셔오라고요. 큰 독이 몇 개 있었고 그 독을 쭉 돌려놓으면 그 독에다 물을 다 길어다 놓아야 해요. 아니 물이 저렇게 많은데 왜 산에 가서 청수물을 새로 떠다가 놓지? 그때까지는 모르니까 물이 뭐가 다른가 싶어서 청수 그릇을 가지고 뚜껑을 떠서 내가 먼저 먹어봤는데 ‘그 물이 그 물이지. 똑같은 물인데 이 사람들이 미쳤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청수물을 잘 떠서 갖다 모셔다 드리고 했어요. 그렇게 한 이십 일. 시집가서 이제 막 한 달쯤 지나갔는데, 내가 예수에 미쳤던 사람인데 천도교에 미치려면은 어떻게 미쳐야 됩니까?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독공수련을 좀 해야 된다고 해. 그래서 독공수련에 들어갔어요. 시집은 큰 부잣집이니까 큰 창고가 있어요. 창고에 판대기 문을 해서 닫고 거기에서 시집 갈 때 해 간 병풍을 치고 돗자리를 깔아놓고 촛불을 켜놓고 거기서 수련 20일만 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저녁을 해먹고 설거지를 다 하고서는 창고에 가서 문을 꼭 닫고 촛불 켜놓고 청수물 떠 가지고 그리 들어가는 건데 한번 찾아보자. 열 사흘 만에 관을 쓴 할아버지가 탁 나타나는 거예요. 무서워서 눈을 딱 떴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없어져요. 왜 할아버지가 보일까 그러고서는 또 눈을 감고서 염주알을 105회 또 돌렸는데 할아버지가 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염주를 내려놓고 촛불을 끄고서는 방에 들어가 가지고 남편한테 그 얘기를 하니까, “대신사님을 본 것 같소.” 하시는 거예요. 집에 대선생님 사진이 있었거든요. 남편이 사진을 펴 놓으면서, 이 분이냐고 물어봐요. “맞아요, 이 영감이에요.” 남편이 무서워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그때 집에서는 명주를 두드려서 바지 저고리 바느질을 하고 그랬는데, 남편이 궂은일, 힘든 일을 더 많이 하라고. 그래야 깨닫는다고 해요. 그런데 동서들이 제가 궂은일을 하려고 하면 쫓아내는 거예요. 들어가서 바느질이나 하라고요. 하지만 남편한테 들은 말 때문에 나는 편안히 앉아서 바느질이나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날은 춥고 눈이 쌓여서 푹푹 빠지는데 저고리에 솜을 넣고 머리에 쓰는 수건에도 솜을 넣고 일을 합니다. 그렇게 추웠어요. 우리가 살던 평안북도가 소변을 누면 얼 정도로 그렇게 추웠어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편안히 있어서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일과는 저녁 9시 기도식을 하고 나서 오 형제가 돌려 앉아서는 삼을 삼아요. 그러다가 12시가 되면 방방으로 들어가서 다 자거든요. 그때 내가 새벽에 물을 길어 왔어요. 독에다가 물지게를 지고 갔다 와서 붓고 거기서부터 내가 결심을 하고서는 독들을 다 열어놓고 물지게 지고 일곱 지게 여덟 지게 졌어요. 뚜껑을 갖다 씌어놓고 방에 들어가면 남편이 추운 데 나가서 고생했다고, 이불 덮어주고 그랬어요. 내가 잘해야 복을 받는다. 이게 복이로구나 그러니까 남편한테도 사랑을 받는 구나 싶었어요. 맏동서님이 또 내가 물을 길어 온 것을 알고는 아이고, 그러면 되느냐고, 나를 끌고 방으로 들여 보내고는 밖에서 잠궈요. 자라고요, 맏동서가 밥 다 하고는 다 차려놓고 밥 먹자고 하는데, 아 그때 그걸 깨달은 거예요. 내가 잘하면 복을 받는구나, 내가 잘하니까 맏동서가 이렇게 사랑해주는구나 하면서 그때부터 실제로 현실이 도로구나 하는 걸 내가 알은 거야. 현실이 도지 현실이 아닌 무형을 따라가면 안 돼요. 밤에 달밤에 나가보세요. 달밤에 나가면 내 그림자가 있잖아요. 실제인 사람한테 가 물어야 답이 있지. 내 그림자 앞에 가서 물으면 답이 없어요. 내가 혼자 수련을 하는 것이 그래요. 무형으로 보는 것은 그림자와 같아요. 소용없는 것, 허공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니 후학들은 앞으로 그런 데 빠지지 말고 실제로 하시고, 실제로 남의 부모도 내 부모 남의 형제도 내 형제 남의 아들 내 아들 마음으로 진짜 그렇게 먹고, 그러면 머지않아서 천사문답으로, 모두 한울님의 뜻으로 돌아옵니다. <다음에서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http://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
은성당 조동원 종법사님을 만나다(1)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홍천에 있는 가리산수도원으로 조동원 종법사를 만나러 갔다. 조동원 종법사는 1926년 평북 구성에서 타어나 19세에 우암 김동화 선생(1987년 환원)과 혼인하면서 천도교인이 되었다. 선생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극한 정성과 수련으로 천도교의 참진리를 깨닫게 되며 자기완성과 함께 많은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으로서 교단 발전에 기여해왔다. 가리산수도원은 1982년 8월에 작고하신 남편 김동화 선생과 함께 창설하여 현재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천도교인이라면 한번쯤 깊은 수련의 참된 경험을 안겨준 성지로서의 기능을 해 왔다. 글쓴이가 선생의 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간 날,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더 깊은 질문을 향하게 되었다. 이날 조동원 종법사님의 말씀을 옮겨 적으며 선생이 살아오신 삶을 상상해보며 긴 호흡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제가 이제는 떠나기 전에 우리 후학들에게 간곡히 한 말씀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수도원 원장으로서, 하루에 40명, 50명, 60명까지 지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바르게 수도를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어요. 내가 밝아지는 것부터 원하니 그게 틀렸거든요. 내 마음부터 고쳐야 합니다. 이 마음속에 한울님이 계시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을 잘 닦아서 성령과 쌍령이 돼야 해요. 스승님께서 경전으로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탄도유심급을 보면 아주 구체적으로 정답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천지부모님 편, 내수도문 편, 거기 전부 정답이 있어요. 그러니까 딴 거보다도 그 세 편은 반드시 외워야 합니다. 입으로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 정답이 나와 있어요. 그 정답을 그대로,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하거든요. 그걸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수도생은 그 정답에 따라야 하는데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무슨 수도를 얼마나 했다, 경전을 얼마를 봤다는 것을 내세우려고만 했지, 자기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거요. 지금 우리 천도교가 쇠운이거든요. 우리 스승님께서 참 참혹스럽게 그 고생을 하시고 돌아가셨지요. 편안히 잘 가실 수 있는 능력이 다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돌아가셨느냐, 앞으로의 천도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가신 거거든요. 앞으로 천도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후학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큰데, 경전에 정답이 다 나와 있다고 했잖아요. 남의 부모도 내 부모요, 남의 형제도 내 형제요, 남의 자식도 내 자식이요. 이런 마음으로 내 자식, 내 형제, 내 부모를 같은 머리, 같은 생각으로 대해야 남의 부모도 내 부모한테 하듯이 하거든요. 그래서 그 실천의 길을 간곡히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57세에 수도원 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100살이 다 되어 가는데 책 한 권을 못 냈습니다. 제가 일자무식이에요. 저 국민학교도 못 다닌 사람입니다. 책을 한 권 못 내고 말로써, 그러나 많은 말이 필요 없고 간단히 스승님의 말씀을 배워가지고 스승님과 같이 실천에 옮겨 달라.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천도세상 된다.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춘하추동 사시절이 현실이 그게 도입니다. 봄에는 씨앗 뿌리고, 심어야죠.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거고, 게으른 사람들은 못 해요. 우리가 도를 닦는다고 하면, 현실이 도지 그냥 눈으로 허깨비를 보는 거, 들리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 (지도하는 입장에서)이를 절실히 끊어주지 못한 것은 참 후회가 됩니다. 발령받은 사람은 많은데 발령받으면 도를 깨달아서 사람이 변화가 돼야 하거든요. 선생들이 잘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제가 전국에 안 다니는 데가 없이 참 부지런히 다니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는 이런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제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다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셨다고 어머니, 아버지를 안 찾는 게 아닙니다. 땅은 어머니요, 하늘은 아버지요. 천지 부모님이 내 부모입니다. 그래서 심고 드릴 때, “어머니, 아버지 잘 좀 가르쳐 주세요.” 그렇게 부탁을 해요. 저는 ‘한울님’, ‘천지부모님’이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그럽니다. 경전에 천지 부모 편을 보세요. 천지 부모님의 부모랑 내 부모가 같다고 정답이 나와 있어요. 정답대로 내가 실천을 해서 하면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이 전부 가르쳐줘요. 천사 문답이라고 하죠. “어머니 아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은 정답이 나와요. 또 이것만 기다리고 하지 말고 사람이 한번 바뀌어야 하겠다. 그래서 옛날부터 입버릇, 손버릇, 몸버릇 이 세 가지만 고치면 군자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이목구비, 사지백태, 오장 육부가 다 내 거예요. 한울님이 주신 그것만 바르게 쓰면 되는데. 내가 금덩이가 몇 개가 있다 하더라도 내게 있을 땐 내 거라고 하지만 누가 훔쳐 가면 그 사람 것이 되지, 그때부터는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물건을 누가 훔쳐갔을 때, 욕을 하고 미워하고 그러면 안 돼요. ‘갖다가 잘 써라’, ‘잘 쓰게 해주십사, 그 사람 죄를 주지 마소서.’ 이렇게 심고를 드려야 합니다. 훔쳐가는 걸 봤어도 못 본 척, 누구한테 들어도 못 들은 척, 내가 다 알아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해요. 그 한 가지를 내가 지키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게 해야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정답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가정이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자식은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해요.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면 그 복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결혼하면 시부모님 잘 모시고요. 일용 행사가 도지 딴 게 도가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까 일용 행사를 절실히 잘해 주십사 하는 것이 내가 떠나기 전에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고, 그게 제 소원이에요. 남이야 잘하거나, 못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말고 언제든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님이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바로 보고 직관을 잘해야 해요.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 죄도 없는데 남의 말 듣고 나쁘게 말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직관으로 봐야 해요. 가정에서도 부모는 부모의 도리,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잘 하려고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해요. 그게 도지 딴 게 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24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죠. <다음에서 계속> 인터뷰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JPTR63nSXFo&t=1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