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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속 천도교의 구호와 진상 규명, 민족운동의 한 축을 이루다(지난 호에 이어) 천도교 도쿄종리원 박사직이 귀국할 때 동료의 송사에서 “대지진! 대지진!! 일본 수도의 대지진 당시에 말도 모르는 백의동포가 좌로도 우로도 피할 곳이 없이 가진 발광을 다부림녀서 혀를 빼어 물고 눈알이 꿰어지는 뭇(衆) 죽음을 당할 때에 선생의 환장된 가슴에 쓸쓸한 암흑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손에 들고 동포의 뼈를 한 토막, 두 토막 주워 모으며 돌아가던 그때가 이제에 생각하면 눈물이시겠지요”라고 한 바 있다. 이는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에 참여한 바 있는 박사직의 반응이 아닐까 한다. - 동학지광 8호(1928.8)에 수록된 내용 (해설 성주현 상주선도사)- 동경당부는 포덕 68년 11월 1일에 기관지 「동학지광 (東學之光)」을 창간하여 포덕 74년 11월호까지 모두 18호를 발행하였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재난이었다. 그러나 이 재난은 자연재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청년들과 동포들은 극심한 공포 속에 흩어졌고, 이들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천도교의 조직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도쿄(東京)종리원의 보존과 위문반 임시 사무소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東京) 대부분의 건물이 붕괴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 건물은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했다. 이 건물은 이후 조선인 구호와 학살 피해 조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재조선동포위문반(罹災朝鮮同胞慰問班)’의 임시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위문반은 이곳에서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구호 활동을 전개했으며, 희생자들의 장례와 위령 의식을 주관했다.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결성과 활동 지진 직후 일본 전역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며, 조선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과 종리원장 박사직을 중심으로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결성되었다. 천도교 청년회원 이근무,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YMCA 등도 함께하며 범동포적 연대가 형성되었다. 1970년에 발간된 『극웅필경』에는 당시 YMCA 총무 최승만의 회고가 실려 있다. 그는 천도교 청년회 박사직 등과 함께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하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음을 기록했다. 이 조사는 1970년 3월 『신동아』에 「일본 관동진재시 우리 동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이후 『극웅필경』에는 재수록되었다. 위문반은 일본 당국의 방해와 탄압 속에서도 두 달간 피해 조사를 진행하며 진상 규명에 매진했다. 1923년 12월 25일 열린 ‘재동경조선인대회’에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으며, 보고에 따르면 학살 희생자는 총 6,661명에 달했다. 또한 해외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虐殺(학살)’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했다. 1924년 9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관동대지진 1주기 추도식을 개최하여 희생자들을 기렸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모 행사를 이어왔다. 2023년에는 100주기를 맞아 추모문화제를 열어 당시 사건과 천도교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조선 내 추모 활동과 일제의 통제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독부의 언론 통제와 유학생에 대한 감시로 학살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4년 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이 재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운동이 어려웠지만,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제활동과 추도회가 이어졌다. 특히 포덕 65년(1924) 9월 1일, 신흥청년동맹과 서울청년회가 주도하여 중앙대교당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주기 추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공식적으로 열린 유일한 대규모 추도회였다. 한편, 도쿄청년회는 일본 내에서 해마다 추도회를 열어 학살의 기억을 이어갔다. 포덕 65년(1924) 9월 13일, 흑우회·기독교청년회·조선노동동맹회 등과 연합으로 1주기 추도회를 열었고, 포덕 66년(1925)에는 도쿄종리원에서 2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며 조난동포들을 기렸다.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계승 관동대지진 속에서 천도교가 보여준 활동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민족운동의 한 축이었다. 천도교는 재난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행동했으며, 일본 내 조선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일본 내 조선인 인권운동과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천도교의 이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재난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천도교가 보여준 연대와 실천의 정신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세대를 넘어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
일본 치바현 관음사 ‘보화종루’와 위령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의 기억을 잇다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수많은 희생을 남기고 조선인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동경에는 천도교 해외 거점인 동경종리원이 있었는데, 지진과 화재에도 무사히 보존되어 이재동포위문반의 임시사무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희생자 조사와 피해 동포 구호 활동이 이루어졌다. 1924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1주기 추도식이 열렸고, 지난 2023년에는 100주기 추모문화제까지 개최했다. 본 연재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이 가진 상징적 기억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일본 치바현에 위치한 관음사에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보화종루(普化鐘樓)’가 자리하고 있다. ‘보화(普化)’라는 이름에는 ‘넓을 보(普)’, ‘될 화(化)’, 그리고 ‘쇠북 종(鐘)’, ‘세울 루(樓)’의 뜻이 담겨 있다. 1982년부터 일본시민사회를 통해 전개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시민운동과 함께 국내에서는 이 '보화종루'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펼쳐졌으며, 1985년에 이르러 이 종루가 완공됐다. 이어 1998년 9월 24일, 나기노하라에서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발굴되었고, 이 유해는 1999년 세운 위령비 아래에 안치되었다. 보화종루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역사의 아픔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상징적인 공간으로, 한국 전통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어 두 나라의 화합과 기억을 함께 담고 있다. 보화종루, 다시 울리다 20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아 한일 양국 시민들의 모금으로 보화종루의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 2025년 8월 26일, 보화종루는 새롭게 단장되어 완공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조선인 희생자 위령 종루 보화종루 개수완공기념식’이 관음사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한 가운데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는 세키 타쿠마(関琢磨) 관음사 주지의 개안공양(開眼供養)으로 시작해, 살풀이춤 공연이 이어졌다. 이후 야치요시 시장과 다카츠 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의 일본 측 인사와,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한 유라시아문화연대 신이영 이사장의 축사가 있었다. 또한 개보수된 보화종루 안의 종을 직접 울리는 타종식과 함께, 개보수에 힘쓴 양국 인사들과 한국의 단청 장인들에게 감사장이 전달됐다. 2부는 본당으로 자리를 옮겨, 치바현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추도 조사실행위원회 와타나베 아키라 대표와 도쿄 한국상공회의소 김순차 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후 1983년부터 현재까지 40여 년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오충공 감독이 제작한 사진 슬라이드를 통해 보화종루의 4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마지막 순서에서는 재일동포 탄고단의 사물놀이 공연과 함께 저녁 만찬이 진행되어, 한일 양국의 우정을 다지는 자리가 되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1923년 9월 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 지역에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 직후 민심이 혼란해지자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부녀자를 강간했다’, ‘방화와 약탈을 했다’와 같은 허위 소문이 확산됐다. 이를 빌미로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 소방대,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가세해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6천여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천도교는 당시부터 사건의 진상규명과 추모사업에 앞장서 왔다. (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이어가겠다.) 이동초 천도교 교서편찬위원이 저술한 『천도교중앙대교당 50년 이야기』에 따르면, 1924년 사건 1주기 추모식이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고 전한다. 이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희생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조선 청년들의 숭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기억을 이어가는 현재 이번 보화종루 개수완공기념식은 과거의 비극을 되새기며, 한일 양국이 함께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 세대가 기억을 이어가야 한다는 과제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1923년의 아픔을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기억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계속) -
평화로 가는 길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 추모문화제가 지난 9월 10일(일) 저녁 6시30분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렸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당시 천도교동경종리원은 희생자조사를 했던 이재동포위문반의 임시사무소로써, 희생자 조사와 발표를 주도적으로 실행하였다. 현재 공식집계 6,661명의 희생자는 이재동포위문반이 독립신문에 발표한 기록으로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 1924년 1주기 추도회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은 천도교가 그 당시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실천의 방법이었다 안타깝고 처절한 역사이지만, 천도교는 포기하지 않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울님의 은덕을 사회적 실천으로 베풀었던 것은 모두 스승님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
1923관동대지진 100년, 78주년 광복절 맞이 문진오 콘서트노찾사 출신 가수 겸 작곡가 문진오가 1923 관동대지진 100주년, 78주년 광복절 맞이 독립운동가의 노래 콘서트를 연다.가수 문진오는 해마다 3.1절과 8.15광복절에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기억하는 공연을 해왔다.올해는 1923년 관동대지진 100주년과 78주년 광복절 맞이 공연으로 '다시 찾은 빛-열림'이라는 주제로 공연을 앞두고 있다.모두 '한 사람들'의 이야기깨어있는 한 사람들의 묵직한 '한 걸음들'이 역사를 바꿔왔다.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만세를 부른 사람들이 있었고, 격문을 써 내려간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이 곧 한울님'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목숨을 걸고 죽음 앞으로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다.일제강점기를 굳건히 살아낸 그 '한 사람들'은 다음 세대들에게 다시는 이 슬픈 비극의 역사를 쓰지 말라고 가르쳤다.낯선 땅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된 사람들을 기억하며 만든 곡 <조선인의 발-1923관동대지진 사진첩에서>, 백운산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병들에게 격문을 써 내려간 황병학, 일제강점기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움과 비통함, 그리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시로 쓴 이육사, 윤동주를 노래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던 동학으로 거슬러올라가 동학의 지도자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의암 손병희의 이야기를 담은 곡 <천명, 수운 최제우>, <빛이 된 사람 해월 최시형>, <겨레의 가슴 손병희>를 노래로 만나본다. 지금 이 시대, 왜 역사를 되짚어야 하나공연의 연출을 맡은 신채원 작가는 "청산되지 못한 이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친 시민들의 얼굴을, 분단된 조국에서 부모와 형제,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통곡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세를 부르며 맨주먹 불끈 쥔 사람들의 외침을, 내 나라, 내 땅에서 말과 글을 잃은 식민지 조선 어린이들의 눈망울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며 지금 이 시대 역사를 되짚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왜 동학인가, 왜 한 사람들인가 투쟁과 혁명의 역사는 깨어있는 '한 사람들'의 한 걸음에서 시작되었듯 동학은 수운 최제우의 깨달음에 의해 창도되었다. 시 빛이 된 사람 해월 최시형은 동학이 세상을 밝혀 준 빛이 되어준 것처럼 민중들의 삶 속에서 약자를 돌보는 따뜻한 스승이었던 해월 최시형을 그리며 쓴 시에 곡이다. 여기 길 떠나는 한 사람이 있소.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소. 환한 달빛 고루 비추는 바다 해월, 사람이 한울이라 했소. 어찌하여 한 시도 쉬지 않는 거요. 이보게 한울님도 한 시를 쉬지 않는다네. 산새도 풀벌레도 쉬지 않고 날아간다네. 사람이 한울이라 했소. 몰아치는 민중들이 굽이치는 광야를 피로 적시던 밤 바람되어 춤추는 넋이여, 당신이 꿈꾼 세상 어디쯤 나도 있습니까. 사람과 하늘 만물 앞에 온 몸으로 빛이 된 사람 사람이 한울되는 세상 향해 한없이 걷던 사람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저 바다를 공평히 비추는 찬란한 빛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빛이 된 사람 해월 - 빛이 된 사람 해월 최시형 中, 신채원 시 / 문진오 곡 1923 관동대지진 100년의 의미 노래에 담아 ... 1923-2023, 100년의 기억 - 올해는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100년이 되는 해이다.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1923년 동경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진 틈에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조선인에 대한 분노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려 군대와 경찰, 일반 민중들에게 조선인을 학살하게 한 사건이다.100년이 흐르는 동안 일본 정부는 사과도 진상규명도 하지 않았으며 한국 정부에서도 이를 요구한 바가 없다.100년간 은폐하고 부정해 온 역사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노래를 통해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내고자 이번 공연에 의미를 담았다. '쥬고엔 고쥬센/ 아들아 기억하지 쥬고엔 고쥬센/ 물려받을 것 없어/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에게 사람이 죽어간이 날의 역사를 물려받은/ 너희 가엾은 후손끼리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안고 울어라-신채원 시, 문진오 곡 <조선인의 발-1923관동대지진 사진첩에서>- 가수 문진오는 이번 공연을 열며 "빛을 되찾는 광복의 의미를 담아 따뜻한 무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노래를 선보이고 싶다"고 밝히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발굴하는 일은 끝이 없음을 느끼며 이번 공연을 통해 깨어있는 '한 사람들'의 끈끈한 연대를 기대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열림'이번 공연은 8.15광복절을 앞둔 8월 11일 저녁 7시 홍대입구역 다리소극장에서 열린다. 동학에서 3.1운동, 관동대지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던 깨어있는 '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장을 찾는 깨어있는 '한 사람들'의 많은 관람을 기대한다. 일반석 50,000원 VIP석 100,000원 문의 010-8139-7008 3.1절엔 음반 독립운동가의 노래 발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노래로 만나다 2019년 3.1운동100주년, 임시정부수립100주년을 맞이하여 처음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노래로 만들어 음반을 발표했다. 이후 4년만에 낸 음반 <독립운동가의 노래 '결'>은 관동대지진 100년의 의미를 담았다. 관동대지진은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그리고 의병전쟁의 역사 속에 식민지 지배 문제로 이어진 사건이며 현재까지도 재일조선인 사회의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 부정의 시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의 진상규명과 다음 세대로 기억이 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고 음반을 발매했다.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노래하고 기억하는 뜻깊은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편 100년 전, 천도교는 당시 유학생 등과 이재동포위문반을 결성하여 희생자 조사를 하고 이를 <독립신문>에 발표했다. 그리고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1924년 1주기 추도식을 거행한 바 있다. -
『한국과 일본, 역사 인식의 간극』▪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관동대지진을 둘러싼 ‘일본인의 눈에 벗어난’ 한국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다 저자 와타나베 노부유키의 질문은 이렇다. “한국과 일본은 왜 역사를 두고 다투는가?”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영유권 등의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은 오랜 세월 갈등을 겪었다. 서로를 향해 혐한과 반일의 감정을 서슴지 않고 드러낸다. 왜 다투는 걸까?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역사 인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역사 전문 기자로서 40년간 일선에서 활동한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 사료를 찾아 나선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아래 일본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일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사실史實을 하나둘 찾아간다.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관동대지진에 얽힌 숨겨진 역사와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자신도 몰랐던 역사에 관해 놀라며 그는 거듭해서 이렇게 묻는다. “과연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까지 찾아내는 등 저자의 세밀하고 성실한 노력은 결국 결실을 거두었다. 이 책은 2021년에 일본의 퓰리처상이라는 불리는 ‘평화ㆍ협동 저널리스트 기금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 책의 시작은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 소송’을 둘러싼 한일 갈등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탐색이지만, 그 원인을 찾아가면서 숱한 의문점과 마주한다. 그 대부분이 한국인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모르거나 모호하게 아는 사실들이다. ‘불법적인 한국병합’ ‘동학농민전쟁의 의병 진압’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빨치산과의 전쟁’ 등이 그것이다. 기자로서 또 일본인으로서 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객관적이며 냉철하다. 이러한 입장과 자세는 어쩌면 한일 간의 역사 인식의 차를 좁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냉정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인 것 같다.” ▪ 일본인의 시야에서 벗어난 역사들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한일 역사 인식의 차이로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징용공 소송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의 골격이기도 한 ‘한국병합은 무효이자 불법’이라는 논리다. 이는 일본인으로서는 ‘헛소리’로 들릴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이태진 교수가 말한 병합을 위한 일본의 “분명히 계산된 지속적인 노력”이 무엇인지 사료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동학농민전쟁의 ‘의병’이란 존재와 마주한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은 191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간의 전투 횟수는 총 2,852회이며, 일본군은 1만 7,779명의 폭도를 살육했고, 일본군 전사자는 136명이었다.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1908년에는 1,451회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의병 1만 1,562명을 살육했다. 다시 말해, 1908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어딘가에서 매일 평균 4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30명 정도의 의병이 살해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얼마나 될까? 부끄럽지만 나는 몰랐다.” 그는 의병 토벌대로 참여한 한 일본군의 종군일지를 살피며 한반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되살려낸다. 다음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이 역시 많은 일본인이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다. 저자는 지진 재해 당시 소학교 아이들이 쓴 작문 등의 자료를 찾아 그 현장 상황을 생생히 복원한다. “많은 사람이 조선인을 다리 위에서 칼로 베거나 쇠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결국에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한 사람이 쇠갈고리로 놈의 머리를 찍어 나룻배로 끌어당겼어요. 마치 목재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중략) 쇠갈고리 한 방으로 이미 죽은 놈을 다시 칼로 베고 죽창으로 찔렀어요.”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농민전쟁과 관동대지진이라는 두 학살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아낸다. 그 가해자인 후비역 병사와 재향군인회 그리고 그들이 속한 자경단에 대해 당시 사회적인 상황과 연결하여 그 조직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렇게 말한다. “지진이 덮쳐 불안과 공포의 혼란 속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 재향군인에게는 박진감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언비어를 믿었다. (중략) 경찰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 자경단이었다. 치안 공백 상태에서 ‘민중의 경찰’로서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일에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살의에 차서 과거 한반도나 대륙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일본 내에서 재현했다. 그것이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기본적인 구도였던 게 아닐까?” ▪ 왜 일본인의 기억에 사라졌을까?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는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까? 저자는 개찬된 『청일전사』를 예로 들며, 정부와 군이 역사 “기록을 처분하거나 정사正史를 날조”했고, 그로 인해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에서의 조선인들의 희생은 일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말한다. 관동대지진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처분”되어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진 재해 직후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방침은 “정상참작을 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소요에 가담한 전원을 검거하지 않고 현저한 행위를 한 자로 검거 범위를 한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리하여 “모든 시와 마을 구석구석까지 폭동을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킨 민중에 의한 살해가 있었던” 요코하마시에서 조선인을 살해한 행위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으로 기록된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너무 많은 민중이 가해자였다. 지역사회는 누가 가해자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에게 죄를 추궁하면 엄청나게 큰 사건이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유독 악질적인 범죄를 제외하고는 학살은 없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도 군도 경찰도 그리고 민중도 일본 사회가 하나가 되어 은폐하고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며, 책임을 묻지 않고 반성도 없이 애매하게 방치하면서 흐지부지하다가 그냥 잊히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 ▪ 저자 와타나베 노부유키(渡辺延志)는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이다. 1955년에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2018년까지 아시히신문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아오모리시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 출현, 중국 시안 견당사 묘지 발견, 지바시 가소리패총加曽利貝塚 재평가 등 여러 특종을 보도하고 역사 자료 발굴에 힘썼다. 저서로 『허망의 삼국동맹(虚妄の三国同盟)』(2013), 『GHQ 특명 수사 파일(GHQ特命捜査ファイル)』(2018), 『가나가와의 기억(神奈川の記憶)』(2018),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関東大震災 「虐殺否定」の真相)』(2021), 『청일ㆍ러일 전쟁사의 진실(日清ㆍ日露戦史の真実)』(2022) 등이 있다. 이 책은 2021년에 일본의 퓰리처상으로 알려진 ‘평화ㆍ협동 저널리스트 기금상’ 대상을 수상했다. ▪번역자 이규수는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를 졸업했다.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전북대학교 고려인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수탈과 궁삼면 토지탈환운동』(2021), 『제국과 식민지 사이』(2018), 『한국과 일본, 상호 인식의 변용과 기억』(2014),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곡의 역사』(2007),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2007) 등이 있고, 역서로는 『시무(時務)의 역사학자 강덕상』(2021), 『다이쇼 데모크라시』(2012), 『일본제국의회 시정방침 연설집』(2012),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2006).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2000)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