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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선생 생가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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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일 선생 생가터를 찾아서

  • 편집부
  • 등록 2023.06.22 15:26
  • 조회수 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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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 원북면 옥파로 199-7번지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지의 주소다옥파沃波는 선생의 호로 옥지 파안’, 강변에 옥토와 같은 땅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생이 태어나 15세까지 자란 생가 터 주변은 과거에 닻개라는 지명으로도 불리었다. 배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포구라는 뜻이다. 선생이 살았던 시절에는 태안군 북이면 정포리로 불리었으며 지금은 닻개의 하류 약 2Km지점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나 과거에는 왕래하는 선박이 태풍 등을 피하여 정박할 수 있는 천혜적인 좋은 포구로서의 그 역할을 다하였던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큰 뜻을 품었으리라.


이종일02.png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파 이종일 선생

충청남도 기념물 제 85호로 1986년에 준공한 생가 복원지는 건넌방, 안방,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선생의 생가 복원지에서 찾을 수 있는 선생에 대한 흔적은 대들보뿐이었다. 태안군에서는 이종일 선생을 비롯한 문양목 선생 등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과 민중계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을 기리는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선생은 1858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의 닻개에서 성주 이씨인 교환敎煥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한학에 눈을 떠 머리가 명석하였다. 천도교에 입교(1905)하여 묵암默菴이라는 도호를 받았으며 필명으로 천연자天然子, 중고산인中皐散人, 중헌中軒이라 하였다. 15세때 상경하여 다음 해에 문과에 급제 하였다. 후에 1882년 박영효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당시 일본사회의 개회된 실상을 목격하고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989년 대한학자인 김윤식 선생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인연을 맺은 이종일 선생은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을 펼치며 언론인으로서, 교육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계몽운동가로서 여성해방운동을 주장하기도 했던 선각자였다.

  

동학도가 되고 천도교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글 보급에 앞장서 한글로 된 제국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보성사 사장으로서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3·1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이후 선생은 1920년 조선총독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2112월에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22년 자주독립선언문(2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어 압수당했다.

나라를 잃은 절망의 시절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은 1925년도에 아사로 순국하였다. 1960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은 선생에게 건국훈장복장을 추서하였다.

여기까지가 선생의 삶을 정리한 기록이다. (선생의 생가를 발견하고 복원지 건립, 선생의 삶을 재조명하고 연구한 박춘석의 저서 <옥파 이종일>(2008, 태안향토문화연구소)에서 참고)

이종일생가.png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종일

기념관에는 선생의 업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한식 건물로 지어진 내부전시실에는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느낄 수 있는 묵암 비망록와 옥파 전집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이곳을 찾는 학생들에게 태극기의 4괘를 찍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언론인으로서의 선생은 독립신문에 논설을 담당하며 언론활동을 시작하였고 개화와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고자 1898년 제국신문 창간하였다. 경성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경향신문, 대한매일신보, 대한민보, 천도교회월보 등에서 언론활동을 펼쳤다.

교육구국운동과 국문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898년 흥화학교와 1901년 국문학교 설립에 참여한 선생은 1894년 이미 보성보통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보성학교, 보광학교, 흥화학교 등 7개교 교장을 역임하며 교육 사업에도 헌신하였다. 순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차안하고 전문교육기관인 국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옥파의 국문사랑 정신은 1907년 학부의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에 임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3언문의해를 저술하고 국문연구의 구체적 방법으로 천지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동학의 보국안민 사상과 평등 인문주의를 주목하고 민족종교의 위국적 이념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파악하여 1906년 천도교에 입교, 제국신문 등이 폐간되자, 1910년 천도교회 월보과장과 보성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천도교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게 된다. 동경대전, 대종발원설 등 동학을 기반으로 개화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동학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여성해방론, 남녀평등론을 주장한 선생은 자녀교육의 주체인 어머니로서의 소양을 기르고 사회활동을 위한 지식을 체득하는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858년에 태어난 선생은 19193·1운동 당시 환갑의 나이였다. 민족대표 33인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큰 뜻을 품은 선생은 동학에 입교 후 천도교 조직을 이용한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가슴에 큰 뜻을 품었으니, 어제의 당신이 오늘의 우리에게

사당에 걸린 그림을 통해 선생의 눈을 본다. 선생의 눈빛이 아직도 펼치지 못한 독립운동의 꿈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을 만들던 선생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 우리를 있게 했다고. 선생은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생존한 후손이 없어 업적을 밝혀내는 일도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선생이 품었던 큰 뜻은 10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

1979년 선생의 생가를 박춘석(대안여상 교장)이 발견해 옥파이종일선생추모업원북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사당을 건립하였다. 생가터에는 선생의 순국일인 매년 831일 추모제향과 3·1절 기념행사, 현충일 추념식 등을 거행하고 있으며,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숭고한 애국사상을 알리고 있다.

이종일03.png 

 사진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제공 @최인경


이종일 생가 터 :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

 

 

* 이 글은 천도교중앙총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에서 발행한 매거진 <동학집강소>에 게재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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