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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늘의 대고천하-천지부모지난 11월 30일은 제가 전주교구에서 120주년 현도기념 특강을 한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고천하 – 천지부모>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20년 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것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과 혼란 속에서 선택한 비장한 결정이기에 오늘 2025년에 우리는 대중 앞에 뭘 선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정한 제목입니다. 우리 천도교가 연례행사로 치르는 기념식이 수도 없이 많은데 그중 하나로 현도기념일을 안일하게 다뤄도 될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줄어드는 이름뿐인 교구들과 늘어가는 시일식 빈 의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서둘러 선언해야 할 긴급한 과업이 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년여 만에 다시 전주교구로 와서 보니 참석자들이 많이 줄어있었습니다. 제가 고향 쪽인 경남 진주교구로 가기 전에만 해도 시일식에 20명 이상이 참석했고 지하에는 전용 식당도 있었는데 와서 보니 딱 8명이 참석했고 지하 식당은 없고 다른 단체가 입주해 있었습니다. 피아노 반주자도 없고 음향기기로 반주와 노래가 나왔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포덕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할 대고천하가 포덕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인 이 멋진 장소의 전주교구에 사람들이 가득 차는 것일까요? 아닙니다”라고도 했습니다. 120년 전 당시를 떠올리면 그렇습니다. 서기 1905년 11월은 대고천하 한 달 전입니다. 조선의 외교권이 빼앗기고 주한 외국 공사관도 모두 폐쇄된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습니다. 일본의 조선 지배 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는데 동학은 사도난적이니, 동학비적이니, 동학 것들, 동학당, 시천도, 활인도, 사술지무 등으로 불리며 탄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손병희 선생이 진보회를 만들어 근대화 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을 벌였으나 동학에서 뛰쳐나간 이들이 친일파와 손잡고 일진회를 만들어 노골적인 방해 활동을 벌이던 때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더 심각한 것은 일진회가 “나 친일파요”라고 하지 않고 손병희가 벌이던 갑진개혁운동인 단발과 의복 개량 운동도 했다는 것입니다.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동양끼리 뭉치자면서 일본과 손잡자고 그럴듯하게 백성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혁과 근대화도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전광훈 등의 태극기부대가 “우리는 친일이고 미국 숭배주의자요”라고 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러니 손병희의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동학 지도부는 다 처형당해 없지, 몇 년 가서 살아 보니 눈이 돌아갈 정도로 일본은 발전하고 있지, 대한제국이라고 이름표는 달았지만 조선 조정은 꼴이 말이 아니지, 동학한다고 어디 내놓고 말할 수가 있나. 동학 내부는 사분오열 일보 직전이지.. “당시 상황은 피가 마르고 숨이 막히는 시절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가하게 요즘 식으로 세미나도 하고 포럼도 열면서 천도교로 개칭을 하니 마니 할 겨를이 없었고 마른침도 없어 입술이 터지고 눈에 핏발이 서는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나 전두환의 파쇼정권 때 수배되고 투옥되고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야밤에 삐걱대는 대문 소리나 두런거리는 남정네 목소리만 들려도 맨발로 뒷담을 넘어 튀어야 했던 사람들은 압니다. 동지들은 의문사를 당해 시체도 못 찾고 날이면 날마다 투신과 분신이 일어나던 때를 숨죽여 살아 본 사람들은 압니다. 대고천하 당시 손병희의 처지와 심정이 어땠을지를. 당시에 사도난적으로 몰리는 거나 요즘 비정규직 문제나 보안법 폐지 또는 성소수자나 양심적 병역거부 주장을 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거나 똑같은 맥락입니다. 손병희는 동학을 부흥하자, 동학교도를 늘이자. 암자나 동학교도 집에서 만나지 말고 번듯한 건물을 하나 지어보자 등의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식 종교단체로 과감히 변신하면서 조직과 교리를 정비하고 수련과 민족운동을 새로이 펼쳐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특강에서 지금 이 순간 ‘천지부모’를 선포하자고 말했습니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니라’를 떠올리며 “이종진은 곧 전주교구요 전주교구는 곧 이종진이다. 이재선도 그러하니 이종진은 곧 이재선이니라”라고 읊었습니다. 하나 됨의 천지부모 사상은 우리 천도교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라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천지부모의 삶을 회복하자는 말은 무시무시한 선언입니다. 오늘날 개발과 발전과 효율과 편안함과 돈벌이에 중독된 세상 사람은 남을 경쟁 상대로 봅니다. 남을 눌러야 내가 산다고 압니다. 남보다 앞서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두 내 편리를 위한 소모품입니다. 이런 마당에 모든 생물과 물건을 다 내 부모님처럼 여기고 산다는 것은 천지개벽 그 자체입니다. 동물권, 식물권, 자연기본권(Plant Rights) 흐름의 완결판이자 기후 위기 해결, 탄소발자국 제로 운동의 종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준비해 간 <주식회사 에코샵홀씨>에서 산 고급 손수건을 참석자들에게 선물로 나눠드렸습니다. 전주교구로 돌아온 기념 선물이기도 합니다. 손수건은 화장실에서 일회용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식당에 가서 미세플라스틱으로 된 물티슈나 일회용 냅킨도 쓰지 말자는 것으로 천도교한울연대에서 하던 활동이기도 합니다. 저는 천지부모 개념을 웰다잉 운동으로 선포하자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의 죽음은 정말 구질구질합니다. 그 어떤 포유류나 영장류, 고등동물들도 인간처럼 지저분하게 죽지 않습니다. 평생 의료비의 반을 죽기 몇 년에 따 쓰고 자기 팔다리 마음대로 못 움직이고 자기 배변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남 앞에 가랑이 벌리고 기저귀 갈아 차는 인생의 말로는 천지부모의 삶을 살지 못한 인간들의 자업자득입니다. 치명적인 문명병입니다. 노인요양원과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인간 외 어떤 동물도 없습니다. 인간이 손대지 않으면 동물과 식물에 병은 없습니다. ‘삼매사(사마지마라니)’나 ‘살레카나’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락사나 조력사는 들어봤겠습니다. 그것이 합법화된 캐나다에서는 제법 고상하게 ‘죽음에 대한 의료지원 (Medical assistance in dying)’이라고 부릅니다. 자이나교의 ‘살레카나’는 우리의 ‘성령출세설’과 닮아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있으면서 맑은 정신 상태로 담담하게 (명상적)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껍데기인 몸을 벗고(성령출세) 본래의 영적 자리(잠겨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지부모의 자연순환 이치에 고즈넉이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등바등 소리 지르고 링거줄 붙잡고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긴 여행을 마친 순례자가 지친 몸을 누일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평화로운 저녁 노을빛 같은 모습입니다. 영이 적극적으로 드러나 형체 있는 삶을 살다가 영이 조용히 작용하는 섭리인 형체 없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두려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닙니다. 그런 임종을 우리 동덕님들이 맞을 수 있게 하는 방책과 수련을 마련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는 효과적인 포덕 활동이고 신앙심 확립이며 교구의 건실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호주의 원주민 아보리진족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스스로 깨닫는다고 합니다. 조용히 물병도 가지지 않고 사막 가운데로 가서 꼿꼿하게 앉아서 임종을 한다고 합니다.(좌탈입망). 천지부모의 삶을 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지지난달에 제가 아는 분도 스위스로 안락사하러 갔습니다. 가기 전에 조촐한 이별식을 했습니다. 4,5천 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대고천하 두 갑자를 맞는 오늘, 천도교에 신 대고천하 추진팀이라도 만들어야 할까요? 글, 목암 전희식(전주교구) -
[칼럼] 죽음 탐색, 죽음으로 만나는 삶나는 그즈음 지독히도 관념의 세계를 탐닉하는 기인 소설가의 책을 읽고 있었다. 『죽음의 한 연구(박상륭. 문학과 지성사. 2020)』였다. 올해만 두 사람의 자살과 참으로 소중한 한 사람의 죽음을 맞았던 터여서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일진당 정홍숙 님이다. 내 평생 남의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오열을 하고 장지까지 따라가서 통곡을 한 건 처음이다. 마지막이기도 할 것이다. 그만큼 내게 일진당은 각별하고 각별한 분이시다. ‘죽음의 한 연구’를 갈피마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읽는 도중에 또 하나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내가 아는 20대 청년이었다. 그 부모도 잘 안다. 그 지역에 강의하러 가면 그 집에서 자기도 했고 청년과는 식사도 했다. 기가 막히고 숨이 막혔다. 사람의 죽음은 천지 순환의 한 과정이라느니, 소멸은 없고 형상이 바뀔 뿐이며 모든 존재는 형상이 있고 없음을 넘나드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라고 들어왔다. 죽음에 대한 고담준론을 많이도 나눠봤다. 그러나 현실이 되면 다르다. 청년의 부모에게 위로 전화도 안 되었다. 전화를 꺼놓은 것이다. 새파란 자식을 자살로 보냈으니 전화나 문자마저 조심스러웠다. 며칠 지나서 연락이 닿았다. 또 며칠이 지나서 전화가 왔는데 나를 와 줄 수 있냐고 했다. 아파트로 들어가려는데 겁이 나고 울음이 바쳐서 못 가겠다는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목을 맸는데 같이 들어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날짜를 잡고는 먼 길을 네댓 번 차를 갈아타며 갔다. 나는 나름의 준비를 극진히 하고 출발했다. 말려뒀던 쑥을 양손으로 비벼가며 손질했다. ‘티베트 사자의 서’ 해당 페이지와 ‘성령출세설’ 전문을 인쇄했다. 향 대, 초, 쑥 차, 새 다기 세트도 챙겼다. 6시간여 가는 동안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우연히 버스에서 몇 년 만에 만난 분이 우리 어머니 49재 때 바라춤을 추신 분이셨다. 기차로 갈아타는데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그 순간에 죽은 청년의 부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변호사와의 상담이 늦어져 약속 장소에 한 시간여 늦겠다는 것이다. 나는 여유 있게 다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아파트로 가는 동안에 쑥 향을 피울 라이터를 안 가져온 게 생각나서 다이소 매장에 들어 라이터를 샀는데 장작 아파트에 들어가서 내 짐을 풀자 준비한 각 성냥이 나왔다. 내가 깜빡하고 성냥 챙긴 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냥으로 아무리 해도 불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사 간 라이터로 초와 쑥대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성냥 챙긴 것을 알고 라이터를 사지 않았다면 진혼 의례가 차질을 빚을뻔한 것이다. 식구들은 미리 만나 식사와 차를 나누며 위로를 했고 동의를 구한 방식대로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진혼 의식을 했다. 모든 절차가 잘 끝났다. 청년의 흔적이 있는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엄마는 눈물로 아들을 떠나보냈다. 불교의 ‘광명진언’인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를 108독 했다. 부모가 절에 아들을 모시고 매일 1000독씩 한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준비한 ‘성령출세설’ 독송은 하지 않았다. 진혼 의식의 준비과정과 진행을 하는 동안 나는 죽음을 살았다. ‘성령출세설’에 대한 걸출한 연구서인 오문환 님 논문을 다시 읽었다. 중앙대교당에서 한 라명재 님의 죽음에 대한 설교도 동영상으로 보았다. (https://youtu.be/GiG7PNrbqlE?si=y6mkA2H2sa2Zz_h_) 내가 6~7년 전에 ‘오마이뉴스 10만 인 클럽’에서 한 죽음 강의 자료도 다시 보았고 어머니 49재 때 우리 집에서 내가 준비해서 내 나름대로 했던 자료와 영상도 다시 들추어봤다(https://cafe.naver.com/moboo/4039?tc=shared_link) 지난 4월에 전생 연구가 박진여, 한국죽음학회 회장 최준식, 서울 의대 교수 정현채, 하버드 의대 이븐 알렉산드 등 종교·예술·의료인 50여 명이 한 <2025년 인간의 사후 의식 존속에 관한 서울 선언>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재작년 동대문구청에서 6개월 동안 진행한 노화와 죽음 잘 맞기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했던 경험도 소환했다. 인하대 의대 학장 임종한 교수와 공저를 냈는데 그때 내가 쓴 글도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와 49재였다. <죽음의 한 연구>는 바닷가 창녀의 아들인 ‘나’가 어느 선승에게 이끌리어 ‘유리’라는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살인을 하게 되고 그 살인으로 촌장이 되고, 이후 ‘유리’의 계율에 따라 다시 죽음에 이르는 길에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는 이야기이다. 죽음에 대한 완전한 완성을 꿈꾸는 박상륭 작가의 시도가 엿보인다. 우리의 삶이란 크게 둘로 보인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밝게 할 것인가. 또 하나는 어떻게 하면 죽음에 맞선 영혼의 구제이다. 세상에 열과 성을 다하되, 세상 너머의 초월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구원을 이룰 것인가. 박상륭 책은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깊은 회의를 바탕으로 영적 구원에 집착한다. 비운의 천재 작가 조선 중기의 김시습도 그랬다. 그는 꿈과 환상과 현실을 서정성과 역사성에 버무리는 신화 작품을 쓸 수밖엔 없었다. 우리는 오늘도 생과 사의 다리 위에서 몸부림친다. <죽음의 한 연구>에서 수도승 유리가 지독한 고행을 자처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작품에는 생명은, 녹색은, 영생마저도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 빛을 낸다는 철학의 대칭성이 있다. 일진당 님은 내가 어머니 모신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쌀독은 텅텅 비고 몸과 마음은 비렁뱅이처럼 너덜너덜해 있을 때 천사처럼 오셨다. 내가 사는 장계면 사무소와 동네 이장에게 떼를 써가며 내 집을 알아냈다. 경월당 님과 같이 바리바리 어머니 내의와 먹을거리와 돈 봉투를 들고 오셔서 나를 다른 방으로 가게 하고는 두 분이서 어머니랑 잤다. 밤 새 어머니 뒷수발을 다했고 나는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쪽잠을 벗어나 숙면을 했다. 내가 만 8년을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었던 힘이 되어 주셨다. 나는 그때 참 한울님을 만났다고 여긴다. 우리 어머니 49재 때 바라춤 추신 분이 청년의 49재 때도 같은 춤을 추기로했다. 한울의 삶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은 한울의 삶을 이어간다. 오늘도 그렇다. 전희식(목암. 진주 교구) -
[칼럼] 택배 기사 잘못으로 다 썩어버린 농작물 해결하기가끔 일어나는 택배 배달 사고. 누구나 한두 번은 겪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겪은 택배 사고에서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문제가 발생했고, 내 잘못은 없는 경우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다양한 견해도 재미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읽는 이의 이해가 쉽도록 조금 손질하여 쓴다. 정성껏 키워 보냈는데 다 썩어버렸다 내가 농사지은 자연재배 농작물(‘농산물’이 아니고 ‘농작물’이다. 농산물은 파는 것을 전제로 짓는 농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값을 정해서 꾸러미 농작물을 파는 것을 더 이상 안 하고 ‘선물경제’ 또는 ‘호혜경제’ 방식으로만 보낸다)을 보냈는데 며칠 뒤 당사자로부터 받은 사진은 모든 야채가 썩은 모습이었다. 자연재배 농작물은 포장 상태에서도 이삼일은 전혀 썩지 않는다. 당사자에게서 들은 자초지종은 이렇다. 우리 쪽 택배 기사는 수신자 전화번호를 잘못 적었다. 받는 쪽 택배 기사는 적힌 주소가 정확하고 잘 아는 집인데도 택배를 집에 갖다주지 않고 늘 하던 대로 근처 주유소에 갖다 놓았다. 택배가 왔다는 문자 고지가 수신자에게 가니까 늘 하던 대로 수신자가 주유소에 와서 택배를 가져갈 걸로 안 것이다. 그러나 문자 고지를 받을 수 없었던 수신자는 여러 날 지나서 주유소에 들렀다가 택배를 건네받은 것이다. 이러니 자연재배 아니라 뭣인들 이 더운 여름에 농작물이 썩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명상하는 모임에서 좋은 역할을 하는 수신자께 감사 뜻을 담아 내가 보낸 선물이었는데 이렇게 되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수련하는 천도교인으로 모심의 해법이 뭘까를 깊이 고심하게 되었다. 선물을 받게 되어 기뻤던 수신자에게서 의견이 왔다. 명백히 양쪽 택배 기사 잘못이니 책임을 묻고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쪽 택배 기사는 물론 택배 본사와 지사에 연락했는데 서로 발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울림이 컸다. 보상을 받으면 돈을 다 내게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그냥 받은 선물이었으니 그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그다음 말도 돋보였다. ‘우리가 윤석열 탄핵이나 제도 문제 등 큰일에는 잘 나서면서 소소한 개인 일상의 잘못은 귀찮아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사람의 피해를 미리 막는 뜻에서 문제를 제기하자’라는 취지였다. 시천주 해법을 발견하다 이때 나는 이것이 재미있는 놀이감이 되겠다고 여겨져서 온라인 모임 두 곳에 의견을 물었다. 하나는 상당히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모임이었는데 친절한 보상 절차와 썩은 농산물 사진 등의 준비물 목록을 올려주었다. 다른 곳은 명상하는 모임이었는데 자신이 겪은 여러 택배 사고와 처리 사례를 알려주었다. 내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는 글들이 많았다. 나는 명상 단체 카톡 방에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올렸다. 동학 이야기는 들어 보았겠지만 천도교는 잘 모르는 분들이다. 최근에 경주에서 열 다섯 명이 모여서 회비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고 발제자도 없이 온전히 한울님 감응하심에 내맡긴 채 너무도 잘 놀았던 모임이다. 나랑 새벽 수련을 5년 여 계속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요 며칠 저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했습니다. 썩은 농작물 배달 사고인데요. 여러 조언을 듣고 용기를 내서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1) 썩은 농작물을 받은 그분께 야채와 과일을 더 많이 담아서 오늘 다시 보냈습니다. 그분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편지도 써넣었습니다. 그분이 제 수고에 미안해하고 감사하는 걸 많이 느꼈거든요. 그래서 보상 얘기도 꺼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우리 쪽 택배 기사께도 썩은 농작물 사진과 함께 기사님의 실수를 이해한다며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번에 다시 보내는 택배 상자 위에는 사과주스 하나를 올려놓았습니다. 고의가 아닌 단순한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과중한 업무가 이런 실수를 낳았을 겁니다. 3) 이렇게 하니 안타깝고 억울했던 내 마음이 다스려지고 평화롭습니다. 이 무더위에 그 누구도 긴장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봅니다. 택배 기사의 실수도 줄어들 걸로 확신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내가 이 일을 당해서 나름대로 지혜롭게 처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 쪽 택배 기사가 원래 부부가 일을 했는데 4년여 전에 배달 과정에서 아내가 택배 트럭에 깔려 죽었다는 사실이다. 운전하던 아저씨가 택배를 갖다주려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안 채우고 택배물을 들고 뛰어갔는데 약간 경사진 길이었는지 트럭이 움직였고 조수석 아내는 엉겁결에 내려서 트럭을 막아서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택배 하나 배달하면 300원에서 500원 수수료를 받는다는 것도 알았고 택배 기사는 택배사 직원이 아니고 계약을 맺은 자영업자여서 택배 사고가 나면 배상을 직접 해야 하며 배달 사고가 자주 나면 택배사에서 계약을 해지 당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5,000원 달랑 내고는 ‘내일까지 내가 정한 그곳에 갖다줘’라는 계약상의 ‘갑’의 위치에 선다는 사실이다. 아미쉬 공동체의 큰 용서 사례 7월에만 택배 기사가 과로로 세 분이나 사망했다는 기사도 보게 되었고 그 원인 분석도 읽었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780.html), 로켓배송을 내세우는 ‘쿠팡’이라는 택배회사에서는 택배 분류작업 노동자가 끊임없이 사망한다는 기사는 여러 번 봤다. 사법적 처벌보다는 하워드 제어가 쓴 책 <회복적 정의>에 나오는 개념이 재범률도 낮추고 사회적 정의 실현의 바른길이라고 독서토론에서도 주장했고 내가 참여했던 대안학교 여러 사례에서 봐 왔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한 적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개인적인 일이라면 양보하고 참지. 그런데 사회적 파장이 큰 일은 다르다"라면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라든가 개인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이 문제다라는 말에 익숙해 있다. 이번에 나는 이런 공식을 깰 수 있었고 번잡했던 마음의 평화도 얻었고 사회의 정의나 공평도 실현했다고 자부한다. 특히 오래전에 알고 있았던 '아미쉬 공동체 내 총기 난사 사건 처리'를 다시 되짚어보며 큰 배움을 얻었다.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아미쉬의 원룸 학교에서 우유배달원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하여 5명이 사망하는 사건에 대해서다. 범인은 현장에서 자살하였는데 이 사건이 일어나자 아미쉬 공동체는 (뻔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범인이나 당국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키우지도 않았고 도리어 범인 가족을 위로하고 용서하였던 일이다. 충격에 빠져있는 범인의 아내를 직접 찾아 위로했으며, 범인 가족을 희생자 장례식에 초대하기도 했다. 아미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상 퍼플렉시티 ai 자료 참고) 참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 사실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의 억울함과 한탄과 슬픔, 분노를 없애는 신성한 제의라고 하겠다.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합당하고 온전한 것이기도 하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상대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는 문제도 해결하고 마음의 평화도 얻었다. 농작물 택배를 다시 받았을 뿐 아니라 위와 같은 취지의 내가 써 보낸 짧은 손 편지까지 읽은 그분은 앞으로 자기도 그렇게 하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번 택배 사고에 직·간접으로 관계된 모든 분이 상한 마음과 불안에서 온전히 회복되고 우리 사회에 ‘회복적 정의’가 실현되길 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윤석열 비상계엄과 탄핵 등에서 ‘회복적 정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모두가 치유 받는 해법은 쉽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우리의 과제다. 과도하게 분노와 조롱을 키우며 조회수가 많은 유튜버들은 경계하고자 한다. 상대의 잘못에 호통을 치고 비난을 자주 하다 보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 힘들며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어서다. 글 전희식(진주교구)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