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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동학혁명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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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동학혁명기념일

  • 편집부
  • 등록 2025.05.1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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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에 대한 교단의 인식


천도교의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은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였다. 동학혁명 직후에는 ‘반역’ 또는 ‘역적’이라는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고향을 등지거나 은신생활을 통해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동학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갑진개화운동과 3.1운동 등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주제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단에서는 동학혁명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동학혁명과 관련된 가장 앞선 기록은 『천도교회월보』 116호에 게재된 「천도교 61년 연보」의 ‘포덕 35년조’가 아닌가 한다. 당시 이 기록에는 ‘동학란’ 또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포덕 36년조’에 의하면 ‘전봉준동란(全琫準動亂)’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동란’이 가지는 의미는 “폭동, 반란, 전쟁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일”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최근까지도 우리의 익숙한 ‘6․25동란’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관리(官吏)의 학정(虐政)을 개혁(改革)하고 생민(生民)의 도탄(塗炭)을 구제(救濟)”로 규정하고 있다. (민영순, 「천도교 61년 연보」, 『천도교회월보』 116호, 1920.4, 28쪽.)

 

이와 같은 ‘동란’의 인식은 2년 뒤인 1922년 의암성사가 환원하였을 때는 ‘갑오(甲午)의 혁명(革命)’ 또는 ‘갑오혁명(甲午革命)’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앞선 ‘동란’의 인식보다는 상당히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계곽청(政界廓淸) 민권옹호(民權擁護)의 기하(旗下)에서 혁명(革命)의 거화(炬火)를 거(擧)하다”라고 하여 혁명으로서의 인식을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성사일대기」, 『천도교회월보』 임시호, 1922년 5, 8-9쪽.)

 

특히 이때의 ‘갑오혁명’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이후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1924년 황의돈이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는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식 또한 ‘민중운동’ 또는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1920년대 초기의 ‘동란’과 ‘혁명’의 용어는 이후에는 좀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즉 ‘동란(東亂)’, ‘동학란(東學亂)’, ‘혁명(革命)’,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 ‘민중혁명(民衆革命)’, ‘갑오혁명운동(甲午革命運動)’, ‘갑오혁명란(甲午革命亂)’, ‘동학당란(東學黨亂)’ 등으로 다양하게 또 혼용되어 표기되고 있다. 그리고 『천도교창건사』에서는 ‘갑오동란(甲午東亂)’과 ‘갑오동란(甲午動亂)’으로 혼용되고 있다.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34, 70쪽(제2편).)

 

이는 전통적 역사인식에서 종교적 의미의 혁명뿐만 아니라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이라는 의미에서도 ‘혁명’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동학혁명에 대한 용어는 다양하고 혼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나 인식에 대해서는 ‘혁명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으로 천도교청년당은 1926년 4월 7일 제32회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천도교청년당이 동학혁명 기념식을 갖기로 한 4월 7일은 ‘황토현전투에서 동학군이 승리한 날’이다. 「갑오동학난의 자초지종」에 의하면, 4월 7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月 7日에 古阜 42里 되는 黃土峴에서 全琫準軍과 接戰하여 死傷 千餘를 남기고 餘地없이 敗退하니 이것이 東學革命運動의 첫 烽火이었다.(일기자, 「갑오동학란의 자치자종」, 『개벽』 68, 1926.4, 39쪽.)



즉 천도교청년당은 동학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을 처음으로 격파하고 대승한 날을 동학혁명 기념일로 보았고, 이날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교단에서 처음으로 동학혁명 기념식을 봉행하려고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기념식이 거행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1926년 5월호 『개벽』에 동학혁명 기념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비해 4월 5일 천일기념식을 봉행하였다는 기록은 있다. 동학혁명 기념식도 거행되었다면 당연히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지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은 두 번 다시 가져보지 못했다. 이는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천도교청년동맹은 원래 ‘동학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던 적이 있었다.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 개최


일제강점기 동학혁명 기념식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였던 천도교단은 해방 후 1947년 2월 9일 첫 기념식을 봉행하였다. 당시의 동학혁명 기념식에 관한 언론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54년 전 민주건국을 위하여 빈천한 농민대중을 중심으로 봉건사회를 파타하고 궐기한 역사적 혁명전쟁을 일으킨 동학혁명운동을 기념하고자 천도교청우당중앙위원회에서는 오는 9일 하오 1시에 천도교 강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 한다.「동학혁명운동의 54주년 기념」, 『대한독립신문』 1947년 2월 7일자.



53년 전 우리 조선의 봉건사회를 타도하고 서민 부녀 하층계급을 타파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봉기한 동학혁명기념일을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기념행사위원회에서는 지난 9일 하오 1시경 시내 천도교당에서 회원 수백 명 참석 아래 거행되었는데, 먼저 이우영 씨 사회로 시작되었고 축사로 본사 사장 최동오 씨의 열변에 박수 열광으로 종막을 지은 다음 동학혁명 당시 당원이었던 오지영 씨의 동학운동 회고담이 있은 후 기념행사 위원이 오지영 씨에게 기념품 기증이 있은 다음 오후 4시 반경 폐회되었다.「조선민주혁명의 선구 동학투쟁 기념식 성대」, 『대동신문』, 1947년 2월 11일자.

 



이 두 기사에 의하면, 해방 후 첫 동학혁명 기념식은 2월 9일 중앙대교당에서 거행되었다. 기념식 행사를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관을 역임하였고 대동일보 사장이었던 최동오의 축사와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던 오지영의 회고담이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청우당은 왜 2월 9일에 기념식을 가졌는 지에 대한 해명이 없다. 일반적으로 동학혁명하면 기념일로 고부기포(1월 10일), 백산기포일(3월 21일), 황토현전승일(4월 7일) 등이 연상되는데, 2월 9일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고부기포가 일어난 날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2월 9일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동학혁명과 관련된 기념식이 역시 거행되지 않았다. 다만 동학혁명 기념식에 앞서 1946년 10월 20일 천도교청우당 홍천지부의 주최로 홍천을 비롯하여 춘천, 원주, 정선 등지에서 희생된 동학혁명군을 위령제를 하였다. (「갑오운동 희생자 위령제 거행 준비」, 『대동신문』 1946년 10월 19일자.)

 


동학혁명 67주년에 사회적 합의로 ‘기념일’ 제정


해방 후 한 차례 동학혁명 기념식을 가진 교단은 1961년 4·19혁명을 계기로 동학혁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기념일 제정을 서둘렀다. 이는 그동안 교단에서 동학혁명 기념식을 적정한 날을 정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방편적으로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제강점기에는 4월 7일 황토현전승일에, 해방 후에는 2월 9일에 각각 기념식을 거행한 바 있듯이 특정한 날로 기념일로 정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19혁명을 계기로 혁명정신이 사회적으로 고양되자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하여 동학사상을 사회적으로 확산하고자 하였다. 즉 “동학사상은 우리 민족의 사상이요 인간평등의 사상이다. 동시에 동학혁명운동은 안으로 부패폭정을 혁신하고 밖으로 외세침략을 반거한 운동이다. 이 혁명사상은 세계혁명사상 어느 것에 비하여도 가장 새로운 것이었다. 이렇게 성스럽고 새로운 혁명운동이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에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으로부터 백만 대중이 의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혁명의 의의를 국민 전체의 사상으로 계속 거양하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을 지하에 묻힌 옥석과 같이 민중의 머리에는 무관심 몰이해하고 지내왔다” (「동학혁명 67회 기념식」, 『신인간』(속간 19호), 1961.4, 14쪽.)라고 하여, 그동안 동학혁명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를 스스로 자인하였다. 이에 따라 교단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교단은 1961년 3월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구성하여 혁명의 의의와 약사를 밝히는 한편 동혁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여 혁명의 기념을 민중과 더불어 지키고 이를 계승키로 하였다. 이에 교단은 3월 19일 동학혁명기념준비위원을 대표하여 신숙(申肅, 동학당 대표위원), 장기운(張基云, 천도교 교무관장), 오익제(吳益濟) 등 3인과 사계(斯界)를 대표하는 김상기(金庠基, 서울대학교 교수), 장도빈(張道斌, 단국대학교 교수), 최인욱(崔仁旭, 작가), 신일철(申一徹, 고려대학교 강사)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무려 4시간 동안 좌담회를 갖고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다. 조선일보사는 좌담회를 갖게 된 동기를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에 의의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오늘 (3월) 21일은 민중운동의 전통으로 깊이 새겨야 할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68년 되는 날이다. 민중의 힘이 과시된 이 운동은 당시의 봉건제와 침략주의에 항거해서 봉기했던 것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데 그 정신이 있었다. 이를 즈음해서 천도교중앙총부와 본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인 동 기념행사의 하나로서 사계학자들을 모시고 동학혁명의 뜻을 살피는 좌담회를 다음과 같이 마련했다. 오늘날까지는 이 혁명을 기념할만한 일자 표증이 확실치 못하였던 바, 최근 여러 기록을 수집 분석해본 결과 격문을 발표하고 봉기한 날이 3월 21일이라는데 확인되어 처음으로 기념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이 기사에 따르면, 그동안 동학혁명을 기념할 만한 일자가 제대로 없었는데, 역사적 사료를 분사해본 결과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명칭도 ‘동학혁명’이라고 확증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3월 21일을 동학혁명기념일로 제정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오익제) : 기록에 보면 고부에서 처음 농민봉기가 자연발생적으로 갑오년 정월에 일어났다가 이용태가 탄압을 심하게 되자 3월에 만여 명의 동학군이 일제히 궐기된 것으로 되어있더군요. 그런데 최인욱 선생께서는 「草笛」을 쓰고 계신데, 거기에 3월 21일 날 동학혁명이 본격적으로 거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혹시 고증자료라도....

최인욱 : 저는 소설을 쓰면서 이 역사를 제 주견 하에서 다 쓸어보았는데요 정월의 고부의 봉기와 3월 동학기포는 단계를 짓는 것이 어떨까 해요. 물론 정월 고부의 봉기가 동학혁명의 전초적 조건 즉 전초전의 역할이 되었지만 정월 고부의 그것은 그 전년에 빈번했던 민란과 성격이 거의 같고 다만 규모가 크다 뿐이지요. 그래서 과거에는 단계를 짓지 않고 정월 고부의 봉기를 그대로 하나의 동학의 내용으로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면 그 정월의 고부민란이 그대로 수습되지 않았는 데서 점점 그것이 확대되어 가지고 3월에 이르러 드디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 호남의 여려 동학접주들이 격문을 발하고 소위 의식적으로 기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정월 고부의 봉기는 민란으로서의 성격이었고 동학혁명은 소위 기포형식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또 격문으로 보나 확실히 3월에 와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헌들을 고증해 볼 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3월 21일로 소설에 쓰게 된 것은 고부민란에서부터 경과를 시간적으로 따져서 추상적으로 인정했는데 지금 여러 군데 기록에서 3월 21일이라는 것이 고증적으로 문헌에 나타나는 것 같은데...

사회 : 기록에 보면 「동도문변」과 또 당시의 일본공사관기록에 3월 21일로 드러나더군요.

최인욱 : 그 시일 문제는 다른 문헌이 나오지 않는 한 대단히 유력시 되고 있습니다.

김상기 : 그런데 그대의 기록은 양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고 음력을 표준으로 한 것도 있어요. 정월 고부봉기의 중심인물이 역시 전봉준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이 졸창간의 일이 아니라 그 전해 계사년 겨울부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소위 동학의 남접 중진들의 움직임이 있었고요. 그 1월설에 있어서는 저도 30여 년 전에 알아보았습니다만 기록에도 보고 또 그때 난을 겪은 고부지방의 부호들에게 물어보고 특히 전봉준의 처숙이 송희오(宋喜五)인데 그의 손주 손용호라는 분이 정월 14일로 얘기해요. 이렇게 정월에 일어나고 고부에서 조병갑을 쫓은 후 박원명이가 임명되었는데 아주 부드럽게 다스려서 모두 갈아왔다가 이용태가 안핵사로 와가지고 포악한 짓을 하니까 다시 3월에 일어났다고 알려지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좀 더 신중하게 일자를 고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일철 : 김 선생님이 쓰신 책 가운데 『동학과 동학란』을 보면, 1893년 겨울부터 표면화했는데 그 만석보를 파괴한 것이 봄에 하지 않았나요. 봄이면 1월과 3월 사이로 볼 수 있는데...

김상기 : 만석보 문제는 정월 14일로 저는 기억되는데요.

사회 : 그러면 만석보 파괴 일자 문제는 따로 기록에 볼 수 있으니까 별문제가 아닌가요. 정월에 고부에서 봉기한 것도 사실이고 3월에 또한 기포한 것이 사실이고 6월에 집강소 시대로 들어갔다가 9월에 재기포한 것이니까요. 이 기포일자 문제는 이 정도로 그치면 합니다.

최인욱 : 결국 정월에 봉기했다가 백성에게 심한 피해가 오는데서 다시 본격적인 계획적인 조직적인 하나의 기포가 거기서부터 발단된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역사적 관찰에 있어서 기포의 단계를 어디서부터 짖느냐 하는 것은 그 연구하는 분들의 하나의 견해차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장도빈 : 그런데 애초부터 고부의 봉기가 전봉준의 지도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봉준은 처음부터 고부봉기를 일으켜 가지고 혁명을 이끌어 나가려는 사상을 가진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조사해보면 이것은 전봉준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좌담회 갑오동학혁명의 의의-그 67주 기념일을 맞아」, 『조선일보』 1961년 3월 20일자.)



위 좌담회 내용에 의하면, 동학혁명기념일을 3월 21일로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논점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바로 동학혁명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점이다. 최인욱은 3월 기포, 김상기는 신중론, 장도빈은 고부기포에 각각 동학혁명의 기점을 두고 있다. 즉 최인욱은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전 단계로 인식하였으며, 김상기는 고부기포와 3월기포의 연결과정에서 좀 더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장도빈은 전봉준의 역할을 볼 때 고부기포를 동학혁명의 기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로 정하는 데는 무난하게 합의를 도출하였다. 당시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천도교단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김상기와 장도빈, 그리고 문학계를 대표하는 최인욱, 신진학자인 신일철 등이 참여하여 확정하였고, 이를 언론계인 『조선일보』가 뒷받침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 후 첫 기념식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처음으로 정해졌다는 점에서 기념일 제정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가진 첫 기념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민족저항운동 사상 빛나는 한 전통으로서 기리 새겨야 할 갑오동학혁명 제67주년 기념식이 지난 3월 21일 천도교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천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상오 11시 장기운씨 사회로 식이 진행되고 이영복 씨의 개회사와 오익제 씨의 약사보고에 이어 신숙씨의 기념사가 있었으며, 곽상훈 민의원 의장과 조한상 씨(정계 대표) 그리고 장도빈(학계 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식이 끝난 후에 이항녕 선생과 최인욱 선생 및 신일철 선생 세 분을 모시고 기념강연회가 있었는데 모인 청중이 시종 감격하여 마지않았다. (「갑오동학혁명 기념-스냅」, 『신인간』(속간 19호), 1961.4, 표지 3쪽.) 



기념일 제정 이후 첫 기념식은 1961년 3월 21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천도교인과 서울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천도교단을 대표하여 좌담회에 참석하였던 장기운, 신숙, 오익제 등이 주도하였으며 외부 인사로는 민의원 의장 곽상훈, 정계를 대표한 정한상, 학계를 대표한 장도빈 등이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기념식 후에는 최인욱, 이항녕, 신일철 등 제씨가 기념강연을 하였다. 

첫 기념식은 사회적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계, 학계, 문학계 등에서 대표들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첫 기념식 이후에도 동학혁명 기념식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제정된 동학혁명기념일인 매년 3월 21일에 개최되었다. 

제68주년 동학혁명 기념식은 3월 21일 12시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이지형 국민운동본부 차장이 축사를 하였다. (「동학혁명 68주년 21일 기념식 거행」, 『조선일보』 1962년 3월 21일자.) 69주년 기념식은 3월 21일 오후 1시 국민회당에서 열렸다. (「21일 기념식 동학혁명 69주년」, 『동아일보』 1963년 3월 21일자.)

69주년 동학혁명기념일을 맞아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동학혁명의 의의를 밝힌 바 있다.


(3월) 21일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혁명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불씨를 던졌던 동학혁명의 제69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조 봉건사회가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병든 내적 모순을 드러내자 뿌리 깊게 얽히었던 민중의 불만이 약 30년간의 ‘민란의 시대’를 연출,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 질서,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번져 갑오경장이란 역사의 새 물결을 가져온 것이 바로 동학혁명이다. 

착취만을 당하던 힘없는 농민들이 동학당을 지도자로 벌떼처럼 일어났던 이 혁명은 하나의 농민전쟁이었고 계급전쟁이었으며 또한 무력적인 사회혁명임이 분명했다. 머리와 허리에 잡색포를 두르고 손에는 칼, 창과 총기를 든 채 황색 깃발을 나리며 전라도로 충청도로 삼남 일대를 장악하고 서울로 강원도로 달려 연 3백만 동학군이 한결같이 부르짖었던 외침은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동학혁명 21일은 제69주년」, 『경향신문』 1963년 3월 20일자.)



이와 같은 동학혁명의 의의를 기념하는 동학혁명기념일은 3월 21일을 기해 매년 기념식을 갖고 혁명 정신을 기렸다. 다만 처음에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거국적인 기념식이 되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도교단의 기념식으로 축소되었다. 그렇게 진행되어 오던 동학혁명 기념식은 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 1994년 3월 21일 오전 11시 탑골공원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교단은 동학혁명 기념행사에 보다 적극 나서야


1994년 동학혁명 1백주년을 계기로 일부 동학혁명 관련 단체에서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사회적 합의에 따라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고 기념식을 가져오던 천도교단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또한 천도교단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은 혼란을 거듭하였고 관점에 따라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를 비롯하여 관련 단체의 추천을 받은 인사들로 ‘동학농민혁명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념일 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견과 논란을 거듭하였다. 

천도교단은 어느 동학혁명 관련 단체보다도 먼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기념일을 사회적으로 확산하지 못함에 따라 오늘날 이와 같은 동학혁명기념일 제정의 논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제 천도교단은 어느 누구보다도 동학혁명기념일을 제정하였던 그 역사성을 확고히 지켜내야 한다. 그것만이 동학혁명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선열들을 올바르게 기리는 것이며, 그 혁명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글, 성주현(상주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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