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8 (월)
지난 8월 14일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의례를 마친 뒤 무대에 오른 문화공연은 많은 교인에게 오래 남는 감동을 주었다. 판소리 〈흥보가〉의 흥에 이어, 『해월신사 법설』을 가사로 삼은 창작곡 〈수심정기〉, 천덕송 가운데 민족적 선율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영부의 노래〉가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온 장내가 함께 부른 〈진도아리랑〉이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한 이는 북한 토속민요 연구와 천덕송 창작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정수당(正守堂) 김정희 동덕(영등포교구)이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뒤늦은 음악 공부, 육아와 생계를 모두 감당해야 했던 삶의 조건 속에서도, “언젠가는 작곡가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북한 민요 연구와 동학 천도교 음악 연구, 천덕송에 대한 고민과 창작은 그에게 단순한 직업을 넘어 ‘천도교인으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김정희 동덕이 작곡가로서 젊은 세대의 천도교인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리고 천덕송의 내일에 관해 그의 인생사와 함께 들어본다.
“연주자와 관객이 하나 되는 동귀일체, 그것이 천도교 음악”
문. 제162주년 지일기념식 후 문화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셨습니다. 의례 이후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문화적 장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기획 단계에서 가장 고민하신 부분은 무엇이었으며, 천도교 정신을 무대 위에 어떻게 담아내고자 하셨는지요?
답. 천도교가 ‘민족종교’라면 음악 문화에서도 그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첫 곡은 우리 전통 성악의 대표 장르인 판소리,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흥겹고 재미있는 〈흥보가〉의 ‘박타령’을 골랐습니다. 두 번째는 지일기념일의 의미를 살려 『해월신사 법설』 〈수심정기〉 일부를 가사로 삼고, 중모리장단에 창부타령조 선율을 입혀 제가 작곡한 곡 〈수심정기〉를 올렸고요, 마지막 곡은 천덕송 중에서 전통 선율을 가장 잘 구현했다고 보는 〈영부의 노래〉를 선택했습니다. 앵콜곡은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진도아리랑〉으로 마무리했고요.
무대를 만들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동귀일체(同歸一體)’였습니다. 연주자는 연주만 하고 관객은 듣기만 하는 구조가 아니라, 추임새도 넣고 같이 따라 부르면서 연주자와 청중이 한마음이 되는 공연 말입니다. 우리 전통음악은 본래 그런 문화였고, 저는 그 전통이야말로 천도교의 시천주, 사인여천, 동귀일체 정신과도 잘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엄마와 작곡가, 어린 시절 두 가지 꿈이 끝내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죠”
문. 선생님은 흔히 말하는 정규 코스를 밟은 음악인이라기보다, 여러모로 우회로를 걷다가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음악과의 인연을 간단히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답. 제가 기억하기로는 열 살 무렵 제 인생 목표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 두 번째는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서 『세광 애창 700곡집』이라는 노래책을 사 오셨고, 제게 악보 읽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그 책에 수록된 세계 각국의 동요·민요·가곡 악보를 보며 하루 종일 부르고 또 부르며 놀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 언어의 발음도 익히게 되었고, 악보를 보고 부르거나, 들은 멜로디를 악보로 옮기는 일이 제게 즐거운 놀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 음악 인생의 첫 출발점이었고, 이후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형편에도 1년 동안 피아노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피아노 외의 음악 공부는 모두 독학이었지요. 그러나 음악은 저에게 늘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재미’였습니다.
IMF, 해고, 재취업 실패… 그렇다면 지금은 공부할 시간!
문. 스무 살에는 공대를 선택하셨다가, IMF 시기에는 음악학원 교사로 일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음악 전공을 결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답. 삶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더군요. 대학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이후에는 공장에도 다녔습니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은 뒤에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정시에 출퇴근을 해야 하는 맞벌이를 하기가 어렵게 되어, 음악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격증이 없어 감사에 걸려 해고됐고, IMF가 겹치면서 남편의 직장도 불안정해졌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지금은 일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때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공부에 쓰자.” 마침 정년퇴직하신 친정어머니께서 연금 일부를 일시불로 받아 제게 보태주셨고, 그 돈으로 부산예술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작곡을 전공하려면 작곡과 피아노를 둘 다 배워야 했고, 작곡 레슨비가 너무 비쌌기에, 아는 언니에게 한 달에 일정액을 드리며 1년 반 정도 피아노 레슨을 받아서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한 학기 지난 후에 작곡 전공으로 바꾸었지요. 그때까지 화성법, 대위법, 음악사 등은 모두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는 육아와 살림, 공부를 동시에 감당해야 했기에 참 고단했습니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도 못 말린다”는 말처럼, 자발적으로 선택한 공부였기에 버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제가 나중에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자발성’의 힘을 몸으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토속민요에서 발견한, 난생처음 들어본 독창적인 아름다움
문. 선생님의 대표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북한 토속민요입니다. 이 분야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답. 국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던 시기에 황해도 토속민요인 <풍구소리>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선율이 너무 좋아서 “이 곡으로 작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북한 토속민요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석사 논문이 단 두 편뿐이더군요. 황해도 한 편, 함경도 한 편. 평안도 토속민요에 대한 논문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때 ‘이건 보물창고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토속민요는 한 집단의 음악적 모국어이자 삶의 기록인데, 분단과 세월 탓에 절반이 통째로 공백 상태로 남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북한 토속민요부터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한국민요대전』을 집대성하신 최상일 PD님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특강 자리에서 인사를 드리며 제가 “북한 토속민요를 석‧박사 과정에서 연구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선생님께서 “음원은 어디서 구할 건데?” 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이주민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모아보겠다”고 하니, “MBC에 이미 수천 곡이 들어와 있는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구하신 북한 현지 음원을 정리하고 계셨던 겁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기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엮은『북한 민요 작품집』
문. 그렇게 연구하신 북한 민요와 창작이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였지요?
답. 북한 민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2002년입니다. 그 이후로 논문을 쓰는 한편, 북한 토속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곡도 꾸준히 써왔습니다. 그러던 중 2018년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쏠리는 걸 보며 ‘이제까지 써온 곡들을 모아 한반도의 평화와 상생을 기원하는 첫 작품집을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까지 북한 토속민요를 바탕으로 한 곡이 일곱 곡 있었는데, 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의미로 한 곡을 더 만들어 여덟 곡짜리 작품집을 완성했습니다. 연주 시간으로 환산하면 65분이 조금 넘는 분량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첫 작품집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작품집입니다.
북한 민요에는 정말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어느 나라 노래와도 다른, 우리만의 음조직과 장단, 정서가 살아 있습니다. 그 음악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은 남과 북을 잇는 다리이자, 동학 천도교가 지향해온 만민평등과 평화의 이상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연기연>을 읽고 변증법이 떠올라 무척 놀라웠습니다”
문. 천도교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답. 부산예술대학에 다닐 때 <인간과 종교>라는 교양 과목이 있었습니다. 첫 수업 시간에 김용휘 교수님께서 “종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라고 물으셨고, 제가 유일하게 손을 들었습니다. “종교가 없어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성인들이 남긴 책도 있고, 양심에 비추어도 도리를 알 수 있는데 왜 꼭 종교가 필요한가”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지요. 그런 제가 동학 천도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건 바로 그 수업을 맡으셨던 김용휘 선생님, 그리고 같은 학교 교수님이셨던 김춘성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입니다.
『동경대전』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을 처음 공부하게 되었을 때 무척 놀랐습니다. “이게 변증법 아닌가? 헤겔 철학이 들어오기 훨씬 전인 19세기 중엽 조선에 이미 이런 사유가 있었다니.” 하는 놀라움이었지요. 이어서 해월 신사의 삼경(三敬) 사상,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같은 가르침을 읽으면서, 제가 평소에 중요하게 여겨온 좌우명들이 이 교리 안에 다 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경물(敬物)’ 사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물티슈나 일회용 기저귀를 거의 쓰지 않았고, 화악산수도원에서 화장실 쓰레기를 태우는 일을 하면서 일회용품이 남기는 잔해와 독성의 문제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만물을 공경하라’는 삼경 사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용담정 수련이었습니다. 당시 제 삶은 여러모로 바닥을 치고 있었고,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련을 하면 마음에 힘이 생긴다”고 권유하셔서 겨울방학 기간에 2박 3일 용담정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 시간 동안 비록 특별한 체험은 없었지만 ‘이 길을 계속 가면 내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련 둘째 날 “입교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고, 마침 제 생일 바로 다음 날이 제 입교일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천도교인으로서의 삶’을 저의 중심에 두게 되었습니다.
<불연기연> 등 네 곡의 천덕송으로 은사님 환갑을 축하하다
문. 천덕송 창작 역시 선생님의 작업 가운데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특히 포덕 157년(2016) 은사이자 전교인이신 김춘성 선생님의 회갑을 맞아 네 곡의 천덕송을 작곡해 선물하셨는데요, 그 사연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답.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나니 “전교인이 김춘성 선생님이신데, 나는 아직 선생님께 밥 한 끼 제대로 대접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환갑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선생님께 가장 기쁜 선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천덕송’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한울님께 마음속으로 “김춘성 선생님께 드릴 천덕송을 만들고자 하니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경전을 펼쳤더니, 맨 먼저 <불연기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첫 곡을 『동경대전』의 <불연기연>으로 정했고, 두 번째 곡은 힘든 시기에 제가 가장 많이 읽었던 대신사님의 <시문>, 세 번째 곡은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이 집약된 〈수심정기〉, 네 번째 곡은 『의암성사 법설』 가운데 〈진심불염〉으로 정했습니다.
집에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워 노트북과 경전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작곡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네 곡을 작곡하고, 국악기 편성으로 반주를 붙인 후 연주자를 섭외하고, 녹음과 편집, 믹싱, 마스터링까지 마쳤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너무 촉박한 일정이라 아쉬움도 남지만, 한울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추석 전날, 인사동에서 선생님과 단둘이 식사를 한 뒤 찻집에서 “선생님, 환갑 선물입니다.” 하고 그 음원을 들려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무척 기뻐하셨고, 그 순간 저 역시 “천덕송과 천도교 음악 문화에 내 삶을 더 깊이 바쳐야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다지게 되었습니다. 네 곡 가운데 특히 〈시문〉과 〈진심불염〉은 지금도 제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입니다.
"천덕송은 동귀일체를 이루는 노래이자, 평등·평화·생명을 담아내는 노래"
문. 음악 연구자이자 작곡가의 시선에서 볼 때 천덕송이 지닌 정신적·예술적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답.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말이나 글처럼 논리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혼의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느 집단이든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공동체 의식을 다져왔습니다. 학교에는 교가가 있고, 군대에는 군가가 있고, 국가에는 국가(國歌)가 있듯이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농부들은 들노래를 부르며 함께 땅을 갈았고, 어부들은 뱃노래를 부르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다투던 사람들도 같이 노래하며 일하는 동안에는 한마음이 되었지요.
천덕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천덕송을 부르는 것은 결국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이루고자 함입니다. 천덕송은 천덕사은을 노래하고, 동귀일체를 추구하며, 신심을 돈독히 하고, 깨달음의 기쁨을 표현하는 종교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약자와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평등과 평화에 기여하고, 어렵게 이룩한 민주주의의 열매를 더욱 공고히 하는 사회·역사적 역할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냉전과 분단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는 길에 힘을 보태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외되고 메마른 현대인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따뜻한 감성과 영성을 일깨우는 문화・예술적 역할 역시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것이 천덕송의 정신적·예술적 본질이라고 봅니다.
일본 노래에서 온 곡들은 이제 보내줄 때… 21세기 가치로 새 천덕송 지어야
문. 오늘날 교단 내부에서도 “천덕송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와 호흡하는 새 천덕송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답. 포덕 159년(2018), 『신인간』에 〈천덕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현재 부르고 있는 천덕송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짚고,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점은 몇몇 곡의 선율이 일본 노래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목적풀이〉는 일본의 〈철도창가〉에 노랫말만 바꾼 곡이고, 〈검가(기 2)〉와 〈배 떠나간다〉는 일본 특유의 ‘요나누키’ 단음계로 된 일본풍 노래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을 침탈하고 동학군을 학살했던 역사가 분명한데, 그런 노래들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오래 불러왔으니까 계속 부른다”는 태도로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측면에서도 교리·교사와 어긋나는 표현, 어법에 맞지 않거나 뜻이 모호한 구절, 품위가 떨어지는 내용, 현재 맞춤법, 띄어쓰기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정리가 필요합니다. 운율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 전통 시가의 기본 운율은 대체로 3·4조, 4·4조에 2음보인데, 7·5조에 3음보라는 형식은 일본 전통 시가에서 온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우리 고유의 리듬과 말맛을 살릴 수 있도록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천덕송은 21세기 인류가 함께 고민하는 가치들―생태·문화다양성, 상생, 인권, 연대, 복지, 평등, 평화 등―을 적극 반영해야 합니다. 이런 가치들은 수운 대신사, 해월 신사, 의암 성사가 가르쳐주신 바와도 직결됩니다. 동시에 전통 양식과 민족적 요소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도교 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면서도 다양성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방향에서 ‘내일의 천덕송’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 천도교의 서사와 민요의 서정을 만나게 하는 것이 제 작업"
문. 선생님은 북한 민요뿐 아니라 경기·서도·남도 등 다양한 민요를 연구하고 창작에 활용해오셨습니다. 민요 속에서 천도교 정신을 어떻게 발견하고 재현해내고 계신지,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주신다면요?
답. 제가 2016년에 작곡한 네 곡의 천덕송 가운데, 『의암성사 법설』을 가사로 삼은 〈진심불염〉은 전남 영광군 논매는소리 〈문여가〉의 선율을 주제로 삼아 만든 곡입니다. 두레 공동체가 함께 논을 매면서 부르던 그 노래에는 꿋꿋하고 유장한 선율, 서로를 북돋는 공동체 정서가 잘 녹아 있습니다. 저는 그 선율에서 의암 성사의 기상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 음형을 〈진심불염〉의 주제 선율로 삼았습니다. 민요를 바탕으로 새 천덕송을 짓는 작업이 제 첫 번째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연구 작업입니다. 포덕 162년(2021)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음악 양상과 문화콘텐츠로서의 잠재성’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국민요대전』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새야 새야〉 외에도 여섯 가지 다른 선율의 〈새야 새야〉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천도교와 관련된 노래는 그 수가 많지 않지만, 넓은 지역에 퍼져 있고, 비슷한 가사가 <논매는 소리>, <무덤 다지는 소리>, <정월 대보름 새 쫓는 소리>, <둥당애타령> 등 여러 갈래 민요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사례들을 찾아내고 분석해 논문으로 공유하는 것이 제 두 번째 작업입니다.
동학 천도교의 주체도 백성이고, 민요의 주체도 백성입니다. 저는 동학 천도교의 서사와 민요의 서정을 만나게 하고, 여기에 ‘지금 이곳’의 지향과 정서를 담아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민요는 역사성과 지역성, 시대성과 정체성을 모두 갖춘 새로운 천도교 음악 문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겁니다.
장구·단소와 함께 부르는 천덕송, 어린이에게는 ‘진짜 전래동요’를!
문. 앞으로 교단의 주요 의례나 행사에 민요적 요소와 국악을 더 깊이 접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구상을 하고 계실 줄 압니다. 민요의 서정성과 공동체성이 교단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답. 우선 우리 어린이들에게 ‘진짜 전래동요’를 돌려주고 싶습니다. 널리 알려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쎄쎄쎄〉, 〈여우야 여우야〉 같은 노래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일본 와라베우타(동요)입니다. 와라베우타는 대부분 2분박, 2/4나 4/4 박자가 많고, 특정 음으로 종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면 한국 전래동요는 3분박이 많고, 12/8 박자가 가장 흔합니다. 이런 차이를 바로잡기 위해 포덕 162년(2021) 서울우리소리박물관에서 『전래동요 자료집』과 음원을 제작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런 ‘진짜 전래동요’를 천도교 어린이들이 널리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덕송 가운데 〈영부의 노래〉, 〈지일기념가〉처럼 민요풍으로 작곡된 곡들은 피아노 대신 장구와 단소로 반주하면 훨씬 흥겹습니다. 장구와 단소는 이미 초등 교과 과정에도 들어가 있으니, 역량이 되는 교구에서는 유소년부를 활성화해 ‘장구·단소로 천덕송 연주하기’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요라는 보물창고를 잘 활용해 새 천덕송을 작곡하는 작업도 병행할 수 있겠지요. 이번 지일기념식에서처럼 교단의 각종 의식과 행사에 국악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중앙총부와 각 교구의 음악 문화도 점차 뚜렷한 정체성을 갖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제대로 된 우리 문화를 만드는 일이 곧 ‘천도교인의 길’
문. 안익태 애국가 문제 제기, 북한 민요 연구, 천도교 음악 연구 등 선생님이 다뤄온 주제들은 기존 음악계가 쉽게 손대지 않는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결국 천도교 음악과 문화적 자산으로 어떻게 연결될지요?
답. 한국 근대사에서 천도교는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뿐 아니라 『천도교회월보』, 『개벽』, 『농민』, 『신여성』, 『어린이』 등 다양한 잡지를 통해 대중의 의식과 문화를 선도한 주역이었습니다. 천일기념식, 어린이날 행사 등도 온 나라가 주목하는 문화행사였지요. 스승님들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하는 작업들은 제가 속한 영역에서 잘못된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으면서, 앞으로의 우리 문화를 ‘제대로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색이 짙은 곡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리 정서와 양식에 기반한 새로운 천덕송을 짓고, 한국적 색채와 천도교 정신이 어우러진 공연을 기획해 무대에 올리고, 동학·천도교와 관련된 음악 문화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나가는 일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결국 이 모든 작업은 ‘천도교인으로서의 행위’입니다. 제가 걸어온 길과 그 결과물들이 조금이라도 천도교의 문화자산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노래만큼 우리 노래도, 남의 학문만큼 우리 자신도 연구합시다”
문. 오늘날의 천도교인, 특히 젊은 세대 교인들에게 음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요?
답. 세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남의 노래를 듣고 부르는 만큼 우리 자신의 노래도 듣고 부르자는 것입니다. K-팝이 세계를 누비는 시대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의 민요와 전통음악, 그리고 동학 천도교의 노래들이 있습니다. 천덕송과 우리 민요를 사랑하는 마음이 곧 천도교 음악의 미래를 여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남의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는 만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연구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동・서양 철학과 음악을 두루 섭렵하면서도, 결국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 것이 동학 교리와 우리 음악이라고 느꼈습니다. 『동경대전』의 불연기연, 삼경 사상, 특히 경물 사상은 오늘날 생태위기와 인류 문명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큰 자산입니다.
셋째,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천도교인의 것이라는 점을 항상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제 삶을 돌아볼 때, 특별한 재능이라기보다 물욕이 적고, 의지가 강하고,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붙드는 성향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성향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것이 바로 천도교 신앙과 수련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남북한 민요 연구를 더 깊게 이어가고, 새로운 천덕송을 작곡하고, 제자들을 길러내며, 천도교 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남의 노래만큼 우리 노래를, 남의 학문만큼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연구할 때 천도교의 노래와 문화도 다시 한번 꽃피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노은정 전 편집장)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불연기연>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https://www.chondogyo.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75
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시문>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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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수심정기>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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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동덕이 작곡한 <진심불염> 악보와 가사 및 유튜브로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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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0일은 제가 전주교구에서 120주년 현도기념 특강을 한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고천하 – 천지부모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20년 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
"함께 써온 100년의 역사, 다시 여는 100년의 미래" 포덕 166(2025)년 11월 23일 신인간사 대표 휘암 윤태원
해월신사 지난 10월 칼럼에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포덕168(2027)년에는 천도교 세계화를 선언하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