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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성연합회, 울산 여시 바윗골 성지순례 진행경상도 여성연합회(회장: 덕순당 강봉지)는 포덕 166년(2025) 11월 15일(토), 경상도 관내 6개 포(남정포, 남진포, 도원포, 동원포, 순원포, 순의포)로 구성된 여성회원 29명과 함께 천도교 제1세 교조이신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이 을묘천서를 받으신 울산 여시 바윗골을 방문했다. 이곳은 정신문화의 발상지이자 민족종교 사상의 원천이며, 천도교 포태지로서 대표적 유적지로 손꼽히는 장소이다. 남해, 삼천포, 사천, 하동, 영산, 경주, 부산 지역에서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모여든 여성회원들은 피곤도 잊은 채 반가운 얼굴로 오전 10시경 동학관에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이어 남정포 이암 정의필 도정이 ‘수운 최제우 유허지 간략 약사’를 영상으로 설명했으며, 시청 후 11시에 기도식을 마치고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효신당 하수희 총무의 집례로 심고, 주문 3회 병송, 사계명 낭독(재무: 선수당 배영선), 여성회 강령 낭독(부회장: 시정당 문춘옥)이 이어졌다. 덕순당 강봉지 회장은 인사말에서 “회원님들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스승님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는 취지로, 대신사님께서 을묘천서를 받으신 이 뜻깊은 곳에서 모이게 되어 더욱 귀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서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자료를 준비해주신 이암 정의필 남정포 도정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앉아서 주문 공부도 중요하지만 스승님들께서 도를 펴기 위해 전국 팔도를 다니며 고생하신 일을 생각하면, 우리가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천도교를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확고하게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신당 박차귀 교구장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박 교구장은 모임을 준비한 강봉지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24년 전 고령 가야대학 강당에서 경상도 연원회 총회가 열렸을 때 남성들만 정식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고 여성들은 옵서버 자격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날 회의에서 당위성을 말씀드려 의안으로 채택되었고, 포덕 142년 2월 10일 고성교구에서 묵암 선생님 기도일에 경상도 연원회 여성회가 정식 발족했습니다. 저는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15년을 재임하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여성회 워크숍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고, 여성 지도자를 양성해야 천도교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1년에 두 번 이상 1박 2일 모임을 진행하는 등 임원과 회원들이 한마음으로 열정적으로 노력해 온 결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과거를 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께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분발해주시고 애교심(愛敎心)과 배려심으로 교단과 연원회 발전에 정성과 성력을 다해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연혁 보고는 옥숙당 황서윤 회원이, 감사보고는 정순당 강정옥 감사가 “무탈하게 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천덕송 합창 ‘우리의 길’을 다 함께 힘차게 부르며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박차귀 부산시교구장은 울산시교구 박암 이용수 종의원이 점심 식사 장소를 알선해준 데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현지에서 참석한 회원들과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 십리대숲을 산책하며 화합의 시간을 가졌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회원들은 서로 아쉬움을 나누며 “내년에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서둘러 귀향길에 올랐다. 사진 및 자료 제공 정신당 박차귀 부산시교구장 -
제64차 천도교연원회 동원포 모임 개최연원회 동원포(도정 철암 김영욱)는 11월 9일 오후 1시부터 부산시교구에서 32명의 관내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64차 동원포연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동원포 연원의 발전과 교화 사업을 위한 현안을 논의하였다. 이날 연원 모임에는 부산과 경주, 창녕, 영산 등 경상남북도는 물론 서울에서도 참여하여 심화기화의 흐뭇한 장을 연출하였다. 정신당 박차귀 도훈의 집례로 각 교구 교역자 및 참석 동덕 소개에 이어 올해 환원하신 고암 한한숙 선도사(서울)와 수신당 박선희 선도사(부산시)의 성령출세를 기원하는 추모 심고를 한 후 연원회를 개회하였다. 연원회는 철암 김영욱 도정의 개회사, 휘암 하명출 고문의 격려사에 이어 현황 및 경과보고, 지역별 동정 보고에 이어 의안을 심의하였다. 김영욱 도정은 인사말에서 “연원회 모임은 우리 천포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유대를 강화하며, 포덕교화의 정보도 교환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라면서 이를 위해서 “매매사사 한울님께 심고 드리고, 오관을 생활화해서 한울님을 염념불망, 영세불망하는 수도생활을 해 나감으로써 한때 두 분의 도정을 모시던 활발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당부하였다. 제1호 의안으로 포덕,교화 방안을 협의하여 사인여천의 마음으로 신입 교인에게 늘 관심을 갖고 신앙 안내에 정성을 다하자고 결의하였다. 제2호 의안으로 유대강화, 조직 활성화를 위하여 정기 연원회 모임 참여를 독려하고, 다음 번 모임 때는 더 많은 소식과 성과들을 보고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 박차귀 도훈은 “이번 모임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환담을 나누며 모범적인 동원포가 되기 위해 심기일전 할 것을 다짐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아쉬워하며 헤어지면서 다음 모임을 기약하였습니다.” 동원포는 포덕 120년(1979) 5월 20일 경암 김경태 관내와 석암 성낙헌 종법사 관내 교인을 통합 개편하면서 연비모임을 시작하고 포덕 123년(1982) 11월 9일 ‘동원포(東源布) 이름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 포덕 126년(1985) 12월 25일에는 일본 신호교구가 수보 편입되어 현재 7개 지역을 교도하고 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박차귀 부산시교구장 -
고암 한한숙 전 서울교구장 환원고암 한한숙 동원포 선도사가 포덕 166(2025)년 8월 13일 숙환으로 환원했다. 한한숙 선도사는 서울교구 후원회 간사, 교무부장, 순회교사를 역임했으며, 포덕 133(1992)년에 서울교구 교구장에 취임한 이후 포덕 142(2001)년 2월까지 서울교구장을 3회 연임하였다. 이 기간, 고인은 서울교구 사무실과 수련실을 개축하고 서울교구가 충실한 수도 생활 속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졌다. 고인은 중앙총부 종의원과 종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동원포 선도사로 추대된 바 있다. 영결식은 8월 15일 오후 8시 고려대학교(안암) 장례식장 1층 영결식장에서 봉행되었으며, 이후 경남 창녕군 도천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서울교구의 큰 어른이었던 고암 한한숙 선도사의 영결식에는 많은 교인이 참석하여 고인의 성령출세를 기원했다. 유족으로는 2남(한영부, 한영훈)과 1녀(한영실)가 있다. -
새인간장학회, 후진 양성을 위한 장학증서 전달천도교 부산시교구 산하 새인간장학회는 포덕 124년 2월, 교인들의 폐품 수집 기금과 독지가 교인들의 특성금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본 장학회는 인내천(人乃天) 종지와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천도교의 4대 강령을 실천할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42년간 이어온 신앙 기반 장학사업 장학회는 설립 이래 42년간 지속되어, 수많은 중·고·대학생들에게 학업의 동기부여와 희망의 밑거름이 되어 왔다. 부산시교구를 대표하는 모범적 신앙 기반 장학회로 자리 잡은 새인간장학회는 초기 조성금 100만 원(폐품수집 40만 원, 동원포 연원회 10만 원, 故 김현철 주관도정 30만 원, 박정원 도정 특성금 20만 원)으로 시작되었다. 장학생 선발은 당시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각 1인을 선발해 20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장학회 운영에 동참한 다수의 출연 이사들로 인해 기금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으며, 장학생 수도 함께 늘어났다. 수혜자 191명, 누적 지급액 3,307만 원 장학회는 포덕 138년부터 불우이웃에게도 장학금을 확대 지급하였고, 포덕 160년에는 천도교 종학대학원 입학생에게 입학금과 등록금까지 지원하는 등 대상과 범위를 넓혀왔다. 포덕 166년까지 누적 장학생은 총 191명, 총 지급액은 3,307만 원에 달한다. 특히 올해부터는 이사회 결의를 통해 장학금액을 인상하여 ▲중학생 20만 원 ▲고등학생 30만 원 ▲대학생 50만 원을 지급하게 되었다. 올해의 장학생: 김태현(해운대고), 장시현(부산대) 2025년(포덕 166년) 장학생으로는 해운대고등학교 1학년 김태현 군과 부산대학교 1학년 장시현 군이 선발되었다. 두 학생은 천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성실히 학업에 임하고 있어, 향후 교단과 사회에 기여할 인재로 기대를 모은다. 故 청암 김현철 도정의 뜻을 이어 새인간장학회 이사장인 정신당 박차귀 부산시교구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랫동안 장학회 이사장직을 맡아온 故 청암 김현철 전 동원포 도정의 후진 양성을 위한 큰 뜻을 잊지 않고 이어가겠습니다. 또한, 장학회 설립과 운영에 물심양면으로 힘써 주신 출연 이사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동덕님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사진 및 자료 제공 : 천도교부산시교구 -
[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1)뜻깊었던 의암성사 행적 조사 뜬금없는 계엄 선포와 국회의 해제 의결 이후 국내 정치가 소란했던 지난해 12월 6일 총부 사회문화관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는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과 독립유적지 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평소 의암성사에 관한 논문과 글을 발표하는 입장에서 늘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조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번 답사에 동행한 조사단은 교단을 대표해서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이 참여했고, 답사의 진행은 사회문화관의 최인경 관장과 최진영 차장이 맡았다. 연구자로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성현 큐레이터와 필자가 참여했고, 유적지 사진 기록으로 독립운동 유적 담기로 잘 알려진 김동우 작가와 민족운동 유적을 사진으로 알려주는 신춘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동영상 자료는 교단 동영상 자료를 정리하는 김정호 선도사가 맡았다. 원활한 답사를 위해 박동호 여행사 대표가 참여했다. 조사단은 12월 6일 아침 6시 인천국제공항에 집결하여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을 시작했다. 고베(神戶)에서 이틀간 조사하고, 교토(京都)로 이동해 하루, 다시 오사카(大阪)로 이동해 이틀을 조사하고 12월 10일 오후 22시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다. 돌아오면서 이번 조사단에 참가해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을 탐방하는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했지만, 이번 조사가 의암성사의 일본 행적의 절반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올해에 마무리 사업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이번 조사단의 활동을 간략하게 전한다. ‘외유’는 성사의 큰 그림 의암성사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신사를 보필해 강원도에서 도피 생활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으로 괴멸된 교단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인 포덕 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는 동학 교단을 이끌 후계자로 의암성사를 지명했다. 이듬해인 포덕 39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순도하였다. 이후 의암성사는 김연국 등의 반발을 수습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설법’을 통해 교단을 안정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교단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순도하거나 영어의 몸으로 고통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손천민도 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의 처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의암성사는 위기에 처한 교단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 발상을 했다. 하나는 피난 방법의 변화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 대세의 파악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외유(外遊)’였다. 성사는 외유를 통해 교단의 개벽을 꿈꾸었다. 성사는 이전에도 외유의 의견을 내비쳤으나 교단 원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이듬해인 포덕 42년(1901)에 교단의 주요 간부를 모아 외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辛丑(신축, 1901년) 三月(삼월)에 聖師(성사)가 門弟(문제)와 相議(상의)하야 갈으되, “往年(왕년)에 내 孫天民(손천민) 金演局(김연국)으로 더부러 相議(상의)하고 美國(미국)을 遊覽(유람)코저하다가 金演局(김연국)이 쫓지 않음으로 未果(미과)하엿거니와 이제 다시금 생각하여 본즉 將來(장래) 吾道(오도)를 世界(세계)에 彰明(창명)코저 할진대 今日(금일) 文明(문명)의 大勢(대세)를 觀察(관찰)하지 않으면 不可(불가)하다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내 이제 十年(십년)을 限(한)하고 外遊(외유)하야 世界(세계)의 形便(형편)을 歷探(역탐)코저하노니 諸君(제군)의 뜻이 어떠하뇨.” -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3편 제6장, 27쪽.- 위의 글을 보면 의암성사는 처음에는 미국으로 외유하고자 했다. 이는 동학에서 추구하는 시천주의 세상과 일맥상통하는 민주공화정 국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사는 미국을 돌아보고 민주공화정을 우리나라에 채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포덕 37년(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미국을 ‘문명개화를 이룩한 모범적인 선진국’으로 칭송한 매체였다. (오영섭, 「『독립신문』에 나타난 미국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67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6∼7쪽 참조) 이미 성사께서는 포덕 34년(1893) 보은교조신원운동에서 “민당(民黨)”과 “민회(民會)”를 경험하기도 했다. 시천주의 교의와 합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공화정이었다는 점과 당시 미국을 모범국으로 소개한 사회적 분위기 등이 성사의 미국 외유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암성사는 포덕 42년(1901) 3월에 원산을 거쳐 미국을 가려 했지만, 원산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어서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 경유하는 동안 미국행 배표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에게 피해를 당해 경비 부족으로 부득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機密 제85호, 「李祥憲ノ身元及擧動ニ關シ回申」, 『要視察韓國人擧動』3, 1904년 9월 7일자. “李祥憲始ノ各李圭完(或ハ元孫時秉)京畿道陰竹ノ人三四年前始メテ日本ニ遊フ其目的ハ世界漫遊ニあアリテ先ツ釜山ニ出ツルヤ二三日本人ノ欺ク所ト成リ汽船買入ノ約ヲ為シ代価貳萬餘圓ト定メ先ツじ若干手付金ヲ交付シ大阪ニ於テ現物受授ノ約ヲ結ヒ大阪ニ赴キタルニ現汽船ノ所在ヲ認メス全ク詐偽ノ行為ニ出タルヲ知リ空シク滞留中.” 참조) 당시 성사의 최우선 목표는 교단의 재건이었고 이를 위한 방법은 문명개화된 외국을 직접 보고 근대문명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교단에 접목시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성사께서 일본에 머무른 이유는 당시의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근대문명을 접하고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1901년 3월부터 1906년 1월까지였다.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01년 3월부터 1903년 6월까지의 2년 4개월간이고, 1기는 1903년 6월부터 1906년 1월까지의 2년 8개월간이다. 중간에 중국 상하이 등을 방문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성사의 일본 외유 기간은 대략 5년이다. 성사는 원래 10년을 목표로 외유를 하고자 했으나 그 연한을 채우지 못했다. 그 원인으로 성사의 명을 받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이용구가 친일파인 송병준과 합동해 진보회를 일진회로 고치고 친일에 앞장서 동학 교단을 친일화하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성사는 이용구의 일진회와 단절하고,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어 근대적 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교단은 일신하여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성장했다. 첫 방문지는 고베(神戶)교구 답사단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베교구’였다. 고베교구는 일본에 있는 유일한 천도교 교구이다. 교베교구의 연원은 1944년 해방 직전 귀국하지 못한 고베의 독실한 강영태(姜永泰), 성사경(成仕卿), 김성오(金聖五), 하재술(河在述) 등 천도교인 4명이 중심이 되어 70여 명의 교인을 규합해 현재 고베교구가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區 背蜜峰)에 “천도교고베종리원(天道敎神戶宗理院)”을 설립하고 종교법인 등록을 마친 것에서 시작한다. 연원은 ‘동원포’이고, 현 교구장은 김태환(金泰煥)이다. 같은 시기 ‘오사카교구’와 ‘교토교구’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일본에는 고베교구만 남았다. 특히 교토교구는 눌암 황태익의 4남인 황용수가 세워 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음에도 없어져 안타깝다. 고베교구에 도착하니 사전에 조사단의 방문을 인지하고 있던 김 교구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강건한 인상의 김 교구장은 7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건강했다. 인사를 나누고 최인경 사회문화관장의 집례로 방문 참례식을 가졌다. 윤석산 전 교령은 인사말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고베교구와 김태환 교구장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일본어 경전을 준비해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답사에서 “고베교구에는 매 시일 20명 이상이 시일식을 보고 있으나 어려움이 있으며, 경전과 자료의 일본어 번역, 일본어가 가능한 교인이 와서 생활하면서 지도해줄 인사를 요청한다.”라며 해외 신앙의 어려움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서 윤석산 교령은 선물로 준비해 간 ‘대신사 출세 200년 기념메달’과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간행한 『읽기 쉬운 천도교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을 기증했다. 또 윤석산 전 교령은 자신의 저서와 시집 등도 선물하였다. 김 교구장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누고 조사단은 포덕 136년(1995) 1월 17일 고베대지진 유적이 있는 ‘고베항지진메모리얼파크’를 찾아 보존된 지진 흔적을 둘러보았다. 김태환 교구장은 고베교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충분해 교인 자제 중에 유학생이 있으면 교구에서 지원할 수 있고, 또 유학생이 아니더라도 고베교구에서 신앙을 함께할 동덕이 있으면 숙식과 경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윤석산 전 교령과 문범식 전서실장은 12월 8일의 시일식에 다시 고베교구를 방문해 시일식을 봉행하며 30여 교인들과 함께 천도교 종교행사인 시일 의식을 봉행하고 고베 교인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동귀일체의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후등승장(後藤勝藏) 여관 터 2월 7일 오전에는 성사께서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을 찾아 나섰다. 기록에 따르면 후등승장 여관이 위치했던 곳은 고베시 중앙구 해안통 3정목(中央區 海岸通 3丁目)이었다. 이곳은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가 손병흠, 민기호와 같이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현재 주소는 고베시 추오구 사케마치도리 3정목 2-8이다. 기존의 자료에는 여관 자리에 미쓰비시 게스트하우스라고 되어있어 주위에 이런 이름의 건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주변에 미쓰비시 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해안통 3정목 일대의 가게를 돌아다니며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당시 성사가 흐등승장 여관은 현재 “더 레지던스 모코마치 카이간도리(The Residence Motomachi Kaigandori)”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사가 머물렀던 후등 여관은 고베항 바로 앞에 있는 숙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유물로 옆 골목인 해안통 2정목에 있는 ‘고베항 평화의 탑’이 있었다. 포덕 43년(1902) 8월 29일 성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고베항으로 들어왔고, 오자마자 이 여관에 투숙했다. 성사가 묵었던 후등승장 여관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니시무라[西村] 여관이 있었다. 이 여관은 1882년 8월 9일 박영효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여관이다. 박영효는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오는 동안 배에서 태극기를 그렸고, 이를 게양한 곳이 니시무라 여관이다. 따라서 니시무라 여관은 해외에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니시무라 여관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이 건축되었고 1층에 니시무라사진연구소가 있어 예전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시무라 여관의 주소는 고베시 중앙구 영정통 3정목(神戸市 中央区 栄町通 3丁目) 2-12이다.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노동자상 7일 오전의 후등승장 여관 답사를 마치고 오후에는 고베의 유럽풍의 거리인 기타노이진칸을 둘러본 후 고베철도 부설 공사 중에 사망한 조선인노동자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조선인노동자상은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 공원 북쪽에 있다. 고베철도는 이곳 에게야먀[會下山] 공원 옆을 지나는데 고베 남쪽 바닷가와 그 반대쪽 아리마 온천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고베철도 공사는 산을 뚫어서 터널을 만드는 난공사였다. 포덕 68년(1927)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 중에 희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손과 관련 단체, 그리고 뜻있는 일본인들이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희생자를 조사하고 추모하는 모임)을 만들어 포덕 137년(1996) 11월 노동자상을 건립했다. 노동자상은 곡괭이를 어깨에 진 깡마른 작은 체구의 모자를 눌러쓴 채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조사단은 소주를 한잔 따르고 성령출세의 심고를 올렸다. 노동자상에 붙은 안내판에는 포덕 68년(1927) 8월 1일부터 포덕 77년(1936) 11월 25일까지 1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터널 작업 중에 희생되었다고 희생자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이 공사에 참가한 조선인 노동자는 1,500명에 달했으며, 확인된 13명 이외에도 더 많은 조선인이 부상당하거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노동자상 아래에는 이들이 만든 터널을 오가는 철마가 쌩쌩 달리고 있다. (박현국, 「고베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을 기억하는 동상 – 고베철도부설공사 조선인 노동자 동상」, 『오마이뉴스』, 2018.6.22. 참조) 윤동주와 정지용 8일 아침에 고베를 출발해 1시간 30분에 걸쳐 교토로 이동했다. 조사단은 교토로 와서 먼저 도시샤(同志社)대학을 찾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와 정지상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있다. 필자가 포덕 134년(1993)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윤동주 시비만 있었는데 이후 포덕 146년(2005)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희 재학 중 『소년』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 포덕 83년(1942)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으로 유학 왔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교토의 도시샤대학 문학부에 전학해 수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포덕 46년(1945)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7세로 옥사했다. 사후 정지용 등이 그의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해월신사의 외손주인 정순철도 옥천 출신으로 비슷한 시기에 거주해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보고를 거쳐 포덕 44년(1923)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휘문보고 시절부터 시를 발표했으며. 1929년 귀국 후 휘문보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영랑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문단에 등단시켰다.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시비에는 그가 일본에서 생활했던 지역을 그린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시비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힘을 모아 걸립했다. 조사단은 찾은 시비 옆에는 작은 태극기가 꽂혀있어 뭉클했다. 식민지 시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뇌하던 청년 시인 윤동주와 향토색 짙은 조국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시를 쓰던 정지용을 기리며 일행은 심고를 했다. 고노에중학교(近衛中學校) 아침부터 흐린 날씨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비를 맞으며 조사단은 성사께서 유학생을 입학시켰던 고노에 중학교를 찾았다. 고노에 중학교는 지금은 시립중학교인데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교토부립제1중학교(京都府立第一中學校)’로 설립되었다. 이 중학교는 의암성사가 교단의 발전과 나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생을 보낸 학교이다. 1차로 포덕 43년(1902) 3월 1차로 교인 자제 24명을 선발해 보냈고, 포덕 45년(1904) 3~4월의 2차로 4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입학시켰다. 이때에는 교인 자제뿐만 아니라 교인이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도 선발했다. 성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한 곳이다. 이때 파견된 유학생으로는 제2세 교조 해월신사의 아들 최동희를 비롯해 정광조, 이인숙 등의 동학교인 자제와 춘원 이광수 등 전국에서 선발된 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노에 중학교는 교토대학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유학생들은 교토대학을 드나들며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둘러보고 정문 옆 화단에서 이 학교가 교토부립제1중학교이었음을 알려주는 2개의 흔적이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헤이안[平安] 건도(建都) 1200년을 기념해 “각목백선선정수목(名木百選選定壽木)” 안내판에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이었던 旧制京都一中(구경도일중, 明治(명치) 30年~昭和(소화) 4年)”이라는 구절과 다른 하나는 “소화 49년 9월 경일중낙북고교동창회건지(京一中洛北高校同窓會建之)”라고 세운 기념석이었다. 조사단은 고노에 중학교를 한 바퀴 둘러보고 운동장도 살펴보면서 당시 유학생들의 심정에 느껴보고자 했다. 쇼고인마치(聖護院町) 8일 오후에는 교토에서 성사가 거주했던 쇼고인마치 일대를 찾아 나섰다. 쇼고인이 있는 쇼고인마치는 의암성사가 교토에서 거주했던 동네이다. 성사는 포덕 44년(1903) 6월에 이곳으로 이사했다. 교토시 사쿄구 쇼고인나카마치에 있는 쇼고인은 현재 본산수험종(本山修験宗)의 총본산(総本山) 사원이다. 쇼고인의 문적사원(門跡寺院)은 헤이안 시대에 창건된 사원으로 일왕과 황족이 거주하였던 사원이다. 일본 왕실에 큰불이 났던 1788년과 1854년에는 일왕이 임시로 거쳐한 ‘임시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쇼고인은 메이지왕이 궁궐을 나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쇼고인마치에서 성사가 어디에 거주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쇼고인마치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사는 이곳 쇼고인마치의 건물을 빌려 머무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쇼고인마치에서 고노에중학교까지는 두세 블록 밖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성사는 이곳에 거주지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함께 유학생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사단은 쇼고인의 문적사원 앞에서 골목길을 따라 고노에중학교까지 걸어보니 시간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필자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당시 수십명의 유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웃고 떠들면서 등하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조국과 교단의 앞날을 위해 준비하던 유학생들의 강렬한 눈빛이 떠올려 졌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던 성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성사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지원하다 포덕 45년(1904) 6월에 도쿄로 이주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天ケ瀨橋]와 윤동주 시비 9일 아침은 화창했다. 조사단은 교토의 우지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의 유적을 찾았다. 조사단의 김동우 작가는 이곳을 꼭 가보아야 한다고 건의해 일정에 포함되었다. 윤동주는 귀국을 결심하고 도시샤 대학 친우들과 송별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윤동주는 이곳 강변에서 불을 지펴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당시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친구의 앨범에서 발견되었다. 윤동주는 당시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자 ‘아리랑’을 불러 주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곳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포덕 84년(1943) 7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후쿠시마 형무소에서 포덕 86년(1945) 2월 16일 옥사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윤동주의 생의 마지막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윤동주가 이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 ‘시인 윤동주의 기억과 화해의 비’이다. 이 비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 5분 걸으면 왼쪽 길가에서 서 있다. 이 기억과 화해의 비는 2004년 유엔에서 5월 8~9일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추억과 화해의 時(시)”가 결의된 후, 일본에서 윤동주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 윤동주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고, 포덕 158년(2017) 10월 18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 비에는 “새로운 길”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 尹東柱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유적을 보고 조사단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오사카로 향했다. (계속)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
고성 당산에서 산화하신 동학군 선열이시여!지난 11월 11일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고성산 동학농민혁명군 위령식이 경남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고성산 위령탑에서 봉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 경남동학혁명계승사업회,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주최·주관으로, 천도교중앙총부, 하동군, 하동의회, 옥종면, 천도교경상도연원회, 하동문화원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위령식은 130년 전, 하동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학농민혁명군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또한 유족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모든 시민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고자 열린 이번 위령식은 식전공연, 1부와 2부 추모식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위령식에 앞서 식전 추모공연으로 초혼 진혼(이윤옥 명창), 추모시 낭독(부활의 시-김동련 작, 이상민 낭독)이 있었다. 1부 위령식은 하재식 사천교구 교화부장이 집례를 맡아 내빈소개-개회선언-국민의례-청수봉전-심고-주문 3회 병송-경전봉독(성령출세설, 강선순 부산시교구 여성회장)-동학혁명군 폐정개혁안 12개조 낭독(정의적 진주시교구장)-추념사(천도교 이범창 종무원장)-추모사(하승철 하동군수 외)-분향-만세삼창(신만석 동학혁명군 유족, 천도교사천교구 선도사)-심고-폐회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2부 축하 특별공연으로는 천도교 부산연합합창단(박차귀 부산시교구장 지휘)의 동학농민혁명군 추도가 공연과 “여장협장군과 동학군과의 화합 한마당”을 주제로 경상국립대 사물놀이패의 공연이 이어졌다. 1부와 2부 행사를 마치고 야외에서 뷔페식으로 마련된 식사를 나누는 등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졌다.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동련 공동의장은 내빈소개에 앞서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지난 갑오년과 지금의 국내 외적인 상황은 중첩되는 바가 많습니다. 이곳 하동의 하승철 군수님은 갑오년 민족이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백성 속에서 동학이 나왔듯이, 오늘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 역시 시민 속에서 나와야 하며 이것은 민족의 위대한 문화자산인 동학의 지혜를 반추하고 계승하고 선양하는 노력을 통하여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희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이러한 군수님의 뜻을 받들어 작은 부분에서부터 성실하게 노력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이범창 종무원장이 참석하여 추념사를 하였다. 천도교 원로 교인 김덕칠 선도사, 백복기 선도사 등이 자리에 함께하였으며 김 산 천도교연원회 부의장, 정덕재 천도교감사원장, 신명식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 천도교경상도연원회운영위원회 박충구 사무국장, 박인준 전 종무원장, 정갑선 교무관장 등이 참석하였으며, 정의맹 남정포도정, 최봉수 순암포도정, 김영욱 동원포도정 등이 참석하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서는 신순철 이사장을 대신하여 한민욱 기념사업부장이 참석하였다. 전국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도 참가하여 자리를 빛냈다.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고재국 대표와 김명재 사무국장, 경남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시암 정의적 이사장, 남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용암 김환용 이사장, 부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호암 이용 이사장과 허채봉 대표, 순천영호도회소기념사업회 이하윤 대표, 하동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종관 의장과 송찬영 박경희 부의장과 임원 등이다. 그 외에도 하승철 하동군수, 주영채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장, 하재호 산청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장, 강대선 하동군의회 의장, 강태진 하동문화원장, 이춘호 하동교육지청 교육장, 신재범, 박희성, 최민경 하동군의원, 박규식 옥종면장, 이종수 이병주문학관장 등이 참석하였다. 아래는 추념사 전문이다. 추 념 사 오늘 우리는 130년 전 정의를 실현하고 나아가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이곳 고성 당산 전적지에서 산화하신 선열들의 성령출세를 위해 심고 합니다. 선열들께서는 이 나라가 위난에 처했던 갑오년에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깃발을 높이 들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한 금자탑을 세운 빛나는 투쟁이었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한국의 찬란한 오늘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갑오년 3월, 혁명의 첫 횃불을 들고 일어난 동학군은 황토현(黃土峴)과 황룡촌(黃龍村)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여세를 몰아 일거에 전주성을 무혈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습니다. 이러한 동학혁명군의 기세에 압도당한 조정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고 동학군은 호남 전역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정(民政)을 시행함으로써 ‘백성이 주인’인 이상사회 건설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된 당시 위정자들에 의하여 청나라에 구원의 손을 뻗쳤고, 이를 틈 타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청일전쟁에 승리를 한 일본군은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군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전 국토를 유린하였습니다. 이에 해월 신사께서는 옥천 청산에서 9월 18일 총 기포형을 내리셨고, 진주, 하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도 동학군들이 기포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스즈키(鈴木)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은 진주를 거쳐 곤양까지 진출하여 시루봉에서 하동 접주 여장엽이 이끄는 동학군을 격파하고, 진주 인근 수곡(水谷)으로 진격하였습니다. 당시 이곳에는 진주・곤양・남해・하동・산청・단성・함안・의령 등 서부 경남에서 기포한 동학군과 구례・남원・태인・익산 등 호남에서 지원에 나선 동학군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이들 동학군 수천 명은 일본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10월 14일 고성 당산으로 이동하여 산 정상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항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신식 무기 앞에 동학군은 여지없이 패하였고, 여장엽・김성룡 접주 등을 비롯한 500여 명의 동학군이 전사하고 아픔과 함께 산청과 하동, 광양 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고성 당상 정상에는 당시 동학군이 사용했던 청수대와 돌의자가 남아 있어 결사 항전 당시도 천도교 의식을 치르면서 의지를 다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당시 동학군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 끝까지 항전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무극대도의 신앙으로 다져진 보국안민의 정신이 강한 신념으로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국의 제단에 몸을 바치신 동학군 선열들이시여! 선열들께서는 비록 비명에 가셨으나 그 후 동학군 후예들은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10년 후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한 데 이어 기미년에 일제의 침탈에 맞서 거족적인 3・1 독립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우리의 민족정기를 세계만방에 과시하였습니다. 고성 당산에서 산화하신 동학군 선열이시여!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명실상부, 자타공인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특히 k-콘텐츠와 문화산업이 세계적인 인기를 힘입어 승승장구하여 훌륭한 문화예술로 꽃피워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열과 대립의 역사를 극복하고, 다 함께 선열들의 정신을 다시 상기하며, 보국안민의 기치를 드높여 나가야 할 때입니다. 아울러 민족혼을 일깨우고, 우리 국민 가슴속에 민족정신, 애국정신을 드높이는 산실로써 자리매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동학군 선열들이시여! 선열들께서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영원히 번영하고 다시 개벽하는 천도교 정신이 힘차게 부활할 수 있도록 보우하시기를 기원하오며, 선열들께서 성령으로 출세하시어 길이 명복이 있으시기를 심고 하는 바입니다. 포덕 165(2024)년 11월 11일 천도교 교령 윤 석 산 心告 -
제63차 천도교 동원포 총회개최동원포(도정: 철암 김영욱)는 포덕165년 2월17(토)일 오전11시 부산시교구성화실에서 관내 교역자 및 동덕 31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63차동원포 연원회가 개최되었다. 정신당 박차귀 도훈의 집례로 각 교구 동덕및 교역자 소개와 환원하신 원수당 정계자 동덕의 추모 심고가 있은 뒤, 개식,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 병송, 개회사(철암 김영욱 도정) 격려사(일암 한광도 고문)에 이어 동원포 현황 및 경과, 결산보고가 있었다(정신당 박차귀 도훈 진행) 또 각 지역 동정 보고는 창녕, 영산, 경주, 서울, 부산 순서로 각 지역 교구장 및 책임자가 동정을 발표하였으며, 의안 상정 및 토의는 제1호 의안: 포덕, 교화. 제2호 의안: 유대강화, 조직 활성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천덕송 봉창(우리의 길)순으로 진행되었다. 철암 김영욱 도정은 개회사에서 원처, 근처에서 참석해주신 교역자 및 동덕님들께 감사의 인사와 더욱 분발하자고 인사했으며, 격려사에서 일암 한광도 고문(전 동원포도정)은 서울지역 및 총부동정을 전달하였고 "동귀일체해서 더욱 잘하자"고 격려했다. 이어 정신당 박차귀 도훈의 진행으로 포덕 163년도 수보기준으로 원직현황, 지역별 분포 현황, 주직현황을 보고하였고 포덕164년 포덕활동에는 (신포덕 11명)각 지역 순회 활동보고와 특히 일본 신호교구 동덕18명이 오래간만에 성지순례차(총부, 봉황각, 용담정, 생가 터등) 포덕 164년 11월14~18일(4박 5일)동안 방문하여 우의를 다지는 시간도 가졌다. 의안 상정된 포덕활동 및 조직 활성화는 더욱 박차를 기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자는 다짐과 함께 경상도 연원회 운영위원회에도 더욱 관심과 협조를 부탁했다. 참석한 모든 동덕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한울님의 은덕과 천포형제의 기운을 느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 및 기사제공 : 박차귀 부산시교구장) -
부산시교구 김성한 동덕, 삼성전자 부사장 취임부산시 교구 김성한(성암成菴) 동덕이 삼성전자 부사장(Foundry CP실 담당임원)으로 취임했다. 김성한 동덕은 1970년 부산 출생으로 동원포 도정과 부산시교구장을 역임한 청암 김현철 동덕과 부산시교구 여성회 회장과 여성회본부 중앙위원을 역임한 화순당 이분희 동덕의 7녀 1남 중 막내이자 장남이다. 김성한 동덕은 한국항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에 삼성전자에 입사하여 반도체 해외업무를 수행하였고 재직중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17년 삼성전자의 상무로 임원생활을 시작하여, 그간의 회사내 공적을 인정받아 금번 2024년 삼성전자 정기임원 승격시 부사장으로 승진하였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은 "김성한 동덕은 태어나면서부터 천도교에 입교한 독실한 도가완성을 이룬 가정에서 자랐다. 그동안 어머니 이분희 동덕, 누나와 자형 및 형제들이 부산시 교구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어 교인들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독실한 가정의 자랑스러운 천도교인이다"라고 밝혀 화제가 되고 있다. -
천도교 일본 고베교구 모국방문단 성지순례 성공적 종료11월 14일(화) 오후 1시경 일본 고베교구 김태환교구장과 교인 17명이 4박 5일 일정으로 성지순례를 위해 입국하였다. 6년만에 고국을 찾은 고베교구 동덕들은 입국 첫날 공항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고 바로 도봉구 우이동에 있는 봉황각을 방문하였다. 봉황각은 3·1운동의 산실인 역사적 장소로 의암 손병희 성사께서 3·1운동 거사 전 전국의 교역자를 모아 7차례에 걸쳐 연성(煉性)수련한 곳으로 이곳 수련을 거친 교역자들이 전국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봉황각에서는 주용덕 종무원장, 서종환 수도원장, 박징재 여성회본부 회장 및 임원들이 오랫만에 고국을 찾은 이들을 맞아 환영해 주었다. 주용덕 종무원장의 따뜻한 환영사에 이어 수도원장의 안내로 의암성사묘소 참례를 마친 후 봉황각을 둘러보았다. 봉황각과 의암성사, 3·1운동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은 쌀쌀하고 추운 날을 감격스러운 시간으로 바꾸었다. 한재신 여성회본부 포덕부장을 비롯한 여성회 실무진들은 저녁식사를 준비하여 모처럼 고국의 정과 맛을 대접하였다. 2일차인 15일(수)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3·1독립선언유적지(태화관터)-탑골공원-서대문형무소-경복궁-남산 백범광장공원의 순으로 역사 탐방을 하였다. 3일차에는 오산 드라마세트장과 청남대를 거쳐 경주 월정교와 첨성대를 보고 용담수원장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숙소로 이동하였다. 4일차는 용담정, 대신사 생가터 황성공원의 해월신사 동상 참례 후 순례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단양을 들러 우리나라 아름다운 자연도 눈에 담아 갔다. 이번 고베교구 모국방문단은 빠듯한 일정에도 매일 아침 중앙대교당과 용담정에서 수련을 하며 신앙심을 고취하였다. 4박 5일간의 방문 일정을 진행한 방문단은 18일 12시 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출국하며 한국에서 환영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함을 표하였으며, 중앙총부에 500만원, 동원포에 200만원, 여성회에 200만원의 특성금을 기탁하였다. 한편 이번 고베교구 동덕들의 서울 3·1운동 유적지 순례는 서울시의 후원을 받아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주최·주관하는 ‘3·1운동 104년 그 길을 걷다’ 체험행사의 일환으로도 진행되었다. 이 체험행사는 104년 전 3·1 만세가 전국에 진동하던 그 날의 그 길을 고려인들과 재일동포들 그리고 중국동포들이 걸어보게 하는 역사 체험 행사로 11월 15일은 재일교포(고베교구 동덕), 11월 19일은 고려인, 12월 9일은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시행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