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6 (토)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3.1운동의 정식명칭
3.1독립운동 90주년을 맞는 올해(2009년, 편집자)를 맞아 3.1운동의 이름이 제대로 되어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교과서에 3.1운동을 폭동이라 기술하였다하여 그 시정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일본은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폭동이란 이름을 버리고 3.1독립운동이라 고쳤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아직도 3.1운동이라 하면서 '독립' 두 글자를 넣지 않고 있다. 남들에게는 독립운동이라 부르라 해놓고 자기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3.1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 무궁화 꽃이다. 3.1운동은 또 우리 민족사에 구심점으로서 그 어떤 다른 역사보다도 자랑스러운 거사로 믿고 있다. 우리 근대사에 3.1운동만큼 의미심장한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면 타고르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 이는 3.1운동을 우리 역사의 여러 강줄기가 모여드는 커다란 호수라고 한다. 마치 백두산 천지 같은 깊은 물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의 결과 태어난 나라라고 명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를 잘 읽어보면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모든 나라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투쟁한 역사라 하겠다.
우리는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해 독립, 즉 자유를 외친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외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중국 영국 미국 어떤 나라도 한국의 주권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는 날 세계평화는 깨지고 만다고 엄중히 선언한 것이다.
서울 종로 2가에는 3.1운동이 일어난 성지 탑골공원이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유적지는 사라지고 없다. 왜 서울시 당국은 길을 넓히고 빌딩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리고 동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는 관심이 없는가?
3.1운동 90주년을 맞이하면서 해가 갈수록 빛이 바래가고 있는 서울의 역사정신이 아쉽기만 하다. 3.1운동이 평양에서 1시간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의 영광을 버리려하는가 잊지 말고 서서히 반성하라.
3. 맺는 말
3·1독립운동은 일제의 10년간의 가혹한 무단통치로 인한 압제와 경제적 착취는 물론 민족의 자존심마저 유린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이천만 민족의 분노가 폭발한 일대 항일운동이었다. 이에 전국적인 강력한 조직망과 300만의 교인을 포용한 천도교가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청사에 빛나는 민족사를 창출하였다. 이 3·1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이 운동을 영도하신 의암손병희 선생이 중심에 계셨기에 가능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 특히 3·1독립운동의 초기단계에서의 천도교의 역할은 이 운동을 결정짓는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우선 운동의 3대 기본방침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일과 운동을 통일화·일원화 시키는 일,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등 거의 전반에 걸쳐 천도교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미 10년 전부터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이 천도교요, 독립운동 자금의 공급처도 천도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비롯한 40여개소의 지방 교구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 교역자가 구속되고, 일백 수십만 원의 예금을 압수당하였다.
결국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3·1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암 손병희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포용력,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에 의해 이루어진 운동이다.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대교당 건축을 추진한 것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위해 운동자금 지원을 결단한 것도,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를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유지해온 것도 의암손병희 선생의 결단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거나 심지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마저 있음을 보게 되면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생명과 재산을 바쳐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깊이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연재를 마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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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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