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6 (토)
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중심으로 본 천도교의 3·1운동 준비과정
1. 머리말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전개되었지만, 그 준비 과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직접적인 요인은 고종의 승하와 일본에서 전개된 2·8독립운동이었지만, 멀리 그 연원을 본다면 일제 강점 이후 각 계층에서 꾸준히 준비한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천도교는 강점 직후 일제의 침탈을 반대하였고, (『황성신문』 1910년 9월 3일자.) 천도구국단의 비밀결사를 민중운동을 기획하였다.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218~221쪽.) 이 과정에서 천도교는 우이동 봉황각에서 49일 특별기도를 가졌으며, 3·1운동 직전 전교인들에게 역시 49일 특별기도를 갖도록 하였다. (성주현, 「우이동 봉황각과 3·1우동」, 『일제하 민족운동 시선의 확대-3.1운동과 항일독립운동가의 삶-』, 도서출판 아라, 2014.)
삼각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우이동 봉황각은 1912년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천도교단에서는 ‘의창수도원’으로 수련도장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등록되어 있다. 그 배경에는 천도교 제3세 교조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인 의암 손병희가 1912년 보국안민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봉황각에 대해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이었던 이곳 27,900여평을 매입하여,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1912년에 세운 건물이다. (인터넷 다음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302425.)
또한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2호로 등록 (봉황각이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2호로 등록된 것은 1969년 9월 18일이다.)된 봉황각에 대해 서울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1912년 의암 손병희 선생이 세운 것이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킨 곳으로 의창수도원이라고도 부른다. 봉황각이란 이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다. 현재 걸려있는 현판은 오세창이 썼다. 손병희 선생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심어주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이 집을 지었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했으며, 이곳을 거쳐 간 지도자들이 3·1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0020000,11.)
앞의 인터넷 백과사전과 안내문에 의하면, 우이동 봉황각은 3․1운동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민족지도자를 양성한 수도원’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사실은 그동안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못하였다.
이에 본고는 우이동 봉황각과 3·1운동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우이동 봉황각이 건립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 우이동 봉황각에서 민족지도자를 어떻게 양성했는가를 49일 특별기도틀 통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끝으로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를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일제 강점과 봉황각의 건립과정
봉황각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건립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지 불과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른바 ‘무단통치’라는 일제의 지배정책으로 한민족을 강압과 억압으로 통치하였다. 그중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겪은 일제는 천도교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미 통감부 시기부터 “종교는 국가의 기축”이라고 하여 천황제 국가이념을 요구하였던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이후 종교정책은 자율적 활동보다는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근간으로 삼고자 하였다. (성주현, 「일제의 동화정택과 종교계 동향」, 『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1910년대』, 신서원, 2003, 174쪽.) 더욱이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종교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에 대해 “순연히 종교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취체’가 불가피하다고 하였다.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시정연보』, 1911, 77쪽.) 이와 같은 식민지 상황에서 천도교의 동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의 강점을 발표하자, 천도교에서는 곧바로 일제 강점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당시 천도교는 일제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15일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를 창간하였다. 이 『천도교회월보』를 창간한 천도교회월보사는 일제강점을 반대하는 서한을 각국 영사에게 발송하였다. 이로 인해 『천도교회월보』발행의 주무를 맡고 있던 김완규를 비롯하여 오상준, 이종린, 이교홍, 김건식 등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천도교대종사일기』;「何事被捉」, 『매일신보』 1910년 9월 3일자. ) 그리고 20여 일 만에 석방되었다. (「天道敎員의 蒙放」, 『매일신보』 1910년 9월 18일자.)
이처럼 천도교가 일제 강점의 부당성을 지적하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천도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미제의 폐지였다. ‘성미’는 교인들이 교단에 기부하는 성력으로 교단 운영의 근간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성미제를 강압적으로 폐지토록 하였다. 당시 상황을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성 제2 헌병분대장 村田多忠씨가 천도교주 손병희 씨를 초치하여 일반교인에게 誠米收捧하는 事에 관하여 엄절히 설유함은 已報하였거니와 손병희 씨는 지방 교인에게 통지하고 收捧하던 誠米는 從今 이후로 일체 폐지하라 하였다더라. (「天道敎의 誠米廢止」, 『매일신보』 1911년 4월 23일자.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압력이 있었지만, 천도교는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상황에서 내적 결집력을 강화해 나갔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중앙총부 임직원과 서울 시내 주요 교역자들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곧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당시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의 형편은 마치 머리 없는 사람 같이 되었다. 나라의 세 가지 요소는 주권과 토지와 인민이며,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나라이라 하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주권이 없는 나라이니 머리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야.
일본이 몇 해를 두고 우리 나라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보호한 것이 무엇이냐. 토지를 보호하였단 말인가. 재산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주권은 司法이요 사법은 주체인데, 사법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사농공상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중략) 내가 일본 사람에게 보호 사실을 질문한다면 한국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라 하리라. 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296-297쪽.
즉 의암 손병희는 당시를 ‘한국은 주권이 없는 나라’임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또한 그동안 일본은 한국을 보호한다고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일본만을 위한 것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흑심 즉 ‘침략’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의암 손병희의 예지력은 이미 1900년대 초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인식하였다. 그래서 1904년 갑진개화운동을 통해 민회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무능한 정부와 일제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1904년 ‘黑衣斷髮’로 상징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용창, 『동학·천도교단의 민회설립운동과 정치세력화 연구(1896~1906』,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를 참조할 것.)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의암 손병희는 천도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 시대를 담당할 것인가. 우리는 다 같이 천부의 고유한 성품을 받아 天權을 소유하였으니 천도교로 天賦의 성품을 삼고 천도교로 天權行使의 목적을 삼아 만분지일이라도 천권행사에 해이한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계 통유의 보호국은 반독립국이라 하나 오늘 우리 나라는 일본의 領地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세계와 국가와 내 몸뚱이는 나의 腦髓에 달려 있는 것이니, 내 몸을 위하는 마음이 뇌수를 떠나지 않으면 몸이 반드시 윤택할 것이요, 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뇌수를 떠나지 않으면 나라가 반드시 흥왕할 것이요, 세계를 위하는 마음이 뇌수를 떠나지 않으면 세계가 반드시 평화할 것이다. 뇌수는 곧 사람의 요소이다. (조기주, 『동학의 원류』, 297쪽.)
즉 지금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지만, 교인 개개인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종교적 감화’를 통해 천도교가 가야 할 길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천도교는 두 가지 방안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였다. 하나는 강습소 설립을 통한 교리교육의 강화이었고, (의암 손병희는 교리강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가 교리강습을 하는 것은 교리에 대한 지식을 넓히어 장래의 교역자가 되어 교회를 확장할 준비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만도 않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세 가지의 큰 희망이 있으니 첫째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요, 둘째는 국가 민족을 위한 경륜이요, 셋째는 교회와 인류사회를 위한 공헌이니, 자기 개인의 행복은 결국 국가사회를 위하는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니라. (중략)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첫째로 마음이 굳어야 하다. 교리를 연구하여 그대로 실행하면 현인군자는 될 수 있으나 성인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하라. 대신사 말씀과 같이 요순공맹이 다시 살아와도 어절 수 없는 이 시대 이 세상에 우리들이 우선 요순공맹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5만년 大道事業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먼저 굳은 신념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이라.”) 다른 하나는 종교적 심성을 강화하는 수련이었다. 전자는 1910년대 교리강습소 설립과 운영으로, 후자는 우이동 봉황각 건립으로 각각 구현되었다.
천도교는 무엇보다도 ‘종교의 감화’를 받기 위해 수련을 강조하였다. 즉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무슨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감화를 받아야 만사가 무위이화의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라고 다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요 감화를 받지 못하면 그만큼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난 체하는 사람이라도 한울님의 감화를 받지 못하면 사람의 능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큰일을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니라”고 하여, 큰일을 성공시키려면 수련을 통한 종교적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천도교는 수련할 만한 공간 즉 수도원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강점 이후 천도교인의 독립 의지를 다지기 위해 수련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1911년 8월 중앙총부 임직원을 대동하고 우이동을 답사하였다. 당시 우이동은 깊은 계곡으로 원족회나 탁족회 등으로 유명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우이동을 들러본 후 금융관장 윤구영에게 우이동 일대의 밭과 임야 등 3만평을 가격이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말고 무조건 매입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함께 같던 임직원들은 이런 심산유곡의 토지를 매입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하면서 그 영문을 잘 몰라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의암 손병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우이동 일대 밭과 임야 등 27,946평을 매입하였다. (조기주, 『동학의 원류』, 307-308쪽.)
의암 손병희가 삼각산의 정기가 살아있는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것은 앞서 강조하였던 ‘종교적 감화’를 위한 수련 도장을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차 천도교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방략이었던 것이다.
우이동 일대를 매입한 천도교는 이듬해 1912년 3월 7일 이곳에 연원 두목과 지방 교역자의 수련을 위한 도장으로 봉황각을 기공하여 6월 19일 준공하였다. 봉황각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본전 木造 瓦葺平家 건평 28평 2합
내실 木造 瓦葺平家 건평 18평 2합
부속 건물 洋瓦葺 건평 8평 3합 (조기주, 『동학의 원류』, 309쪽.)
그리고 봉황각의 현판의 ‘鳳’자는 중국의 명필 안진경, ‘皇’자는 역시 중국인 회소, ‘閣’자 역시 중국인 미불의 필적을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오세창이 모사한 것이다.
3.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와 독립의식의 강화
우이동에 수련 도장으로 봉황각을 건립한 의암 손병희는 전국 각 지방의 주요 두목급 지도자를 불러 49일 특별기도를 실시하면서 매 수련 때마다 민족과 교회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다지는 법설을 남겼다. 본절에서는 49일 특별기도 과정과 의암 손병희의 법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의암 손병희는 1910년 8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할 때부터 ‘국권회복’을 그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러기 때문에 3․1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한국의 독립’이었던 것이다. (이병헌,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73쪽.)
따라서 의암 손병희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그 순간부터 국권회복과 한국의 독립은 천도교가 그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폭력적 수단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이병헌, 『3․1운동비사』, 81쪽.) 이에 대해 의암 손병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문 ; 피고는 장래나 또는 미래에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답 ;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려는 나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폭력으로 수행할 생각은 조금도 없고 평화리에 해결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는 일제의 폭력에 대한 간접적 비판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소극적 행동’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종교지도자로서의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의암 손병희는 앞서 강조하였던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과 종교적 수양을 통한 수련으로 정신적 무장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천도교에서 행한 49일 특별기도는 독립의지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문 ; 천도교는 본년(1919년, 필자)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회를 열 것을 각 교도에게 시달하고 실행한 일이 있는가.
답 ; 나는 해마다 기도를 올리는데, 천도교에서는 협의상 1월부터 2월까지 기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문 ; 그 일을 각 교구에 문서로 배포 전달하였는가, 교구장을 모아서 시달하였는가.
답 ; 그것은 교주가 문서로 발표하였다.
문 ; 그 기도는 어느 때부터 조선독립을 성취할 시기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렇다. (이병헌, 『3․1운동비사』, 86쪽.)
즉 의암 손병희는 49일 특별기도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의암 손병희는 일제 강점 직후 수련도장을 건립할 곳을 물색하였고, 그 장소로 우이동을 답사한 것이다. 그리고 우이동에 3만여 평을 매입한 후 곧바로 49일 특별기도를 시행할 수련 도장으로 봉황각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황각 건축과 동시에 우이동에서 49일 특별기도를 모두 일곱 차례 진행되었다. 일곱 차례의 49일 특별기도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 실시 현황 (『천도교회월보』 (30호에 의하면, 49일 특별기도를 제1회는 도선암, 제2회는 도선암과 봉황각, 제3회 역시 도선암과 봉황각에서 각각 진행하였다.(67쪽)))

흔히 봉황각 49일 특별수련은 일곱 차례로 알려져 있지만, <표 1>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여섯 차례 실시되었다. 그렇지만 도선암에서 실시한 1회는 봉황각 건립과 동시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포함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된다. 봉황각 특별수련은 49명에서 105명까지 참가하였기 때문에 1회 특별수련을 하였던 도선암을 활용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전국 지방의 핵심 교역자를 불러 도선암과 봉황각에서 49일 특별기도를 실시하면서 매번 법설을 하였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이신환성’이었다. 법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회 및 제2회
연성의 묘법은 以身換性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有形한 ‘나’이니 이 유형한 나를 無形한 나로 바꿀 것이요, 身邊世事의 나를 性中天事의 나로 바꿀 것이다. 그대들이 만일 육신의 나로부터 생기는 모든 인연을 끊는다면 본연한 性靈의 나는 자연히 나올 것이다. 사람은 평소에 견실한 수양을 쌓지 않으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마음이 흔들리나니 이것은 그대들로 하여금 반드시 꼭 수련을 해야겠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인 결심은 쉬우나 평생을 통한 결심으로 수양하기는 어려우니라.
◆ 제3회
(의암 손병희와 참여자 간의 대화)
지동섭 : 대신사께서 다시 출세하신다 하니 사실입니까?
손병희 : 성령으로 출세하실는지 육신으로 출세할는지는 말할 수 없으나 다시 출세하실 것만은 분명하니라.
지동섭 : 그러면 누구나 뵐 수 있습니까?
손병희 : 정성이 지극하면 뵈올 수 있느니라.
지동섭 : 그때가 언제쯤 되겠습니까?
손병희 : 이번 49일 기도를 마치는 날쯤이면 출세하실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육신으로 다시 출세하는 것은 천하에 없는 일이니 육신 출세야 바랄 수 있겠느냐마는 설사 육신으로 출세할지라도 그대의 수련이 부족하면 대신사를 뵈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신사의 출세 여부는 그대들의 수련 독실 여부에 있는 것이니라.
◆ 제4회
道는 家道和順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先師께서 역설하신 것이니, 수도의 극치는 夫和婦順이다. 天下大事는 다툴지언정 가정에서야 다툴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사람은 아무리 聖人이라도 죽기 전에는 그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요, 큰 성인은 큰일을 당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생활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니, 첫째는 思想生活이요, 둘째는 學問生活이요, 셋째는 勞動生活이다. 그 중에서 사상생활 하는 사람은 능히 학문생활 하는 사람과 노동생활 하는 사람을 부릴 수 있으나, 노동생활 하는 사람은 학문생활 하는 사람과 사상생활 하는 사람을 부릴 수 없는 것이다. 난세에는 이것이 바뀌기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드는 것이니라.
◆ 제5회
내가 以身換性에 대하여 말하였거니와 성령은 不生不滅하므로 氣數가 능히 制御하지 못하나니 진실로 오는 禍를 免하고자 하면 성령과 육신을 바꾸어 믿는데 있느니라. 성령과 육신을 바꾸어 믿는 방법은 육신관념을 끊어야 하나 육신관념을 끊으려면 더욱 어려울 것이니, 육신관념을 끊으려고만 생각지 말고 일거일동에 누가 능히 나로 하여금 말을 하고 생각을 하게하고 움직이게 하는가 하고 이것을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면서 적극적인 공부를 계속하면 자연히 성령이 주체가 되고 육신이 객체가 되어 위로는 대신사와 같이 대각이 될 것이요, 아래로는 가히 육신의 화를 면할 것이니라. (중략)
오늘의 일은 국가의 일이거나 교회의 일이거나, 오늘에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사람은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하나니, 종교적 수련이 없으면 한울의 감응을 받기 어려운 것이니라. 한울님의 감응을 받으면 萬理萬事가 無爲而化로 되는 것이요 한울님의 감응을 받지 못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라.
지금 세상은 힘센 사람의 제일인데, 완력도 힘이나 개인과 개인 사이에 힘을 겨루는 것으로 이러한 완력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권력과 재력과 지력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나, 앞날의 세상은 도력으로써 많은 사람을 감화케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이 포덕이다. 우리 교회에서 포덕을 많이 한 사람이 가장 힘이 센 사람이니, 포덕은 하면 할수록 힘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니라. 조기주, (『동학의 원류』, 310-316쪽 참조.)
이상의 법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신환성’이다. ‘이신환성’이란 “몸을 성령으로 바꾸라”는 것인데, (『천도교경전』, 천도교중앙총부, 1991, 646쪽.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몸을 성령으로 바꾸라는 것은 대신사의 본뜻이니라. 육신은 백년 사는 한 물체요, 성경은 천지가 시판하기 전에도 본래부터 있는 것이니라. 성령의 본체는 원원충충하여 나지도 아니하며 멸하지도 아니하며 더하지도 아니하며 덜하지도 않는 것이니라. 성령은 곧 사람의 영원한 주체요 육신은 곧 사람의 한 때 객체니라. 만약 주체로써 주장을 삼으면 영원히 복록을 받을 것이요 객체로써 주장을 삼으면 모든 일에 災禍에 가까우리라. (중략) 무릇 안락의 말은 듣기에는 비록 좋으나 실은 안락이 하니라 도리어 險固하고, 험고의 말은 듣기에는 비록 싫으나 실은 험고가 아니라 곧 안락이니, 우리 교의 대신사는 성령으로 주체를 삼으신지라. (중략) 그러므로 육신을 성령으로 바꾸는 사람은 먼저 괴로움을 낙으로 알아야 가하니라.”) 이는 곧 자신을 희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제1회 및 제2회에서 언급한 “사람은 평소에 견실한 수양을 쌓지 않으면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마음이 흔들리나니 이것은 그대들로 하여금 반드시 꼭 수련을 해야겠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시적인 결심은 쉬우나 평생을 통한 결심으로 수양하기는 어려우니라”와 “사람은 아무리 聖人이라도 죽기 전에는 그 인격과 명예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요, 큰 성인은 큰일을 당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것과 제5회 법설의 “사람은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하나니, 종교적 수련이 없으면 한울의 감응을 받기 어려운 것이니라. 한울님의 감응을 받으면 萬理萬事가 無爲而化로 되는 것이요 한울님의 감응을 받지 못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니라” 등은 ‘자신의 희생’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식민지 상황이지만, 이신환성된 자신을 희생하여 민족 독립의 길에 두려움 없이 참여할 것을 은연 중 각인시켰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는 일제의 강점 직후부터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인 이신환성을 직접 몸으로 체험케 하여 ‘큰일’ 즉 3․1운동을 준비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지방에서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주요 교역자는 이신환성을 통해 민족 독립에 기여할 것을 마음 깊이 다짐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49일 특별기도는 천도교인에게 있어서 민족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천도교를 탄압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교를 통한 천도교 교세의 확장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의 하나였던 것이다. 더욱이 49일 특별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그 결과 승전국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는 이신환성으로 무장한 천도교인에게는 희망의 메시지, 즉 독립의 기회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천도교는 이와 같은 특별기도를 통한 민족의식을 강화하면서 대규모의 민중운동을 준비하였다. 봉황각 49일 특별기도를 끝낸 이후 즉 1914년 8월 천도교 내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민족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비밀결사인 천도구국단을 조직하였다. 이종일은 천도구국단 조직에 앞서 기독교 또는 불교와 연합하여 민중운동 형태의 대중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1917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에 가까워지자, 이종일은 다시 민중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암 손병희에게 제안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19년 3월 1일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원칙으로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성주현,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비밀결사와 독립운동자금모금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5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8, 150-152쪽.)
이러한 의미에서 1919년 들어 3·1운동을 앞두고 천도교는 앞에서 인용한 의암 손병희의 신문과정에서 답변한 바와 같이, 이해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 특별기도를 봉행하면서 3·1운동에 대한 정신적 무장과 마음의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종령 제120호」, 1918년 12월 6일자; 『천도교회월보』 100호, 1918.12, 83-84쪽; 이동초, 『천도교회종령존안』, 219-220쪽. 당시 천도교에서 발송한 종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吾敎의 主愛-必爲世오. 大願이 亦爲世라. 故로 我信者-愛를 發함에 爲身爲世의 差異가 無하며 願을 發함에 亦爲身爲世의 區別이 無함이 卽吾敎의 原理를 體行함이오. 吾師이 明訓을 服膺함이라. 今此 世族前途의 享福을 爲하여 慧眼의 所到와 願力의 所發이 自有不己라. 故로 特히 祈禱의 節次를 定하여 左記 佈明하노니, 惟我宗徒는 廣濟蒼生의 大願으로 天主와 兩位 神師께 至誠奉祈할지어다.
左記
一. 기도기간은 49일로 정하되 明年 1월 5일부터 仝 2월 22일까지 함.
一. 기도시간은 매일 하오 9시로 함. 단 侍日에는 先히 侍日祈禱를 終하고 仍續 奉行함.
一. 기도의식 一, 淸水 一器를 奉奠함. 一, 白米 5合을 奉奠함. 단 白米는 기도기간 종료 후에 自家食料에 供하되 청결히 소비함을 주의함(예컨대 밥알이라도 땅에 함부로 버리지 못할 일). 一, 燭火 3個를 淸水卓前에 點함.
一. 기도심고는 畢히 布德天下 廣濟蒼生의 大願으로써 함.
一. 기도심고를 필한 후 呪文(神師靈氣我心定無窮造化今日至)을 12회씩 細音으로 誦함.
一. 기도기간 내에 酒草를 금하며 家內 淨潔을 특히 주의함.
一. 敎區 及 傳敎室에 상주한 임원은 該敎區室에서 奉行함.”)
4. 특별기도 참여자와 지방 3·1운동의 확산
앞서 살펴보았듯이 도선암의 두 차례 기도를 포함하여 우이동 봉황각에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49일 특별기도를 봉행하였다. 앞의 <표 1>에 의하면, 우이동 봉황각 49일 특별기도에 참여한 지방의 주요 인물은 1차 21명을 비롯하여 모두 483명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천도교 지방조직인 지방 교구의 핵심적인 지도자였으며, 3·1운동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경우이다. 1차에 참여한 홍기조, 임예환, 나인협, 박준승 등이 있다. 이들은 지방에서 활동한 중요 교역자였다. 홍기조는 평남 용강 출신으로 당시 道師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홍기조는 민족대표로 참가한 후 일경에 피체된 후 신문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면 일본 제국은 반드시 세계의 대세를 비추어 쉽게 조선의 독립을 허락해 줄 것”으로 답변한 바 있다. (「홍기조 신문조서」.) 이는 3․1독립선언은 ‘선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 민족운동의 ‘점화’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홍기조뿐만 아니라 함께 민족대표에 참여한 평양의 임예환과 나인협, 임실의 박준승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임예환 신문조서 」; 「나인협 신문조서」; 「박준승 신문조서」.)
다음으로 3·1운동 ‘3대 항쟁’으로 널리 알려진 황해도 수안군과 평남 맹산군, 그리고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과 장안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수안군의 경우, 5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안봉하와 6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김영만이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수안교구장이었던 안봉하는 3월 1일 곡산교구장 이경섭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안봉하는 김영만 등과 함께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키로 하고 관내 교인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3월 3일 오전 6시경 수안교구에 집결한 교인들은 안봉하, 김영만, 한청일, 이영철 등이 태극기와 궁을기를 들고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군중을 이끌던 이영철은 금용조합 앞에서 “우리들은 오늘부터 일제의 통치를 벗어나서 자유민이 되고, 조선국의 목적인 독립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호응하였다. 이어 헌병대 앞에서도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헌병들의 발포로 9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다.
맹산군의 경우, 2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방기창을 비롯하여 3차의 이관국, 5차의 방진원, 6차의 김치송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덕천교구 공성원 현성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맹산교구는 교구장 문병로 외에 길응철, 방기창, 정덕화, 김치송, 이관국, 방진원 등이 주오하여 3월 6일 천도교인 6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3월 10일 일제 경찰이 만세시위 주동자를 검거 고문한 것을 항의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천도교인 다수가 희생되었다.
그리고 수원군 우정면과 장안면의 3·1운동은 7차 특별기도에 참가하였던 김흥렬, 3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한세교와 이성구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수원교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일경의 급습으로 수원에서는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팔탄면의 백낙렬 등과 협의한 후 기독교, 유교와 연합하여 3월 31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때 우정면주재소 가와바다(川端) 순사가 살해되었는데, 이를 핑계로 일제는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대학살극을 자행하였는데, 당시 천도교인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성주현, 「수원지역의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재조명」, 『수원문화사연구』 4, 수원문화사연구회, 2001을 참조할 것.)
이외에도 우이동 봉황각 특별기도에 참여하였던 교역자들이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지방의 3·1운동을 확산하는 데 기여하였다.
2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황학도, 김수옥, 유계선과 3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이초옥은 평양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평양교구장 우기주는 김수옥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받아오게 한 후 황학도의 집에서 김수옥, 유계선, 이초옥, 송영율, 김형국, 이기열, 이성삼 등과 함께 협의한 후 독립선언서를 관내 전교실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양의 천도교인들은 3월 1일부터 8일까지 기독교인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성천군의 만세운동 역시 49일 특별기도에 참가하였던 이돈하(2차), 나종선(3차), 한병순(5차), 김택서(5차), 김문홍(6차)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4일 천도교인과 군중 4천여 명을 이끌고 성천읍 상부리 헌병대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20여 명이 사망하였다. 용강군에서는 1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홍기억이 중심이 되어 3월 2일부터 6일까지 교구를 비롯하여 면전교실이 있는 곳마다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평남 안주군은 2차 특별기도에 참가한 김안실과 3차에 참가한 김명준이 3·1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안실 교구장은 당시 교회 간부였던 김광호, 김춘택 등과 의논하는 한편 보통학교 교사이며 천도교인 차신정을 평양교구로 파견하여 3·1운동의 실정을 파악케 하였다. 이어 3월 3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기독교측과 연대를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3월 3일 오전 11시경 율산공원에서 5천여 명의 군중을 동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도교인 연성운, 이의범 등이 현장에서 일제의 총격에 희생되었고, 김춘택 연성도 유봉수 등이 검거되었다.
평북 의주의 만세운동 역시 특별기도에 참가한 최석련(2차), 최안국(5차), 안국진(3차), 김처길(3차), 김국언(4차)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선천교구의 김상렬(6차 특별기도에 참가)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후 최동오 등과 함께 3월 2일 남문 앞 광장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리더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계속)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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