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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감영과 관덕당동학이라는 가르침이 맹위를 떨치며 퍼져간다는 소문이 조선의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을 임명하고 무예별감 두 사람과 군관 한 사람, 그리고 하인 한 사람을 딸려 동학의 진원지인 경주로 급파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의하면, 선전관에 정운구(鄭雲龜)를 선임하고, 수행원에는 무예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豊)과 장한익(張漢翼), 좌변포도군관(左邊捕盜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이 임명되었다. 이 밖에 정운구의 종자인 고영준(高英晙)까지 합하여, 일행은 모두 다섯 명이 된다. 宣傳官鄭雲龜書啓 臣於十一月十二日 敬奉傳敎 率武藝別監梁有豊張漢翼 左邊捕盜廳軍官李 殷植等 以慶尙道慶州等地 東學魁首詳探捉上次 忙出城外 藏蹤秘跡 星夜馳往 선전관 정운구가 서계를 올리니다. 신은 11월 12일에 전교를 받들어 무예별감 양유풍 장한익 좌 변포도청군관 이은식 등을 인솔하여 경상도 경주 등지에서 동학 괴수를 자세히 탐지하여 체포 하고자 성문을 나서 남모르게 밤길을 도와 달려왔습니다. - 『고종실록(高宗實錄)』 원년 12월 24일 임진(元年 十二月 二十日 壬辰) 그날로 서울에서 출발하여, 남대문을 나선 일행은 어명을 개봉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임을 확인한 다음 며칠을 머문 뒤, 11월 22일 길을 떠나 밤낮으로 목적지인 경주로 향하였다. 문경 새재를 넘어서면서 이들은 동학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탐문하기 시작하였다. 새재를 넘어 영남지방에 이르자 각 주(州) 군(郡)마다 밤이면 동학의 주문이 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이 심각하게 많이 퍼졌음을 이들은 실감하게 된다. 이들은 경주부에 들어가 명을 받고 왔음을 신고하고 경주부의 지원을 받아 경주와 용담 일원의 시장이나 절간 등을 중심으로 탐문을 하였다. 탐문이 끝난 12월 9일 양유풍과 종자 고영준을 직접 용담에 보내 상황을 조사토록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용담으로 들어가는 동구 근처에 있는 장(張) 모라는 사람을 통해 용담정으로 들어가 대신사를 만나 입도하러 왔다고 거짓을 말하고는 접근을 하며, 내방하는 사람들의 동정과 대신사의 언동, 용담의 지형 등을 자세히 살핀 다음, 피곤하다는 핑계를 꾸며대고는 다시 용담을 빠져나온다. 12월 10일 새벽 급습하여 용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여 경주부 감옥에 넣는다. 다음 날에 신상 파기를 한 이후 대신사를 비롯한 몇 사람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올라가는데, 문경 새재에 동학도들이 집결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길을 돌려 상주 화령을 거쳐 보은으로 압송 길을 다시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과천에 이르러 죄인을 서울로 압송할 것을 조정에 품의하니, 당시 철종(哲宗)이 승하를 하였기에, 국상(國喪)이 났으니 죄인을 본부 감영으로 다시 돌려보내라는 명을 받고는 본부 감영이 있는 대구(大邱)로 발길을 돌린다. 이리하여 추운 겨울 서울로 압송되던 대신사 는 다시 길을 돌려 대구를 향하여 압송되었다. 대신사 일행은 다시 길을 돌려 충주를 지나 새재를 넘어 초곡(草谷)을 지나 유곡리(幽谷里)에서 과세를 하고 대구에 이르러 감영에 수감되었다. 당시 대구 감영에서의 대신사 계신 상황과 문초 과정 등이 『도원기서』에 실려 있다 대구 감사가 주관하여 대신사를 문초하고, 사형이라는 엄형을 내리고자, 당시 막 등극한 어린 임금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던 조대비(趙大妃)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대신사를 사형 집행하였다. 달성공원에서 멀지 않은 반월당사거리 현대백화점과 그 맞은편 일대가 대신사께서 참형을 당하신 관덕당(觀德堂)이 있던 곳이다. 현대백화점 앞에 대구시교구가 중심이 되어 세운 대신사 순도비가 자리하고 있고, 길 건너편에는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서 있다. 이 지역은 당시 아미산이라고 불렀는데, 잡범들은 이곳 아미산에서 처형을 했다. 천주교 신도들은 잡범으로 분류되어 아미산에서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에 천주교 순교 기념관이 이곳에 들어선 것이다. 현대백화점 뒤에서 종로초등학교에 이르는 넓은 부지가 대구 감영이 있던 곳이고, 대신사께서는 참형 직전까지 그곳에 구금되어 계셨다. 종로초등학교 마당에 ‘최제우 나무’라고 명명된 큰 회화나무가 서 있는데, 수령이 400여 년에 이른다. 대신사께서 감옥에 있으면서 내다본 나무라고 하여 이 나무를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달성공원에는 1964년 3월 31일 대신사 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신사순도백주년기념동상건립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건립한 대신사 동상이 있다. 함께 돌아보면 어떨까 한다. 대신사께서 대구 감영에 갇혀 있을 때 해월 신사께서 옥리의 하인으로 분장하고 들어와 진지상을 올렸다. 이때 해월 신사에게 시를 한 편 내리고 또 멀리 달아나라는 ‘고비원주(高飛遠 走)’의 글을 내렸다고 한다.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등불이 밝아 물 위로는 아무러한 혐의의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 『동경대전』 윤석산 교수의 풀이에 의하면 등불의 빛이 물 위로 퍼져, 환하게 모든 것을 비추어 주듯이 자신은 아무런 혐의가, 또 아무런 잘못된 틈이 없다는, 자신의 무혐의와 결백을 노래한 시이다. 그런가 하면, 한울님의 도란 바로 물 위에 비추어 조금의 틈도 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저 등불과 같이 세상의 모든 곳을 밝혀주는, 바로 그러한 참된 진리라는 의미가 이중(二重)으로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세상의 잘못된 제도에 의하여 죽게 되어도, 그래서 자신이 펼친 무극대도가 지금은 죽은 나무와 같이 보이나, 그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후일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의 도가 이내 올바르게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시이다. 대신사의 거룩한 피는 대구 관덕당에 뿌려졌지만, 무극대도는 이어져 해월 신사의 지도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갑오년 동학혁명의 뜨거운 불길로 번졌다. 의암 성사에 의해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도 300만 교인들이 힘을 합쳐 3·1혁명 만세 소리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대신사 순도의 피는 지금도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어 흐르고 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흥해 손봉조의 집남원 은적암에서 돌아온 이후 대신사는 각 처로 다니며 가르침을 폈다. 이러한 결과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도 나날이 늘어나고, 또 그 지역도 넓어져 다만 경상도 일원만이 아니라 충청도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인원을 보다 조직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하나로 떠오른 것이 ‘접(接)’을 조직하는 것이다. 본래 접이라는 이름은 유생들이 쓰던 용어이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만든 접은 이와는 다르다. 흥해 매곡동(현재는 매산리) 손봉조의 집에서 행한 접주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포항시 흥해 손봉조의 집은 매우 중요하다. 동학 교도가 늘어나자 대신사는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지도하기 위하여 접(接)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각 처의 지도자들을 이곳으로 오게 하여 접주를 정해 주었다. 이때가 임술년(1862년) 12월 말이다. 본래 ‘접(接)’이라는 용어는 우리 전통 사회에서 쓰던 말이다. ‘접’은 예전에 글방 학생이나 과거를 보는 유생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었다. 또 보부상(褓負商)의 동아리를 이르던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사께서 구성한 ‘접’은 이러한 개념과는 다르다. 접은 철저한 속인제(屬人制)에 의한 구성이다. 내가 한 사람을 포덕하면, 그 사람은 나의 접이 된다. 일컫는바 점조직과도 매우 유사하다. 한 사람이 잡혀도 그 사람을 포덕한 사람만 알 뿐, 그다음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된 이내겸(李乃謙)은 본래 영천(永川)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듯 경주 본부의 접주로 임명이 된 것은 동학이 본래 속지제(屬地制)를 따르지 않고 속인제(屬人制)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도자(傳道者)와 도를 받는 사람 사이에 인적 유대를 중요시 여긴 까닭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의 전수(傳受)는 ‘정신의 전수’라는 면이 강조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접 제도는 오늘까지 천도교에서 연원제(淵源制)로 전승되고 있다. 대신사는 이러한 접 조직을 통하여 갑자기 늘어난 동학 도인들을 조직하고 관리하였다. 그래서 손봉조라는 제자의 집에서 각처의 지도자들을 오게 하여 각 접의 접주(接主)를 정해 주었던 것이다. 각 접주가 마치 지역별로 정해진 듯하지만,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이사를 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죽을 때까지 몇 대를 이어가며 살았다. 그래서 비록 속인제이지만, 속지제와 같이 지역을 중심으로 접주를 정해 준 것이다. 접주를 정해 준 뒤에 새해인 계해년(1863년) 1월 1일 아침 대신사는 이에 대한 시를 쓴다. 訣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 成功幾時又作時 莫爲恨晩其爲然 時有其時恨奈何 新朝唱韻待好風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 春來消息應有知 地上神仙聞爲近 此日此時靈友會 大道其中不知心 도를 묻는 오늘, 아는 바가 무엇인가. 뜻은 새해 계해년에 있도다. 공을 이룬 것이 언제인데, 또 때를 만나겠는가. 늦는다고 한하지 마라. 그렇게 되는 것을. 때는 그 때가 있나니, 한탄한들 무엇 하리. 새해 새 아침에 운을 불러 좋은 때를 기다린다. 지난 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봄이 오고 있음을 마음으로부터 응하여 알 수 있으니, 지상신선의 소식 가까워지네. 이날 이때 신령한 벗들의 모임이여, 헤아릴 수 없는 마음, 그 가운데 자리한 대도(大道)여. - 『동경대전』 “지난해 서쪽, 북쪽에서 좋은 벗들이 찾아옴이여, 훗날 알리라. 우리의 이 집에서의 그날 그 기약을 [去歲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이라는 이 구절이 바로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접주를 정한 사실이다. 지난해는 접주제를 행한 임술년(1862년)이다. 그해 말에 서쪽 북쪽에서 온 영우(靈友)들이란 다름 아닌 접주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접주제는 훗날 동학혁명을 보다 조직적으로 이끈 중요한 바탕이 된다. 손봉조가 살았다는 흥해 매산리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훗날 지은 집이 서 있다. 손봉조의 집 앞으로는 제법 큰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건너편에는 마을 사람들이 쉬고 노는 정자와 당수나무인 팽나무가 서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인 이곳에는 그간 표지판 하나 없었다. 다행히도 필자가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동학역사문화선양회와 (사)동대해문화연구소가 2022년 11월 18일, 팽나무 부근에 ‘최초 동학 조직 안내 표지판’을 설치했다. 또한 포항시에서도 동학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발굴하고 이곳을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닌 시설로 홍보하는 것과 동시에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장소로 개발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 다음 회 예고 : 대구 감영과 관덕당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남원 은적암대신사께서 신유년(辛酉年, 1862년) 6월 용담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향해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신사로부터 배움을 받기 위해 용담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문을 열고 맞이하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開門納客 其數其然].’ 또 일 년이 지난 후에 먼 곳 혹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이러한 풍경을 대신사의 수양딸이 회상하는 기록이 있다. 대신사의 수양딸은 1920년대 후반까지 살았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팔순이 되었다. 이 수양딸을 천도교의 이론가인 김기전(金起田)이 인터뷰한 기록이 있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신유년 포덕 당시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신사께 예물로 곶감을 많이 가지고 왔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용담정 부근에 버려진 곶감꽂이만을 짊어지고 가도 인근 마을 사람들의 땔나무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너무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손님들 조석(朝夕) 준비에 수양딸과 부인 박씨 부인은 나날이 바쁘고 힘이 들었으며, 특히 날이 저물어 저 많은 사람이 어디에서 다 잠을 자나 하고, 아직 어렸던 수양딸은 혼자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담으로 들어가는 작은 산길은 마치 장터마냥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小春, 「大神師 收養女인 八十老人과의 問答」, 『新人間』 통권 16호, 1927. 9.) 이렇듯 많은 사람이 용담으로 모여들고 동학을 공부하니 유생(儒生)들과 관이 관심을 두게 되고, 마침내는 탄압을 하게 된다. 이에 대신사는 용담을 떠나 전북 남원으로 가게 된다. 용담을 떠난 대신사는 먼저 울산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러 도인을 만나고, 며칠을 머문 후 부산으로 간다. 부산에는 누이동생이 살았다고 한다. 표영삼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 대신동에 누이동생이 대신사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산당(山堂)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부 산에서 배를 타고 오늘의 진해시(鎭海市)에 속한 웅천(熊川)이라는 마을에 가서 유숙하게 된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길을 떠나 승주(升州)를 지나며 충무공(忠武公)의 사당에 배알하고, 충무공이 남겨 놓은 보국(輔國)의 정신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기도 한다. 이어서 전라도 무주(茂州)에서 잠시 머문 뒤에 다시 길을 떠나 남원(南原) 땅에 이르게 된다. 대신사는 이렇듯 며칠을 걷고 걸어 남원에 이르게 되고, 남원 광한루(廣寒樓) 근처에 살고 있는 서형칠(徐亨七)의 집을 찾아가게 된다. 다른 기록에는 서공서(徐公瑞)라는 사람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가 12월 중순 무렵으로 추정된다. 길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뒤이다. 서형칠은 한약방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신사의 제자 중 최자원(崔子元) 등 약종상을 하는 사람이 있어, 이들 제자들의 알선으로 남원의 한약상인 서형칠의 집을 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형칠의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형칠의 생질(甥姪)되는 공창윤(孔昌允)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열흘 가까이 머물게 된다. 이곳에 머물며 대신사는 서형칠, 공창윤,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國三),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을 포덕하기에 이른다. 남원에 도착한 지 10여 일이 지난 12월 그믐쯤 대신사는 이들의 안내를 받아 남원 교외의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을 찾아가게 되고, 이곳에서 산속으로 조금 떨어진 덕밀암(德密庵)이라는 작은 암자로 가게 된다. 이곳에 머물면서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스스로 이곳에서 ‘자취를 감춘다’라는 뜻의 은적암(隱跡菴)으로 그 암자의 방 하나를 이름하고, 1862년 3월까지 머물고 나서 경주로 돌아온다. 은적암이 있는 덕밀암은 전북 남원 동편, 교룡산성(蛟龍山城) 속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에 딸려 있던 작은 암자이다. 이 산성은 원래 백제 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시대에 쌓은 것이다. 이곳은 국방상 매우 중요한 요새지로서 남으로부 터 침략하는 왜구를 견제하기 위하여 산성을 구축했다. 당시는 남원부(南原府)의 관리를 받아왔고, 남원부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일대와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을 수비하던 전략 요새의 외성(外城)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성 입구에는 이 산성을 지키고 수비하던 비장(碑將)들의 비석이 줄줄이 서 있어, 험난했던 지난 역사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은적암을 품에 안듯이 둘려 있는 교룡산성 뒤쪽으로 솟아 있는 산을 황룡산(黃龍山)이라고 부른다. 산등선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산의 정상으로는 제법 기암괴석이 작은 병풍마냥 펼쳐져 있다. 이 산의 골짜기마다 어느 시대에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흔아홉 개의 우물이 돌무덤으로 만들어져 있다. 산성의 이름이 교룡(蛟龍)이듯이, 백 개의 우물을 만들면 용이 승천을 한다는 전설에 따라 아흔아홉 개의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교룡이라는 산성의 이름처럼 아직 은 용이 되지 못한, 그러므로 이무기의 슬픔과 잠재적 가능성이 꿈틀거리듯 자리하고 있는 산성. 이 산성의 이름은 이곳 지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곳에 은거한 대신사는 달이 뜨는 밤이면 능선에 올라 「처사가(處士歌)」를 부르기도 하고,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하는, 상원갑(上元甲)의 새로운 전기를 이룰 때가 왔음을 암시적으로 노래한 「검결」을 부르며, 목검을 잡고 검무를 추기도 하였 다. 대신사께서 제세(濟世)를 위한 열망과 심신을 아울러 단련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 은적암에 머물면서 대신사는 앞의 『도원기서』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동학의 중요한 경편인 「논학문」과 「도수사」, 「권학가」를 짓는다. 은적암은 대신사께서 새로운 계획을 세운 곳이자 동학의 중요한 경전이 저술된 곳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 자리에는 다만 천도교서울교구 동덕들이 세운 표지판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 1989년 대신사 탄신 165돌을 기념하여 서울교구에서 7일간 특별수련회를 개최하고 마지막 날인 10월 29일(시일) 은적암으로 서울교구 교인 226명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은적암 터’ 성지 표지판을 세웠다. 저자도 표지판을 세울 때 청년회 부회장으로 참여하여 표지판과 시멘트, 모래, 자갈, 물통 등을 등에 지고 산 중턱에 올라 표지판을 세우고 나서 대신사의 당시 상황을 그리며 남원 시내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듯 작은 표지판이라도 세운 까닭에 은적암을 세상에 알리고 이곳을 성역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듯이 동학의 유적지 발굴을 비롯한 표지석 또는 표지판을 세우는 사업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다음호 예고 : 흥해 손봉조의 집 '수운 대신사, 최초로 접주제를 시행하다'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지동(芝洞) 장조카 최세조의 집최세조(崔世祖)는 대신사의 장조카이다. 항렬은 조카이지만 대신사보다 나이가 12살이나 많다. 아버지 근암공에게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인 제환(崔濟渙)을 양자로 들였다. 물론 대신사께서 아직 태어나기 전이다. 이 양아들인 제환의 맏아들이 최세조이다. 근암공의 동학 천도교 기록에는 흔히 맹륜(孟倫)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는 이름이 아니라 최세조의 자(字)이다. 지금 경주시에서 복원한 대신사 생가는 불이 나기 전까지 조카네 가족과 대신사가 함께 살았다. 옛날에는 대가족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던 집이 불이 나자, 그곳에서 좀 떨어진 지동(芝洞)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전에 용담교구가 있던 그 지역이다. 그러나 새로 이사를 한 집은 좁아서 대가족이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사는 가족을 이끌고 용담에 있는 아버지 근암공이 고쳐놓은 와룡암 자리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지동의 집에는 조카인 맹륜, 곧 최세조의 가족만 살게 된 것이다. 음력 4월 5일은 장조카인 최세조의 생일이다. 예전에는 생일날 아침에 어른들을 모셨다. 조카인 최세조가 작은 아버지인 대신사를 자신의 생일에 오시게 하려고 옷을 보냈다. 옷을 보내는 것도 옛 관습의 하나이다. 대신사는 조카의 청을 받고 생일상을 잡수러 갔다. 아침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몸이 떨리고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신사를 모시고 용담의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즉 대신사의 종교체험은 이렇듯 장조카 최세조의 집에서, 최세조의 생일날 생일 밥상 앞에서 시작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이 『도원기서』에 나온다. ‘지동(芝洞)’이라는 지명은 그곳에 오래 산 사람들만 아는 이름이다. 대부분 오늘의 사람들은 모르는 지명이다. 지금 그곳에는 ‘경주디자인고등학교’가 들어와 있고, ‘천도교용담교구’가 있다. 그리고 그 인근으로는 천도교 동덕들이 세운 ‘방정환 한울유치원’이 있다. 최세조가 살던 집터는 지금은 밭이고, 그 밭 바로 옆에는 현곡보건소가 있다. 160여 년 전 이 자리에서 대신사께서 조카의 생일상을 받아 드시다가, 문득 마음이 선뜻해지고 몸이 떨리며[心寒身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며, 그 증상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사람들이 모시고 용담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대신사께서 처음 종교체험의 순간을 맞이한 장소이지만, 지금은 아무러한 표지판 하나도 없다. 다만 시간 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르는 상태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드넓은 논이 펼쳐진 이곳에도 대신사의 행적이 남아 있다. 경주 시내에서 가정리로 오는 메인 도로명이 ‘용담로’이다. 가정리 일대 대신사의 행적에 스토리를 만들어 가칭 ‘수운길(수운동학길)’을 만들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화 예고 : 남원 은적암 '관의 지목을 피해 숨어서 동학 경전을 저술하다'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내원암과 적멸굴을묘천서 이후, 대신사는 기도를 통하여 도를 구하는 방법을 행한다. 지금까지 세상을 떠돌며 세상에 나와 있는 가르침을 배우므로 도를 얻고자 하던 방식을 버리고, 하늘에 기도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인으로부터 받은 「천서(天書)」에 ‘(하늘에) 기도를 하라는 가르침[祈禱之敎]’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대신사는 1856년 병진년 여름에 양산(梁山) 통도사의 말사인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과 자연 동굴인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을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한다. 왜 49일을 작정하고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짐작건대 49는 7의 7배수이다. 동양에서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하늘의 중심 별자리로 보았다. 『논어』 「위정(爲政)」 편 첫머리에 나오는 ‘북신(北辰)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도 뭇별들이 그를 향한다.[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에서 북신(北辰)은 바로 북두칠성이다. 이렇듯 천체의 중심 별자리인 칠성(七星)은 우리 삶의 중심을 이루고 나아가 모든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동양적 오랜 관념으로 인하여 7의 7배수인 49를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대신사는 동양, 우리나라의 오랜 사유와 철학의 바탕 위에서 가르침을 받도록 한 것이라고 하겠다. 내원암(內院庵)과 적멸굴(寂滅窟)은 경상남도 양산 천성산(天聖山)에 있는 암자와 자연 동굴이다. 천성산은 그 이름과 같이 천 사람의 성인이 날 수 있는 산이라고 해서 골짜기마다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도 유명하다. 내원암은 이 많은 암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은 암자가 아니라, 내원사라는 독립된 사찰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적멸굴은 자연 동굴로, 굴의 내부에서 물이 나고, 사람이 머물며 수행할 수 있는 동굴이기도 하다. 신라 때 고승인 원효(元曉)도 이 동굴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이곳 암자와 적멸굴에서 대신사께서 49일을 작정하고 치성을 드린다. 이후 논을 잡혀 안으로는 철점(鐵店)을 차리고, 바깥채에는 수도장을 지어 수련을 계속했다. 이렇듯 대신사께서 수행을 행하던 중심 자리가 바로 내원암과 적멸굴, 그리고 그 일대이다. 뒷날 1909년 말 의암 성사가 제자들과 내원암에 들러, 이곳에서 49일 기도를 하였다. 이때 내원암의 본사(本寺)인 통도사의 주지 스님이 의암 성사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동자 스님일 때 자신의 스승께서 천성산 적멸굴을 가리키며, 이 굴에서 최복술이 수련을 하였는데, 수리가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복술’은 바로 대신사의 아명이다. 이곳에서 의암 성사께서는 시 한 수를 남긴다. 昔時此地見(옛날에 이곳을 와보았는데) 今日又看看(오늘 또다시 와서 보는구나) 옛날에 이곳에 와보았다는 것은 수운 대신사께서 와서 보았다는 것이고, 오늘 또다시 와서 본다는 것은 의암 성사 자신을 말한다. 두 사람은 한울님 신령(神靈)과 한울님 기운을 지닌 사람으로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때 대동한 제자들과 함께 바위에 이름을 새겨 남겨 놓았다. 의암 성사인 손병희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조기간, 박명선, 임명수, 왼쪽에는 윤구영, 최준모, 김상규 등이 새겨져 있다. 적멸굴로 가는 산행길은 약 1시간 전후가 소요되며, 계속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중간에 밧줄, 산행 코스에 대한 안내판이나 산행 길의 정비가 필요한 코스다. 산행 스틱을 준비해 가면 좋다. 길이 좁고 계곡 절벽으로 미끄러지면 큰일을 당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서 올라야 한다. 나무가 많고 낙엽이 많아 푹신해서 걷기가 수월하지만 집중을 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일쑤다. 참나무가 많은 곳에 이르면 갑자기 대나무 숲이 나타나면서 청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참으로 오묘하다. 약 20m의 대나무 오솔길이지만 세속의 묵은 때를 대숲 바람에 날려버리고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적멸의 길이다. 마치 대신사의 고결한 정신이 내게 깃드는 듯하다. 대나무 숲속 사이로 굴이 보인다. 산중 높은 곳에 대나무 숲도 범상치 않은데 사자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의 자연 바위 동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훅 느껴진다. 수도 장소로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굴의 입구에서 보면 일반적인 거무튀튀한 모습이 아닌 약간 밝은 황토색과 붉은빛을 띠고 있어 성스럽고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아침 해 뜰 때와 석양이 질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천성산의 기(氣)를 느끼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다음화 예고 : 지동(芝洞) 장조카 최세조의 집 '대신사, 첫 종교체험을 시작하다' 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울산 여시바윗골 ... 을묘천서 받고 이적을 체험하다(2)대신사는 성동에서 조금 떨어진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작은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여시바윗골은 그 지형이 마치 소쿠리같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가끔 사람들이 대신사를 찾아와 도담(道談)을 나누고는 했다. 이곳 여시바윗골에서 대신사는 어느 이인(異人)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해득하지 못한다는 책을 받고, 이 책의 내용대로 기천(祈天), 곧 하늘에 기도했다. 이를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한다. 을묘천서는 실제로 어떤 책을 받았다기보다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수운 대신사께서 체험하게 되는 종교체험의 한 현상이다. 즉 대신사는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이인을 만나 천서를 받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신비 체험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이란, 지금까지 자신의 밖에서 도(道)를 구하는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안에서 도를 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을 말한다. 세상으로부터 도를 얻고자 했던 방식을 버리고 기도를 통해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 도를 얻고자 하는 방식을 택한것이라고 하겠다. 윤석산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을묘천서 이전까지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면, 이후부터는 유신론(有神論)의 입장에서 신으로부터 도(道)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운 대신사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상이라는 일상적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기존의 가르침을 만나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았지만, 을묘천서 이후 기천(祈天)을 통하여 하늘, 또는 한울님이라는 일상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는 전혀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도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구도의 방법이나 대상 등 그 양상이 을묘천서를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을묘천서 이후의 변화는 수운 대신사로 하여금, 용담에서 경신년 4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하였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을 세상에 내놓게 한 그 징검다리와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을묘천서는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수운 대신사, 그리고 동학이라는 가르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울산광역시는 이곳 일대를 1997년 역사문화보존지구로 고시하고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2호로 지정하였다. 1997년 10월 9일 ‘전 수운 최제우 유허지’로 지정된 후, 1998년 최제우의 종현손녀인 천도교인 최말란의 기부채납으로 수운 최제우 유허비가 건립되었으며, 1999년에는 비각이 세워지고 2004년 초가·초당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울산광역시는 2005년 유허지 명칭에서 ‘전(伝)’자를 삭제해 달라는 교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심의를 거쳐 ‘수운 최제우 유허지(水雲崔濟愚遺墟地)’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2015년 국토부의 개발제한구역 내 생활공원 사업 공모에 울산광역시 중구청이 선정되어 최제우 유허지 생활공원이 조성되었다. 또한 최근에 이르러 대신사의 소유였다는 육두락(六斗落)의 논이 있던 자리에 동학관이 건립되었다. 동학관은 총 23억 원의 예산을 들였으며, 건축 면적은 859.46㎡(약 260평)이다. 건물 형태는 단층 콘크리트 한옥이다. 울산광역시와 울산 중구가 함께 추진한 ‘동학관’ 건립 사업은 울산이 동학의 모태가 된 곳임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2020년 3월에 건립 사업 첫 삽을 떠서, 2022년 3월 31일 개관식을 진행했다. 동학관 자료실은 수운 최제우 선생과 을묘천서, 울산과 동학, 민족종교 동학의 역사 등에 대한 전시물로 꾸며지고, 관리할 울산 중구는 향후 유허지 전체를 관리하면서 ‘최제우’, ‘동학’, ‘울산독립운동’ 등을 주제로 한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게 된다. 여시바윗골 유허지는 2011년을 기준으로 학생, 관광객 등 단체 관람객은 물론 천도교인과 국내외 동학 천도교 연구자, 문화계 인사 등 연간 5천여 명 이상이 방문하는 곳이다. 앞으로도 동학 천도교는 물론 우리 정신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떨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다음 회 예고 : '<내원암과 적멸굴> : 대신사께서 득도 전에 수련을 하신 곳'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울산 여시바윗골 ... 을묘천서 받고 이적을 체험하다(1)울산은 대신사의 처가 동네이다. 대신사께서 젊은 시절 가족을 용담에 두고 주유팔로(周遊八路)를 떠나자, 살기가 어려워진 대신사 사모님은 가족을 이끌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사모님의 친정 동네는 울산 여시바윗골에서 좀 떨어진 ‘성동(城洞)’이라는 곳이다. 주유팔로를 하며 이룬 것 하나도 없이 대신사는 1854년 울산 처가 동네인 성동으로 돌아온다. 이곳 성동에서 좀 떨어진 산간 마을인 유곡동(幽谷洞) 여시바윗골 일명 호암리(狐岩里)에 작은 초당을 짓고 매일 같이 머물며 공부를 했다. 이러던 중 어느 이인[異人, 혹은 이승(異僧)이라고도 함]으로부터 천서(天書)를 받는 일종의 종교체험을 한다. 대신사께서 을묘년(乙卯年, 1855년)에 「천서(天書)」를 받았다는 여시바윗골은 울산광역시 유곡동(幽谷洞)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아파트와 빌딩들이 즐비하지만, 대신사 시절에는 울산 변두리의 깊은 산골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대신사께서 세상을 구할 가르침을 얻고자 길을 떠나 10여 년을 떠돌았으나, 아무것도 얻지를 못하고 이곳 울산 여시바윗골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성동(城洞)이라는 곳이 대신사 사모님인 박씨 부인의 친정이다. 대신사께서 길을 떠나 집안을 돌보지 못하자, 사모님은 살길이 없어 자식들을 이끌고 이곳 친정에 와 있었다. 그리하여 대신사는 주유팔로 끝에 이곳 처가 동네인 성동으로 온 것이다. ✦ 다음 회 예고 : <울산 여시바윗골 ... 을묘천서 받고 이적을 체험하다> 2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 (守菴 廉尙澈)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경주 용담(龍潭) …대신사 득도한 동학 천도교 제1의 성지 (2)용담 일대는 국립공원 지역이다. 1975년 정부로부터 국립공원으로 고시를 받고, 그간 허물어지고 없어진 용담정도 새로 건축을 하였고, 용담수도원도 새로 지어 천도교인들이 참배하고 수련을 하는 도장이 되었다. 근년에 이르러 경주시에서 용담 일대를 산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2010년부터 시작해 2017년까지 용담정 일대 주변 터 31만 4천여m²에 총 74억 원을 들여 시행됐다. 그 결과, 대신사 생가가 복원되고 수장고와 전시·영상 홍보실을 갖춘 수운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또 대강의실과 세미나실, 숙박 시설을 갖춘 교육문화관과 수련관이 신축되었고 동학 탐방로와 휴식 공간 등이 조성되었다. 경주시에서는 용담 일대 성역화 사업에 힘입어 동학 천도교 사상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행사 등을 개발하고 전국 네트워크화하는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용담 일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그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었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어 반갑고 다행스럽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바티칸성당을 방문한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묘교회, 통곡의 벽 등 세계 곳곳의 종교 성지를 가면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를 떠나서 탐방 일정에 당연히 성지 순례 코스가 들어가 있다. 경주는 수학여행, 가족 여행, 개인 여행, 단체 여행 등 어떤 식으로 경주를 찾아도 신라의 찬란한 문화 유적과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경주에는 신라의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학을 창명한 수운 대신사의 탄생지이고 용담이라는 동학 천도교 제1의 성지가 있다. 경주를 방문하면 구미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용담을 꼭 방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동학이 시작되었고, 갑오년 동학혁명의 깃발이 휘날린 동학의 사상과 정신의 근간이 여기서 흘러간 이유를 느껴보기 바란다. 용담의 수려한 계곡과 오솔길을 찾아 지치고 답답한 마음의 안정과 여유로움도 만끽하고 떠나기를 바란다. 수암 염상철 심고 ✦ 다음 회 예고 : 대신사께서 을묘천서를 받고 이적을 체험한 울산 여시바윗골로 갑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경주 용담(龍潭) …대신사 득도한 동학 천도교 제1의 성지 (1)‘용담’은 대신사께서 득도한 구미산(龜尾山) 용추계곡(龍湫溪谷) 일대를 부르는 이름이다. 이 계곡에는 많은 담(潭)과 소(沼)가 있는데, 이들 중 한 곳을 ‘와룡담(臥龍潭)’이라 불렀다. 대신사의 할아버지는 이 일대에 있던 폐사(廢寺)를 사들여 고친 후에 용추계곡에 있는 와룡담의 이름을 그대로 살려 ‘와룡암(臥龍庵)’이라 이름하였다. 훗날 대신사의 아버지 근암공 최옥이 과거에 실패하고 고향에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와룡암 자리를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으로 고치고, 앞 계곡 건너에 새로 정자를 지어 ‘용담서사(龍潭書社)’라는 편액을 달았다. 그 이후 이 일대를 ‘용담’이라고 불렀고, 특히 대신사께서 이곳에서 득도하고 가르침을 폈기 때문에 수운 대신사를 ‘용담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용담서사’를 흔히 ‘용담정’이라 부른다. 대신사께서 나이 스물에 살던 집이 불이나 부득이지동(芝洞, 전 용담교구 일대)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집이 좁아 많은 식구가 살 수 없었다. 이에 장조카인 최세조(崔世祚)의 가족만 살게 하고 대신사는 용담 근처로 와서 살았다. 근암공이 와룡암을 집으로 개조한 그곳이다. 용담정 바로 왼편 앞에 있는 폭포의 이름은 ‘비류폭포(飛流瀑布)’이고 그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 이름은 ‘불로암(不老巖)’이다. ‘용담’이라는 이름 역시 용추계곡에 있는 작은 담(潭)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의 본 이름은‘와룡담(臥龍潭)’인데, ‘와(臥)’를 빼고 흔히 ‘용담’이라고 불렀다. 『용담이십육영』에 의하면, 이담은 지금의 용담교 아래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대신사는 주유팔로(周遊八路)의 길을 떠났고, 처가 동네인 울산에서 몇 년 살다가 1859년 10월 가족들과 함께 다시 용담으로 와서 살게 된다. 용담에서 불출산외(不出山外)를 결심하고 지극한 수련에 임한 결과,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한다. 즉 용담은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고, 또 이 가르침을 세상을 향해 편 곳으로, 동학 천도교 제1의 성지인 것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구미산(龜尾山) 중턱에 자리한 용담(龍潭)은 행정구역상의 이름은 아니다. 구미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용추계곡(龍湫溪谷)에 용담정이 자리해 있고, 이곳에서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고 동학을 창명(創明)하였으며, 세상을 향해 가르침을 편 곳이기 때문에 흔히 세상의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대신사는 이곳 용담에서 도를 펴시다가 포덕 4년(1863년) 12월 10일 조선조 조정에서 급파된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가 이끄는 관군에 체포되었다. 경주부에서 신상 파기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철종(哲宗)의 승하(昇遐)로 과천에서 길을 돌려 대구 감영에 수감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후 조선의 조정으로부터 참형을 선고받고 대구 관덕당(觀德堂)에서 참수되었다. 이렇듯 용담은 대신사께서 세상을 구할 도를 얻고자 공부를 한 곳이며, 한울님을 만난다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여 세상을 구할 가르침인 동학(東學)을 창명한 곳이다. 또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순도(殉道)의 길을 간 곳이기도 하다. 수암 염상철 심고 ✦ 다음 회 예고 : 첫 순례지, 경주 용담(龍潭) 2편이 이어집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
동학만리(東學萬里) 연재를 시작하며저는 충북 진천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교당에 다녔습니다. 뜻도 모른 채 주문을 외우고,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신앙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살아오며 많은 굽이길을 지났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서울교구에서 활동하며 신앙의 기쁨을 배웠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는 ‘사인여천’, ‘성·경·신’의 가르침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습니다. 때로는 흔들렸지만, 끝내 이 길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늘 갈증이 있었습니다. 스승님들의 발자취를 더 가까이 만나고 싶다는 갈증이었습니다. 그 갈증이 저를 길 위로 불러냈습니다. 윤석산 교령님, 여러 동덕들과 함께 20년 넘게 전국의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깊은 산골의 암자, 잊혀진 마을의 옛터, 역사의 자취가 스승님의 목소리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여정이 쌓여 『동학만리』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 길은 저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 함께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터넷판 『천도교신문』에서 다시 한번 발자취를 짚어가려 합니다. 이번 연재는 두 부분입니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 편에서는 경주 용담, 울산 여시바윗골, 내원암과 적멸굴, 남원 은적암, 대구 감영, 자인현 후연주점, 그리고 수운 대신사 생가까지 열 곳을 찾아갑니다. 이어지는 해월 최시형 신사 편에서는 포항 흥해 검곡, 영월 직동, 정선 무은담과 적조암, 단양 송두둑, 인제 갑둔리, 익산 사자암, 공주 가섭암, 서울 사형터, 여주 해월 신사 묘소까지 스물여섯 곳을 더듬어 갑니다. 모두 서른여섯 곳. 그 길에서 우리는 스승님들의 삶을 만나고,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순례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흔적을 찾고, 의미를 새기며, 내 삶의 힘을 얻는 길입니다. ‘동학만리’는 저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길이기도 합니다. 『천도교신문』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이 길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첫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수암 염상철 심고 ✦ 다음 회 예고 : 첫 순례지, 경주 용담(龍潭).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깨달음의 자리를 함께 찾아가겠습니다. 수암 염상철(守菴 廉尙澈) 1956년 충북 진천 출생 한국종교인연대(URI-K) 공동상임대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수운최제우대신사출세2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천도교서울교구 후원회장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의장, 감사원장대행 역임 (사)한국사회평화협의회 감사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