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6 (토)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이곳에서 희생된 교인은 10명이요, 부상자는 43명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사람이 무려 140여 명에 이르렀다. 순국 순도한 10명은 다음과 같다.
廉錫河 廉錫漢 朴弘善 李鍾煥 李永浩 徐鳳化 元俊善 黃斗律 黃熙鍾 金尙甲
그리고 왜경에게 체포되어 함흥감옥에서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다음 9명이다.
安昌憲 崔鳳天 薛雲龍 崔德福 廉元亨 崔錫崑 元秀弘 廉仁煥 李泰仁
『3·1독립운동실록(하)』에 실린 일인의 신문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월 10일 오전 11시경 단천읍 시장방면에서 약 600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라 쓴 국기 수십 장을 선두에 세우고 함성으로 만세를 부르면서 군청을 습격하였다. 이 급보를 받은 헌병분대에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읍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녀를 피난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재향 일본 군인과 일본인 장정이며 기타를 소집하여 경계대를 조직하고 진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쉽게 해산하지 아니하매 대충돌이 일어나 3시간 동안이나 수라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격투를 한 끝에 군중 측에서 8명이 사상되고 주모자 143명이 검거되었는데 검거된 자는 공립소학교에 수용해 두고 취조한 후 겨우 12명을 제외해 놓고 그 나머지는 장태를 엄하게 하여 방면한바 군중은 대부분이 천도교인이었다.”
3월 22일에는 천도교인인 김성호, 황희청, 이태인, 이종근, 송문일, 황승오등이 주동이 되어 북두일면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독립유공자편찬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군중 500여 명을 이끌고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투석하였다 그러자 헌병들은 군중을 향하여 총질을 하였다. 이 총격으로 8명의 군중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2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헌병 1명도 부상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성호를 비롯하여 5명이 체포되어 함흥 지방법원을 거처 고등법원에까지 올라갔으나 유죄판결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 당국은 천도교도가 많이 살고 있는 신만면에 헌병 1개 중대를 상주시킴으로써 공포 속에 평온을 유지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단천의 3·1운동은 3월 한 달 동안에 현장에서 총살자 또는 척살자 33명, 중경상자 24명, 피검자 290명을 내는 격렬성을 보였다.
단천 교인들의 3·1운동은 준비단계에서부터 헌신적이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총부에서 대교당 신축 명목으로 성금을 모금할 때 단천 교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각출하였다. 어떤 분은 논과 밭과 소까지 팔아 성금을 내는 사례도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무릅쓰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3·1운동 이후의 교세
민족의식을 일깨워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앞장섰던 천도교인들은 직접 간접으로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주도 세력들은 조금도 굴함이 없이 교세를 재건하는 것이 곧 보국안민을 위한 길이라 믿고 일어섰다. 이들이 다름 아닌 3·1운동의 주도자들이었다. 김용문 선생은 3·1운동 당시 단천교구의 주역으로 다음과 같이 64명을 기록하고 있다.
최봉천, 안창헌, 치석곤, 최복덕, 벽운용, 염원형, 염인환, 원수홍, 이원수, 서봉화, 염석하, 염석한, 이영호, 김상갑, 벽관학, 김병갑, 황명옥, 김여수, 박한익, 박홍선, 김병무, 이종환, 염명준, 김덕율, 김상근, 황영순, 한성칠, 김윤택, 서기순, 서치현, 이재용, 이운범, 김학범, 이기준, 김덕희, 염석범, 봉덕업, 김진섭, 박영호, 이주팔, 황시린, 김창록, 김기종, 최봉익, 김병은, 정기선, 박계율, 박창운, 최흥두, 박홍인, 이성규, 박세향, 이재열, 박진후, 천인봉, 봉덕실, 조진관, 염호섭, 최병덕, 최병홍, 황희율, 황희종, 원준희, 김낙순
중요 간부들인 교구장을 비롯해서 교구직원, 그리고 연원대표들이 모두 체포되어 실형을 받게 되자 한 때 교구는 공백상태에 빠졌다. 이듬해인 포덕 61년(1920) 3월에 이르러 교구 직원과 순회교사, 각 면 전교사를 새로 선출하고 7월에는 다시 교구임원을 재구성하였다. 안창헌과 같이 연원대표로 있던 염인환을 교구장으로 선출하였고 공선원(총무)에 원수홍을, 전제원에 이종순을, 금융원에 김정현을, 서기에 김경하를 선출했다. 이후 단천교구는 사회적으로 대강연회를 개최하고 단기교육 강도회도 갖고 활동을 개시하여 더욱 많은 교인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3. 수안교구의 만세운동
머리말
수안군의 3·1만세운동은 황해도에서 가장 격렬했다. 천도교에서도 희생자를 많이 낸 시위운동중 하나이다. 천도교인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본헌병들이 쏜 총탄에 9명이 즉사하고 18명이 중상을 당했으며 70여 명이 체포되어 63명이 최저 6개월 이상, 최고 2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수안군 천도교인들의 만세시위는 읍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수구면 석달리, 홀동 장터와 천곡면 두대리, 연암면 율리에서도 계속되었다.
단천교구에서는 우이동 봉황각 수련에 4기에 홍순걸, 5기에 안봉하·홍순걸 등 3명이 참가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한독립운동사(권2)』와 독립운동사편안위원회 간행 『독립운동사 제2권』, 이병헌 저 『3·1운동비사』, 그리고 『천도교연원록』, 수안군 『천민보록』,『 천도교창건록』 등의 기록을 더듬어 만세시위의 경위를 알아보기로 한다.
수안군의 당시 교세
수안군에 동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천도교창건록』에 의하면 烈菴 金成根이 포덕 34년(1893)에 입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갑도동학혁명전에 동학이 수안군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은 도동면 사람으로 추측된다. 동학혁병 당시 동학군이 한때 중화에도 나타났던 기록이 보이므로 동학혁명 이전에 동학이 이 지역에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포덕 45년(1904) 갑진개혁운동 당시에는 漳菴 吳榮昌 연원과 泓菴 羅仁協 연원의 지도 아래 대대적인 개회를 하였다. 『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황해도 열군에서 개회한 지도자를 17명이나 열거하고 있다.
安鳳河 金應河 李壽榮 李昌郁 李昌杰 洪碩貞 李憂선 李宗燁 金應幹 李鳳璘 李鎭禹 李邦郁 崔明伯 金澤英 李殷烈 崔榮九 李昶烈
수안군은 바로 오영창·나인협 연원이므로 인근각지 진보회 개회에 동원되었음은 분명하다. 수안에 천도교가 대대적으로 포교된 것은 포덕 43년부터 44년 사이다. 이때의 교 호수는 300호가 넘었다고 한다.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뒤인 포덕 50년(1909) 10월 현재의 교 호수는 234호이며 교인 수는 970명이었다. 이것은 포덕 49년에 이용구·김연국 일파가 시천교로 분파하는 영향을 받아 직접 관련되지 않았으나 교세가 후퇴했다. 다만 최영구가 시천교 쪽으로 가게 되어 후에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포덕 50년(1909)에 접어들면서 포제를 고쳐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교세는 약간 늘어났다. 포덕 60년대까지 수안교구 역대 교구장은 다음과 같다.
金相允 (50年) 洪淳杰 (51年) 金應河 (52年) 金益培 (53年) 金洞善 (54年) 洪碩貞 (55年) 金永萬 (56年) 安鳳河 (57年)
포덕 60년(1919) 3·1운동 당시의 교구장은 안봉하였다. 교세는 약 300호 정도였으며 교인 수는 1,500명 정도였다. 각 면 전교사를 역임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金處熙, 閔丙善, 韓淸一, 韓國英, 朴春益, 張聖道, 李東郁, 黃鼎五, 金顆熙, (여자 전교사) 田貞嬅, 宋秀嬅, 李道嬅
교인의 분포는 도동면 율계면 공동면 수구면 천곡면이 비교적 많았으며 나머지는 대포면 연암면 대천면 오동면 소내면 동부면 서부면 수안면 등에 몇 십 호씩 있었다.
만세운동의 준비
수안교구에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에 관한 지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 저녁때였다. 독립선언서가 수안교구까지 전달된 경로에 대해 ‘황해도도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곡산 천도교인 이경섭이 2월 28일 서울 이종일에게서 독립선언서 일천 장을 받아가지고 기차로 3월 1일 황해도 신막에 내려 천도교 서흥교구장 박동주에게 750장을 주면서 서흥교구와 해주교구에 보내도록 하였고 자기는 곧 수안으로 갔다. 도중에 이종숙의 집에서 천도교 수안교구장 안봉하와 홍석정 김영만 홍순걸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하는 동시에 자기는 발이 아프니 나머지는 곡산에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경섭은 서울에서 기차로 신막까지 와서 도보로 신계를 거쳐 곧바로 수안 도동면 덕동에 있는 이종숙의 집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수안교구장을 비롯한 임원 및 간부를 비밀리에 불러 전달하였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안봉하는 수안면 석교리에 있었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실록』에는 이경섭이 3월 1일에 안봉하 수안교구장을 찾아가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안봉하 교구장을 비롯하여 김영만·이찬홍·최용식·이영철과 교도인 홍석정·한청일 등이 모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1919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경섭은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중 수안교구에 150매 정도 건네주면서 독립만세시위를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교구장 이하 여러 간부들은 독립만세시위를 원칙적으로 빨리 하기로 하고 이튿날인 3월 2일 시일식을 마치고 다시 교구실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3월 3일 즉, 그 이튿날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런 계획을 눈치 챈 헌병 분대는 참석했던 몇 사람을 체포, 헌병대에 구금하였다. 『3·1독립운동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안헌병분대가 탐지한 바가 되어 피고 이영철·홍석정·한청일 이하 전기 피고들은 그날로 동 헌병대에 구금되었었다. 이때 체포되지 아니한 이영철·홍석정·한청일 등은 다시 전기 독립운동계획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이 체포된 것이 아니라 일부 참석자 중에서 몇 사람이 체포된 것 같다. 전후의 기록에 나타난 이름들을 살펴보면 체포된 사람은 이봉하 교구장 등 교직자인 것 같다. 그러나 검속 당하지 않은 한청일·홍석정·이영철 등은 뜻을 굽히지 않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동원하는데 계속 힘썼으나 시간이 급하여 많은 교인을 동원하지 못했다.
3월 3일의 피의 항쟁
3월 3일 오전 6시경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북쪽 공포면·연안면·도소면·율계면, 동쪽 천곡면, 동북쪽 수구면, 남쪽 대성면, 그리고 수안면에서 중견 천도교인들이 ??군 교구에 달려왔다. 밤중에 수십 리씩 걸어서 들어온 것이다. 이때 康國甫,崔陽鳳,車濟南,金應河,韓眞錫,柳光善,金泰赫,朴利鳳,崔錫九,金應道,朴泰洙 등 130명이 모였다. 여러 기록에 게재된 내용들을 종합하여 보면 그 윤곽을 알 수 있는데 황해도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여기서 주도 인물 중의 이영철이 선두에 서고 한청일과 홍석정은 중앙에서 2개의 큰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130여 명이 함께 뭉쳐 만세를 부르며 금융조합 앞 큰길을 지나 헌병 분경대쪽으로 향하였다. 행렬이 헌병 분견대 앞에 당도하여 이영철이 ‘우리들은 오늘부터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서 자유민이 되고 조선국의 독립도 된다’고 소리높이 외치고, 이영철·한청일·홍석정 등은 번갈아가며 ‘우리는 이미 조선독립을 선언하였으니 너희들은 속히 부대를 내어놓고 물러가라’고 함성을 질렀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열은 점점 늘어나 고함소리 만세소리에 천지가 떠나갈 듯 당장 독립이 다 된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드디어 이영철·차제남·김응도·유광선·김태혁 등 여러 사람은 헌병대 사무실로 몰려들며 분대장 요시노(吉野匡) 중위에게 분대를 인도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일본헌병과 보조원들은 벌벌 떨며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가 결국 서울 본부에서 연락이 있는 대로 곧 물러가겠다고 서약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환성을 올리며 시가지를 돌아 천도교교구로 모여서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
한편 각지에서 시위 행렬부대가 계속 교구로 몰려들었다. 교구로 돌아올 때 대천면 사리원 전교실에서 떠난 이동욱·이재관·김문상·김응수·용계홍 및 임창운·이두천·이시용 등 50명의 행렬은 돌아오던 중 3일 10시경 대천면 사창리에서 헌병들의 저지를 받기도 하였지만 이들을 밀어제치고 달려왔다.
읍내는 온통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흥분한 군중들은 헌병대를 쫓아내야 한다고 나서게 되었다. 이때가 11시경이었다. 이동욱·오관옥이 앞장섰으며 뒤따르는 교인들도 일백여명이나 되었다.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 분견대에 도착한 이들은 마당으로 밀려들며 “조선은 이미 독립되었으니 너희들은 빨리 물러가라”고 했다.
당황하던 헌병들은 돌변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많은 교인들이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 일부는 체포되었으며 대오는 무너졌다.
이 대목에 대해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6시에 교구로 모였던 군중들은 6시반경 헌병대에 도착하였다 한다.
“독립의 선언을 하였으니 속히 이 분대 사무실을 내어놓고 물러가라. 만일 듣지 아니하면 계속하여 지방으로부터 몰려오는 천도교도가 더욱 증가하여 어디까지든지 이 요구를 하리라”고 강압하였다고 한다.
헌병대 앞에 도착한 이들은 헌병의 만행을 항의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헌병 분대로 돌입하였다.
이때 헌병들은 다시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여기서 몇 사람이 쓰러졌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헌병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폭행을 가하며 살육행위를 감행하였다.
1919년 미국상원 제66회 의사록에는 다음과 같이 서양 선교사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3월에 시위가 처음 일어났을 무렵에 2~3백 명의 군중이 황해도 수안 헌병 분견소를 찾아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니 당신들은 물러가라고 통고하였다. 헌병들은 물론 한국이 독립을 획득하였다면 물러가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서울로부터 명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해답하였다. 군중은 이에 만족하고 돌아갔다. 약 2시간 후에 한 떼의 다른 군중이 와서 같은 요구를 하였다. 이번에는 헌병이 발포를 해서 5명을 죽였다. 다른 몇 사람인가는 상처를 입고 잡혀서 갇히었다.”
황해도 장관보고서(1919. 8. 18)에는 이날 발포로 즉사한 자는 9명, 중상자는 18명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게 된 헌병대는 평양주둔 보병부대를 증원, 엄중 감시하는 동시에 일일이 수색전을 벌여 많은 사람을 검속하였으며 한편 의용단, 야경단을 조직,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도 3월 7일 수구면 석달리 홀동에서 천도교 전교사 이승필·이달수·이재협 등이 주동이 되어 약 40명이 장날을 이용,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헌병주재소의 습격을 기도하면서 격렬하게 만세를 불렀다.
맺는 말
사망 9명, 중상 18명으로 피의 항쟁을 벌였던 수안군 천도교도들의 만세시위는 끝났으나 일제의 강제수색과 현장에서 주모자 색출로 70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일 년 반의 재판을 거친 끝에 최고 2년 최저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 센 사람도 섞여 있었으며, 의복 한 벌도 차입할 수 없는 형편으로 보기 흉한 푸른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직업은 대부분 농업이었고 종교는 모두 천도교라 했다. 이들 중 홍두익과 최석규 등 2명은 병으로 출정하지 못하였다. 나머지 68명은 1920년 11월 2일부터 경성 복심법원 정동 특별 법정에서 재판을 개정 8일까지 마쳤는데 다음과 같이 형을 받았다.
징역 2년 : 安鳳河, 金永萬, 李永喆, 洪斗玉, 李東郁,
1년 6월 : 羅燦洪, 洪吉載, 李潤植, 金溶植, 金炯宣, 李應洙, 李達河,
張聖道, 羅龍日, 安昌浩, 鄭理彦, 李致濟, 金明白, 梁石斗,
康夢洛, 朴宗燮, 金炳領, 梁啓殷, 金麗鎭, 金河京, 金熙德,
柳光善, 金泰赫 ,金錫鳳, 朴泰道, 康國甫, 車濟南,
1년 : 洪斗益, 李在觀, 白受和, 金文祚, 李彩龍, 田昌五, 李鍾國,
金龍洙, 龍桂弘, 金元杰, 鄭達明, 柳良鎭, 鄭斗濱, 朴昌淳,
金健榮, 金啓淑, 金貞萬, 金榮弘, 鄭益淳, 李宗植, 李台仁,
朴鎭化, 金應基, 鄭鎭河, 韓眞錫, 朴利鳳, 金錫龜, 吳炳善,
8월 : 李義萬, 徐相麟,
6월 : 朴昌雲, 李時庸, 李斗闡,
병중에 있던 홍두익은 쾌차하였으나 최석구는 기관지염으로 오랫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다 포덕 61년 (1920) 8월 4일 재판 판결이 나기 전에 순도순국하였다. 최석구는 수안군 서부면 지암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52세에 환원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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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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