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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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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귀일체가 필요할 때(1)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

  • 편집부
  • 등록 2024.01.05 15:03
  • 조회수 8,876
  •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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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2시간 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부산으로 향하며 걸음걸음 걷는 땅,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역사가 보였다. 먼 이야기가 아닌,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늘 걷는 땅은 어제와 다르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렇게 역사의 한 획이 된다. 그 선명한 줄기를 따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드는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난다.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천도교신문 : 부산시교구 박차귀 교구장님 반갑습니다. 교단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헌신해오셨습니다. 천도교신문에서 교구장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박차귀 교구장 : 반갑습니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어찌 보면 천도교가 내 삶의 전부라고 얘기할 정도로 저와 천도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숙명적인 관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더불어서 살아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도교신문 : 천도교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천도교인으로 사셨습니다. 어릴 적 이야기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릴 때 기억나시는 장면 같은 것 있으세요?

박차귀 교구장 : 우리 집에 제일 많은 건 책이었어요. 제가 어린이 책 귀한 줄도 모르고, 학교에서 옛날에 헌책 가져오라고 해서 어린이 책을 하나 갖고 갔더니 선생님이 보시고는 너무 좋아하는 거야. 나는 선생님이 좋아하시니까 저리 좋아하시면 또 갖다 드려야 되겠네하고 갖다드렸지. 나중에 그 책이 천도교에 대한 책이었다는 걸 알고 많은 후회를 했죠.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환원하시기 전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소고기가 귀했어요.

우리 집 밑에 유명한 갈비 집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때 갈비를 사가지고 오셔서는 무릎에 저를 앉히고 이렇게 먹여주더라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유독 저를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내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가 일찍 가버렸어. 그러고 나니까 저를 아주 귀하게 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이름이 버금 차, 귀할 귀 자예요. 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가 벌써 70년이 흘렀네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께서 부산시 교구를 설립하신 박찬표 선생님이시지요.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시겠어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는 제가 학교 초등학교 막 들어갈 때쯤 환원을 하셨어요. 1월 28일이었어요. 가장 추운 날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참 추웠다는 것과 교구에서 교인들에게 특별 동계수련을 지도하시다가 환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련에 너무 열중하셨던 것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만 요즘 같으면 좋은 보약도 좀 잡수고 했더랬으면 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찍 가셔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써놓은 일기책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돼 있어서 제가 해독을 못 했어요. 언젠가는 책을 만들어 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박찬표 선생님은 우리 역사에서도 아주 의로운 일을 하셨던 독립운동가로 기록되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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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암 박찬표 선생(1898-1954)

 

신인간 통권 582호(포덕 140년 2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암 박찬표 선생은 3.1운동 당시 보성학교 2학년 시절,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와 부산교도소에 수감된다. 이후 26세 때인 포덕63년 3월 17일 묵암 신용구 선생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한다. 이후 조국 독립의 길과 진실한 삶이 천도교에 있음을 깨닫고 천도교의 불모지인 부산에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씨앗을 뿌리내린다.(성주현, ‘부산 지역에 천도교를 심은 인암 박찬표’, 신인간 582호, 1999)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보성전문학교 다닐 적에 독립 3.1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발각되어서 구치소에 계셨어요. 국가기록원에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그 기록도 좀 더 조사하고 보완해서 책을 발간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잡지들이나 저서들은 할아버지께서 남겨놓은 책들로 영인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신인간』, 『개벽』, 『당성』 등으로 대표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우리 천도교에서는 소장자와 기증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아버지께서는 천도교의 발전을 위해 누구든지 와서 보고 가라고 하셨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보고 가시는 걸 제가 봤습니다. 어릴 적에 부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들이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보셨고요.

서울 중앙총부의 신인간에 계시던 분들도 많이 와서 그 책들을 보고 가셨고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교단의 책들을 잘 모아놓으셨기 때문에 영인본을 낼 수 있었다는 것에 저는 참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소중하게 소장하셨던 분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천도교신문 : 선생님은 어릴 적에 할아버님을 많이 따르셨나요?

박차귀 교구장 : 예. 제가 어릴 적에는 조금 활발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어느 교인 집에 순회를 가시면 제가 꼭 따라갔어요. 손잡고 따라간 기억이 나요. 오늘은 어디 어디를 가자 하시면, 제가 그냥 앞장서서 가는 거예요. 골목골목을요. 그럼 할아버지가 잘 찾는다고 참 좋아하셨어요. 그러면 나는 그 칭찬에 더 신이 나가지고 매일 할아버지가 가자 하시면 따라갔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참 잘했다, 수고했다 하시면서 벽장에서, 옛날에 그 박하사탕 같은 걸 벽장에 두셨거든. 그 사탕 하나 주시는 거, 그게 그때는 귀할 때니까 그거 하나 먹는 재미로 기분 좋게 다녀오곤 했습니다.

또 옛날에는 차가 별로 없어서 걸어 다녔을 때거든요. 우리 천도교인들은 흰 도포자락을 펄럭이면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다니셨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아버지랑 순회를 갔다오면, 할아버지는 저에게 “너는 참 어찌 그리 기억력도 좋냐” 하시면서 참 대견해 하셨어요.

 

천도교신문 : 할아버님의 손녀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정말 할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참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박차귀 교구장 : 할아버지께서 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그때 마당이 있었어요. 그러면 제가 그 마당을 막 뛰어다니고 그런 기억이 있죠. 너무 일찍 가셔서 그 뒤에 추억이 없는 게 좀 아쉽습니다. 정말 더 오래 사셨더라면 저하고 많은 추억을 남겼을 텐데 말이죠. 저는 항상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단명하셨거든요. 다행히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나이보다 훨씬 더 이렇게 오래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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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신문 : 교구장님께서 여성 교구장님이시고 또 여성회장도 역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도교 집안 여성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박차귀 교구장 : 우리 할머니가 천석꾼 집안의 딸이었는데 할아버지한테 시집을 와서 천도교 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대요. 그런데도 불평, 불만 한마디 없이 그렇게 따라주는 것이 내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정말 성내는 얼굴 없이 내조를 잘 하셨다고 해요.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일찍 환원하셨는데 할머니가 우리 부산시 교구 초대 여성회장을 하셨지요. 지금 우리 부산시 교구 여성회가 80년이 더 되었거든요. 지방 교구 중에는 여성회가 빨리 창립이 됐죠. 할아버지의 영향인 것 같아요. 초대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그 뒤로 다른 분이 여성회장을 하시다가 우리 어머니가 여성회장을 하셨어요. 제가 고등학교가 다닐 때였지요. 서울에서 중앙위원회가 있으면 내가 어머니 대신 부산시 교구 대표로 서울에 올라가곤 했어요.

우리집 여성들은 고생을 많이 하셨죠. 손님들이 참 많이 오셨어요. 지방에서 오시는 교인분들이었죠. 그때는 여관이 별로 없었으니까 교인분들 오시면 할머니나 어머니나 고생하셨지. 늘상 교인들 밥 해드리고 대접해드리고 그러셨어요. 어머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88세에 환원하셨습니다만, 양반집 귀한 딸이었는데, 고생을 좀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인물이 참 좋았어요.(웃음) 요새 젊은 사람 같으면 아마 그렇게 살아라 해도 못 살 거야. 나도 그렇게는 못 할텐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떤 어려움도 내가 이겨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천도교를 잊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요.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셔서 저도 열심히 그 뜻을 받들어서 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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