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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 어떻게 준비할까?오늘, 출근길. 차창 밖,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들이 시야에 다가오며 온통 노오란 은행잎들로 세상이 물들 듯하였다. 아파트 주택을 벗어나고, 기념관 사무실까지 오는 동안만큼이라도 만추의 계절,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들, 울긋불긋 오색단풍들,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고 뽐내는 채송화, 봉선화, 들국화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가을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즉시 차 한 잔과 손에 턱을 괴고, 칼럼을 독촉하는 유난히 눈과 키가 큰 천도교신문 신채원 차장이 생각났다. 더 한소리 듣기 전에 후딱 써서 보내야지 하며, 컴을 열었다. 그 순간 컴 바탕화면에 꽉 들어찬 온갖 글들의 제목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글과 ppt가 완성된 것, 글을 쓰다가 만 것, 제목만 있는 것, 특히 해월 최시형 스승님과 관련된 학술토론회, 강연회 등의 글들이 눈에 팍 들어오면서, 또 해월 스승님 관련 칼럼을 쓴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생각나는 대로 쓰기로 했다. 얼마 전 천도교 종무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재선 전주교구 교화부장으로부터 가칭)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준비위원회 조직구성을 대충 설명들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오는 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에는 천도교인들만의 잔치가 아닌, 해월 선생의 사상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조직구성과 정책개발이 되었으면 한다. 그럼 무슨 정책과 콘텐츠로 기획할 것인가는 지면상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압축적으로 사전 준비 차원에서 우리가 연구하고 토론하고 기획할 내용을 열거해본다. 주제: [역사문화개념으로]<1.콘텐츠 정책과 방향, 2.콘텐츠 개발, 3.콘텐츠와 도시부랜링, 4.발굴과 활용, 5.스토리텔링 방법, 6.지역 스토리텔링, 7.설화와 스토리텔링, 8.축제와 콘텐츠, 9.공연과 콘텐츠, 10.영상과 콘텐츠, 11.스토리텔링 전략, 12.지역자원과 웹툰 등으로 기초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기념 행사를 기획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해월 스승님의 삶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지금 만약 해월 스승님이 나타난다면 과연 무슨 말씀과 어떤 일들을 하실까? 우리들은 과연 해월스승님과 같은 일들을 하나라도 하고 있을까? 해월 스승님은 아마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고, 오고갈 때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환경파괴 등으로 대멸종이 다가오고 있는 것에 교인은 물론 국내외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할 방법을 찾고 대국민, 대인류, 생명평화 운동을 하실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 기념은 기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과 실천을 궁리하고 몸소 직접 나서는 그런 일들을 해야 진정 해월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侍天主, 人乃天, 事人如天, 物物天事事天, 人吾同胞 物吾同胞, 등 敬天, 敬人, 敬物의 삼경사상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이다.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특별기고] 고부 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인가, 민란인가?최근 이희청 동학농민혁명 고부 봉기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희청 이사장의 전화 용건은 지난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을 일부 개정할 수 있도록 협력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희청 이사장에게 오래전부터 「동학농민혁명특별법」 개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고, 그 이전에 여러 명의 이사장이 교체되기 전부터 그 이야기는 들어왔다. 특별법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고부를 중심으로 정읍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동학농민혁명특별법」 개정에 대한 학술대회와 기자 회견 등을 통해 줄기차게 요구하는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다. 특별법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로 되어 있는 2조 1항이 문제가 된다. 이는 특별법에서 끝나지 않고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인용하고, 역사학자들까지 참고하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에서 1월의 고부 봉기는 혁명 이전의 민란 취급을 받고, 3월의 무장 기포(백산대회 포함)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럼 2013년 3월 17일 전문개정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1조와 2조 1항을 살펴본다. 제1조(목적)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國權)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ㆍ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1월의 1차 봉기인 고부 봉기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빠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2조 1항의‘3월의 1차 봉기’를 ‘1월의 1차 봉기’로 일부 개정하면 될 것 같지만 말 못 할 난공불락(難攻不落)이 있는 모양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차례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자는 물론,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논의를 해왔다. 특히 임형진 교수, 성주현 교수와 심도 있는 논의를 하다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제안한 1차 봉기, 즉 ‘1894년 3월의 봉기’를, ‘1894년 1월과 3월 사이의 봉기’로 수정 개정하자는 의견을 모은 적이 있다. 또한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유족회 포함) 일부 임원들에게도 1차 봉기를 3월로만 하지 말고, 1월과 3월 사이로 수정 개정했으면 하는 의견을 말했더니 그리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물론 전국의 50여 개 동학 관련 단체 임원들과 천도교 학자들도 대체로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왜 국회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을 개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 불가 사항이다. 고부 봉기가 민란이면 동학혁명도 민란이 된다 만약 ‘동학농민혁명’ 명칭문제에서 고부 봉기는 월경(越境), 즉 고부군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해서 혁명이 아니고, 무장과 백산 봉기는 경계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혁명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고부에서 시작된 혁명은 결국 무장으로 연결되었고, 무장에서 백산으로 연결되어 전라도 전역에 확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민란과 혁명을 구분한다면 갑오년(1894) 동학농민전쟁은 민란으로 보면 전국의 봉기가 모두 민란이고, 혁명으로 보면 전국의 봉기가 모두 혁명이다. 또한 전쟁으로 보면 전국의 봉기가 모두 전쟁이다. 혁명(革命)이란 무엇인가? 국가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여 정권(왕권)을 교체하는 것을 뜻한다. 성공하지 못한 혁명은 혁명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동학농민전쟁을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하면서 고부 봉기를 민란 취급한다면 자기부정에 빠지는 것이고, 고부 봉기를 혁명으로 보지 않으면 동학농민혁명의 명칭을 사용할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고육지책의 방안으로,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을 개정하여 1차 봉기를 ‘1월과 3월 사이’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필자 이윤영 부안포 직접도훈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관장 -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동학혁명기념관서 역사특강 진행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학생 70여 명이 9월 25일 오전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을 단체로 방문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방문에는 홍영의, 이재경 교수가 인솔해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기념관에서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첫 특강에서는 국민대 교수들이 동학 사상의 개요와 1차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 대해 설명했으며, 학생대표가 준비한 자료집을 낭독하며 이해를 도왔다. 이어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이 직접 나서 2차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의병전쟁을 주제로 강연을 이어갔다. 이 관장은 “1차 혁명은 반봉건 운동, 2차 혁명은 반외세 항일무장투쟁”으로 규정하며, 특히 2차 혁명의 항일독립운동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는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를 중심으로 한 폐정개혁안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자치시대를 열었다”며 그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그러나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여 고종을 사실상 포로로 삼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친일 내각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이 관장은 특히 일본군의 불법 경복궁 점령 사건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이 일본과의 전면 항전에 나서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전봉준·손화중 장군의 남접군과 해월 최시형·손병희 장군의 북접군은 해월의 총기포령 아래 일본에 맞선 항일전쟁을 선포했으나,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주력 부대가 대패하며 패배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장흥, 대둔산, 보은 등 전국에서 이어진 동학의병전쟁도 결국 막을 내렸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이 관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3.1독립운동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최근의 촛불 시민혁명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이 정신이 남북평화통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국회와 보훈부는 최시형,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내릴 수 있도록 입법과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특강은 학생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한 농민운동을 넘어, 항일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기사 및 사진 제공 전주동학혁명기념관 -
[칼럼] 천도교의 사후관에 문제를 제기한다필자가 근무하는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에는 남모르는,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올해가 동학혁명 131주년이니까 기념관이 건립된 시간이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나는 공사 총책으로 수시로 현장에 오가 가는 신분이었다. 만약 밤에 비가 오기라도 하면 한밤중에 재빨리 와야 했는데, 건물 지붕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아 조심 조심 지붕에 올라가 안전한지 살펴보다가 그만 가파른 지붕 경사 2층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 영락없이 중상 아니면 사망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울님’하고 소리쳐 불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뒤에서 미끄러지는 나를 꽉 잡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기어 지붕 정상에 올라 한숨을 쉬고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도 없었다. 기념관 개관 후 나는 책자를 3권 출간하였다. 그 집필시간이 기념관 퇴근 시간부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으니, 기념관 문 닫고 그곳에서 집필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새벽 1~2시경 전시관에 누군가 꼭 들어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나는 “스승님, 선열님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여쭙곤 하였다. 물론 모습과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또 기념관 전시실 문이 자동문이라 누군가가 가까이 와야 열리고 닫힌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뒤 자동문 혼자 열리고 닫히는 상황이 가끔 발생한다. 나는 일어서 문 앞으로 나가 두 손을 합장하고 “한울님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드린다. 물론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까 수운 대신사 경전에 한울님 하신 말씀 “귀신도 나이니라” 즉 귀신도 한울님 이라는 글귀가 머리를 스친다. 그럼 나는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속으로, 입으로 외운다. 천도교에서는 사후관 즉 개체영혼설을 부정한다. 그래서 일부 종교학자들은 천도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종교성립의 주요 내용 중에, 첫째 신의 존재, 둘째 교주의 존재, 셋째 경전의 존재, 넷째 교인의 존재, 다섯째 사후관의 존재 정도가 있어서 한다. 천도교는 사후관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다. 물론 향아설위와 성령출세설이 있지만, 명확한 개체 영혼설이라 말할 수 없다. 천도교가 과거의 영광 즉 우리나라에서 신도수가 제일 많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순수 종교적 신앙에서 교인수가 많았던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운동 즉 혁명운동과 독립운동 등 대중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상황이었다. 현재 정당단체나 사회단체처럼 그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 동참하게 하는 교정일치의 선두에서 대중들을 이끌어갔던 것이다. 현재는 솔직히 말해 천도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환원하는 사람들에 비해 새로 입교하는 사람들이 적으니 세월이 지남에 따라 현저히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도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기독교나 불교 등과 같이 현상유지라도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사후관을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 또 하나는 사회개혁 즉 통일운동, 환경운동 등 대중을 선도하는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현재는 둘 다 미미하기 그지없다. 나는 오랜 동학 천도교 수행한 사람으로서 인간의 사후관을 인정한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성령출세라는 다소 철학적인 사후관이 아니라, 타 종교처럼 개체 사후관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귀신이 내 앞에 나타나도 하나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귀신(보이지 않는 한울님을 뜻함) 또한 한울님이라는 수운 대신사님 경전을 생각하면 귀신이 다가오더라도 “모시고 반갑습니다. 한울님..”하면 그 귀신들도 나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특별기고] 이재명 대통령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대북정책 변화에 찬성, 천도교와 동학민족통일회도 남북평화교류에 앞장서야지난(2025.07) 28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은 이재명 정부에 대한 북의 공식입장을 담화형식으로 발표했다. 김여정 부부장은 ‘대조선확성기방송중단, 삐라살포중지, 개별적한국인들의 조선관광허용’ 등 한국(남한)의 이재명 정부가 조선(북한)과의 관계개선의 희망을 갖고 집권초기부터 성의 있는 노력을 인정했다. 또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실종된 평화의 복귀와 무너진 남북관계의 복원 등 강대강의 시간을 끝내고 선대선, 화해와 협력의 시간을 열어갈 것을 제안했다’고도 밝혔다. 그러나 김여정 부부장은 ‘최근에는 몇 달 후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 수뇌자회의에 그 누구를 초청할 가능성까지 점치며 헛된 망상을 키우고 있다’며, 이전의 윤석열 정부 때처럼 노골적인 비난은 삼가고 그래도 수위를 조절하여 비판한 흔적이 엿보였다. 남북의 신뢰회복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 김여정은 대남 담화문의 서론에서 긍정과 부정이 섞인 내용으로 흐르다가 본론에 가서는 남측과 관계개선의 뜻이 없음을 단호하게 천명했다. 강한 어조의 비판 내용은 첫 번째가 흡수통일의 본색에 대한 우려, 두 번째가 대규모합동군사연습, 세 번째가 돌이킬 수 없는 동족개념의 상실 등이다. 이러한 김여정의 담화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정 속에 긍정의 내용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했던 ‘흡수통일우려 해소, 한미군사훈련축소, 동족개념 복원’ 등에 대한 노력과 박정희,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했던 ‘조국통일3대원칙과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되살려 노력한다면 남북화해와 상생의 기회는 올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남북, 북미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을 촉구한다 남북의 평화와 교류에 있어 실질적인 진전이 있으려면 남북, 북미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에서 찾아야 된다. 그럼 그동안의 남북고위급회담과 정상회담을 살펴본다.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 19일 방북하면서 ‘3.8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란 유명한 말을 남긴, 남측의 김구와 김규식, 북측의 김일성과 김두봉의 일명‘4김 회담’을 개최했다. *1972년 7월 4일 남한의 이후락과 북한의 김영주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의 명의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을 대신하여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90년부터 노태우 정부는 8차례의 남북실무회담 등 남북고위급 회담을 개최 ‘남북기본합의서’를 창출했다. *1994년 6월 지미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핵 활동 동결’을 합의, 김일성 주석이 카터 전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으나, 동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관련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정부는, 1948년 남북분단이후 첫 번째 남북 최고 지도자 정상회담에서, ‘평화공존 인식의 체계합의, 이산가족상봉,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실시 등의 평화정착과 민간교류, 경제 활성화’ 등으로 합의된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2월에 '대한민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2년 5월 11일~14일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국회의원)는 3박 4일 일정으로 북측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남북정상회담을 개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하였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 남쪽 평화의 집에서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평화 정착, 남북관계 발전 등 논의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과 미국과 북한과의 정상회담 추진, 북미정상회담을 6월 12일 싱가포르 개최에 합의했다. *2018년 9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일행은 항공편으로 평양을 방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9월 평양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2018년 6월 12일 트럼프와 김정은의 북한과 미국 간 정상회담을 싱가포르에서 개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판문점 선언의 재확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전쟁포로 및 전장 실종자 유해 송환’ 등에 합의했다. *2019년 2월 27일~28일 트럼프와 김정은은 배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했다. 2019년 6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은 29~30일 오전 한미정상회담 이후 판문점으로 이동, 오후 3시 46분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났다. 북미 정상회동과 남북미 정상의 회동은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66년만의 기록이었으나 특별한 합의 내용이 없었고, 한반도 평화구축이라는 의미적인 교훈만 남겼다. 이처럼 남북, 북미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은 나름대로 큰 성과도 거두었고, 국내외 정세의 영향을 받아 흐지부지 되는 아쉬움도 많았다. 이제 이재명 정부 탄생 초기부터 북측(북한)에 대한 남측(한국)이 관계개선의 희망과 평화의 복귀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노력이 더욱 성숙해지만 남북 고위급 회담과 정상회담도 열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천도교와 동학민족통일회도 적극적 남북평화교류에 앞장서야 만약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남북 종교지도자, 종교단체도 교류에 앞장 설 것으로 내다본다. [국정원 등 북한 종교현황 참조] 특히 조선(북한)에 최대종단으로 알려진 천도교(동학)가 보다 적극적인 종교교류에 나서야 한다. 조선에는 천도교가 타 종단에 비해 신도숫자가 많음은 물론 ‘천도교 청우당’이란 정치단체가 있다. 천도교 청우당은 한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측의 국회의원에 해당)을 약 20여석 확보하는 등 노동당 다음의 제2당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천도교 청우당과 한국의 천도교 소속 ‘동학민족통일회’는 오랫동안 남북교류 파트너로 활동해왔다. 최근 천도교중앙총부(교령 박인준) 강병로 종무원장은 필자에게 앞으로 천도교 남북교류에 앞장설 것이며 최선을 다해 평화통일의 분위기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람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과 실천철학을 표방하는 천도교단이 남북교류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좌우 양날개짓으로 남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봐라! 끝으로 현재 남북관계가 꽉 막힌 현실에서 정치적인 정상회담 등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첫 번째로 이산가족 상봉 등 서로간의 고향방문 같은 인간적인 일들이 성사되어야 한다. 현재 조선(북한)과 한국(남한)만 서로 간 갈 수 없고 전세계에 모든 국가를 얼마든지 갈수 있다. 임진각에서 임진강 넘어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 좌우 양날개짓으로 남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봐라! 임진강 급류를 헤치며 남이든 북이든 넘나드는 물고기들을 봐라!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 철책으로 남북을 가르고 분단의 벽으로 남북을 오갈 수 없는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 놨다. 자! 이제, 남북통일이라는 거창한 담론보다는 남북교류라는 소박한 희망을 이루려는 자세로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사진,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칼럼] 2차 동학농민혁명 독립유공자 서훈, 국회와 국가보훈부에 건의한다일제친일부역자들이 못박아놓은 동학서훈불가의 망국적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관련단체 대표단과 국가보훈부 장관과 면담에,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 의장과 동학 독립유공자법개정안 대표발의한 강준현 민주당 정무위 간사, 윤준병 의원, 민형배 의원께서 함께 하기로 하였다. 권오을 국가보훈보 장관 인사청문회가 지난 7월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렸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모두 발언에서 자신의 소신과 앞으로의 각오 등을 거침없이 발표했다. 그중에서 눈여겨 볼만한 두 가지 사항을 먼저 소개한다. 보훈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다 “···독립호국, 민주의 역사를 아우르는 보훈이야 말로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불식시키기 위해 독립유공자 및 유족에 대한 예우 강화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사항을 특별히 소개하는 이유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야 하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동학 1차 봉기는 반봉건 민주의 역사요, 동학 2차 봉기는 반외세 독립호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는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 중에 일부를 빼고 대다수가 3대가 망한다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 보훈부에서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흥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의 기점이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강준현 의원(더불어민주당 정무위간사, 세종특별자치시 세종을)은 권오을 후보자 정책검증에서 다음과 같은 질의를 하였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을 ‘동학농민운동’이라 명칭 한 것은 중고교 교과서에서의 명칭을 참고) 참여자가 서훈 대상이 아닌 것 알고 계시죠?, 2차 동학농민운동이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권오을 보훈부 장관 후보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강준현 의원께서 사전에 서면 질의를 해서 여러 관계자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또 관련 학자들의 견해도 찬반이 있고, 그동안 서훈심사에서도 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관련 단체나 학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자문을 구할 것이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지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특별법에 2차 봉기는 항일무장투쟁이라고 분명하게 적시) 제정 때 동참한 사실이 있습니다.” 강준현 의원은 재차 질의에서, “1895년 을미의병은 서훈의 대상이 되고, 이보다 1년 앞선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은 서훈 대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긴 시차도 아니지만 을미의병과 동학의병을 시기로만 보지 말고 일제의 국권침탈이라는 것에 항거한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은 항일무장투장에 있어 같은 명분 즉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권오을 장관 후보자께서 장관이 되시면 꼼꼼하게 살펴보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권오을 장관 후보자는 “꼼꼼하게 살펴보겠다.”고 약속하였다. 권오을 보훈부 장관 취임 후 면담 약속 권오을 장관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과 같이 특별한 희생에는 그에 걸맞는 특별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에 정부와 학계의 그간 입장과 검토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향후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히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권오을 장관 후보자는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보훈부 장관에 임명하면, 그 후 시간을 내어 필자(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관련단체 대표단과 면담을 갖기로 하였다. 보훈부 장관과 면담예정 소식을 접한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 의장, 강준현 민주당 정무위 간사(동학법대표발의), 윤준병 의원(동학법대표발의) 민형배 의원(동학법대표발의) 등이 함께 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세 번에 걸쳐 동학 서훈을 신청 필자는 지난 2023년 5월 국가보훈부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 "활동내역에 있어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의 사유로 포상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2024년 8월 동학농민혁명13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부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 즉 서훈을 신청했었으나 보류되었다. 이러한 두 차례의 보류판정을 받고 2024년 3번째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 즉 서훈신청 3심을 요청했으나 역시 보류되었다. 세 번에 걸친 재심 신청에 "전봉준 선생 등 독립운동 활동내용이 불분명해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제외"했다고,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결과를 통보받았다. 전봉준 선생의 공적심사 결과는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으로 되어있다. 독립운동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국가 즉 일본에 종속된 우리나라의 식민지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1910년 8.29일 경술국치, 즉 한일병합에 의한 국권상실 이후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과정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 1945년 8.14일 해방 직전까지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어야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하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했거나,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말한다.'로 명시하고 있다. 1894년 동학의병과 1895년 을미의병은 똑같이 서훈에 적용되어야 한다. 일제의 국권침탈은 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乙巳勒約)부터라고 보고 있지만, 법률에서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 그 시기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특히 1962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내규에 독립운동의 기점을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 정해놓았고, 현재까지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서훈에서 제외시키고 있다.이러한 차별적인 법률적용은 평등권을 침해하는 헌법위반이며, 6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1895년 을미의병은 되고,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은 안 된다는 것은 반 헌법적이며, 을미의병 서훈 145명도 자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법률적용을 시정하려면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서훈의 기점을 1895년에서 1894년으로 내규를 바꾸던지, 아니면 국회에서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에서,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를, 1894년 일제의 국권침탈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로 독립유공자 예우법을 일부 개정해야 된다. 그리고 현재 발의된 국회 정무위에서 독립유공자법 일부개정안 의결이 힘들면 국회 문체위에서「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일부 개정하여, 일제친일부역자들이 못박아놓은 동학서훈불가의 망국적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이제 130여년이 지난 지금 이재명 국민주권정부는 동학의병들에 대한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 희망의 역사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등 역사적 사실 적용해야 이와 같이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를 개정하고자하는 명분은, 지난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에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명확히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1894년 동학혁명군총대장 전봉준이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병 동참을 호소하는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과 일제의 경복궁 점령과 국권침탈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1895년 '전봉준 공초록과 사형 판결문'을 참고하면 될 일이다.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낭설 반박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간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 중에 하나인 동학유공자 예우에 관한 세금문제이다. 최근 분석한 유족이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대략 481명(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년 전에 자료제공)으로 집계됐다. 이는 일부에서 반대급부로 주장하는 엄청난 세금이 들어간다는 허위주장을 반박하는 참여자 숫자 통계이다. 또한 독립유공자 심사과정이 까다롭고 자격의 유무를 엄정하게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 서훈을 한꺼번에 확정하지 않고 연간별로 나눠 결정하기 때문에 국가예산규모도 큰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3.1독립운동 참여자 서훈도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연차별로 독립유공자 포상 즉 서훈이 이뤄지고 있다. 끝으로 오늘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과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그동안 윤석열 정부에서의 보훈부 장관들과는 다른 동학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한 입장을 알았다. 그래서 실망이 아닌 희망을 갖기로 하였다. 내가 존경했던 김근태 선생의 말씀과 우원식 현 국회의장이 즐겨 말하는 어록을 하나 소개하면서 마친다. "희망은 힘이 세다." 사진,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