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6 (토)
(지난 호에 이어)
천도교 도쿄종리원 박사직이 귀국할 때 동료의 송사에서 “대지진! 대지진!! 일본 수도의 대지진 당시에 말도 모르는 백의동포가 좌로도 우로도 피할 곳이 없이 가진 발광을 다부림녀서 혀를 빼어 물고 눈알이 꿰어지는 뭇(衆) 죽음을 당할 때에 선생의 환장된 가슴에 쓸쓸한 암흑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손에 들고 동포의 뼈를 한 토막, 두 토막 주워 모으며 돌아가던 그때가 이제에 생각하면 눈물이시겠지요”라고 한 바 있다. 이는 당시 이재동포위문반에 참여한 바 있는 박사직의 반응이 아닐까 한다.
- 동학지광 8호(1928.8)에 수록된 내용 (해설 성주현 상주선도사)-
동경당부는 포덕 68년 11월 1일에 기관지 「동학지광 (東學之光)」을 창간하여 포덕 74년 11월호까지 모두 18호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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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순식간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재난이었다. 그러나 이 재난은 자연재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청년들과 동포들은 극심한 공포 속에 흩어졌고, 이들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천도교의 조직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도쿄(東京)종리원의 보존과 위문반 임시 사무소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東京) 대부분의 건물이 붕괴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 건물은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했다. 이 건물은 이후 조선인 구호와 학살 피해 조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재조선동포위문반(罹災朝鮮同胞慰問班)’의 임시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위문반은 이곳에서 피해 실태를 조사하고, 구호 활동을 전개했으며, 희생자들의 장례와 위령 의식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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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결성과 활동
지진 직후 일본 전역에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며, 조선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천도교 도쿄(東京)종리원과 종리원장 박사직을 중심으로 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 결성되었다.
천도교 청년회원 이근무,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YMCA 등도 함께하며 범동포적 연대가 형성되었다.
1970년에 발간된 『극웅필경』에는 당시 YMCA 총무 최승만의 회고가 실려 있다. 그는 천도교 청년회 박사직 등과 함께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하고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음을 기록했다. 이 조사는 1970년 3월 『신동아』에 「일본 관동진재시 우리 동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이후 『극웅필경』에는 재수록되었다.
위문반은 일본 당국의 방해와 탄압 속에서도 두 달간 피해 조사를 진행하며 진상 규명에 매진했다.
1923년 12월 25일 열린 ‘재동경조선인대회’에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으며, 보고에 따르면 학살 희생자는 총 6,661명에 달했다. 또한 해외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虐殺(학살)’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했다.
1924년 9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는 관동대지진 1주기 추도식을 개최하여 희생자들을 기렸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모 행사를 이어왔다. 2023년에는 100주기를 맞아 추모문화제를 열어 당시 사건과 천도교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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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내 추모 활동과 일제의 통제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독부의 언론 통제와 유학생에 대한 감시로 학살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4년 전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족운동이 재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운동이 어려웠지만,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제활동과 추도회가 이어졌다.
특히 포덕 65년(1924) 9월 1일, 신흥청년동맹과 서울청년회가 주도하여 중앙대교당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주기 추도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공식적으로 열린 유일한 대규모 추도회였다.
한편, 도쿄청년회는 일본 내에서 해마다 추도회를 열어 학살의 기억을 이어갔다.
포덕 65년(1924) 9월 13일, 흑우회·기독교청년회·조선노동동맹회 등과 연합으로 1주기 추도회를 열었고, 포덕 66년(1925)에는 도쿄종리원에서 2주기 추도회를 개최하며 조난동포들을 기렸다.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계승
관동대지진 속에서 천도교가 보여준 활동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민족운동의 한 축이었다.
천도교는 재난 속에서 조선인의 생명을 지키고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행동했으며, 일본 내 조선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일본 내 조선인 인권운동과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천도교의 이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재난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천도교가 보여준 연대와 실천의 정신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세대를 넘어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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