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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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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2)

  • 장우순
  • 등록 2026.03.12 18:47
  • 조회수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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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북간도·연해주의 3·1운동 – 한인사회의 내적 논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연구 논문으로, 3·1운동을 국외 한인사회의 시각에서 조명한 글이다. 특히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사상적 흐름 속에서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본지는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새기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아 이 논문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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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근, 『한인 노령이주사 연구』, 서울, 탐구당, 1996, 108쪽.

 


<지난 호에 이어>

원호인은 지주계급을 형성하고, 여호인과 무적자들은 소작이나 임금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무적자들은 3만여 명으로 이들까지 포함한 1919년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 인구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십월혁명십주년 원동기념준비위원회 편찬, 『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 해삼위도서주식회사, 1927, 80쪽.)

연해주 한인사회는 북간도와 같은 급속한 증가세는 보이지 않고, 원호인과 여호인 비율이 3:7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한인사회 내부의 계급적 모순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원호인과 여호인은 거주지가 구분되어있었고, 한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으며, 서로 통혼도 하지 않았다. 연해주 한인사회에 내재된 분열의 씨앗은 훗날 파괴적으로 드러나고 만다. (1918년 이동휘 등이 여호인 중심으로 결성한 한인사회당-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원호인 중심의 국민의회-이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의 갈등은 코민테른 6차대회가 조선공산당 해체를 결정할 만큼 분열적인 것이었다. 1921년 자유시에서 국민의회 측 자유대대가 비무장 독립군에게 자행한 무자비한 학살은 한인 무장세력 장악을 놓고 상해파와 벌인 극단적 갈등의 결과였다. 그 갈등의 근원에 원호인과 여호인의 뿌리 깊은 반목이 존재한다.)

  

2. 3·1운동을 전후한 한인사회의 정세


북간도 한인사회는 인구증가, 경제 발전,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2세대 청년·학생층의 성장 등으로 사회의 전체 역량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학생층의 증가는 기존의 민족운동이 가져보지 못한 역동성과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한인사회의 경제적 발전, 청년학생층의 성장, 기성 운동단체가 구축한 단단한 운동의 저변 등은 북간도 한인사회의 내재적 동력으로 축적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간민회 등의 활동은 북간도 한인사회에 강한 민족의식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자치와 귀화운동에 앞장서던 간민회가 강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고, 이를 전파하는데 앞장서는 등 노선의 변화를 겪은 것은 간민회 결성 시기 결합한 이동휘 계열의 영향으로 보인다.)

한인들은 북간도 대부분을 개간했지만, 신분적으로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일제 침략을 경계한 중국당국은 합법적 토지소유를 명분으로 귀화를 강요했고,(간도협약으로 ‘잡거구’ 한인들은 합법 거주와 재산권을 보장받았다. 토지 역시 ‘전민제(佃民制)’라는 방식으로 소유, 경작할 수 있었다. 전민제는 비귀화 한인들이 돈을 모아 귀화 한인 명의로 토지를 사고, 돈의 비율대로 토지를 나누어 소유하던 것을 말한다.) 

민족운동의 발흥을 경계한 일제는 한인의 일상생활을 고강도로 감시하는 등 2중의 통제가 한인을 압박하였다. 신분적 불안정은 민족모순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고, 민족의식은 점차 생존권과 다르지 않은 전략적 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공유된 민족의식 또한 운동의 주체적 동력으로 축적되어갔다. 1914년 일제와 중국당국의 압박으로 북간도 한인사회의 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간 닦은 경제 기초, 교육운동과 사회운동, 이를 통해 확산된 민족의식, 청년·학생층의 성장 등을 기반으로 운동의 에너지는 폭발의 임계점을 향해 가파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연해주는 독립전쟁의 전초기지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연해주 의병은 1906년 최재형이 처음 조직하였다. 1908년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고, 1910년 6월에는 유인석, 이범윤, 홍범도, 이상설 등의 주도로 ‘13도의군’이라는 통합의병체가 조직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국내의 명망있는 애국지사들이 조직적으로 망명,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강고한 민족의식과 함께 선진적 정치의식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1911년 결성된 권업회 (13도의군과 성명회등이 발전하여 1911년 5월 29일 결성되었다. 회장은 최재형, 부회장은 홍범도였다(「朝憲機 第1389號, 第318號-6월 20일 이후 浦潮斯德지방 鮮人 동정 (1911. 7. 5.)」, 『일본 외무성기록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는 권업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단체였음을 구성원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홍범도, 최재형, 안정근, 안창호, 이범석, 신채호 등이 참여하였다(「6월 14일 木藤通譯官이 嚴仁燮으로부터 얻은 정보 (1911. 6. 28.)」, 『일본 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권업회는 1914년 13개 지부, 회원 수 8,579명으로 확대되는데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 고려대학교출판부, 1967, 80-81쪽.) 전체 한인 인구 1/10에 해당하는 수의 회원을 확보한 독립운동 단체의 존재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높은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보여준다.  

 

한편, 연해주 한인들은 1907년 『해조신문』, 1908년 『대동공보』, 1911년 『대양보』, 1912년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을 창간했다. 이들 신문은 민족의식과 함께 근대 지식, 선진 정치의식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권업신문』은 간도와 한반도에 반입되어 세계 한민족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민족적 의제를 공유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연해주에서는 일찍이 한민회(「韓人居留民會ニ關スル件 (1910. 3. 24.)」, 『한국근대사자료집성 (要視察韓國人擧動 3--要視察外國人ノ擧動關係雜纂 韓國人ノ部 (九)』.) 한민회는 한인거류민회(韓人居留民會)의 약칭으로. 『대동공보』를 발행하고, 한민학교의 경비를 충당하였다.) 와 대한청년교육회(1907년 연해주에서 설립된 교육운동 단체. 같은 해 공진회와 통합, 대한청년교육연합회로 개편됨.) 등이 여러 학교를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해조신문(1908, 4, 20)』에 따르면 1908년 연해주에 동명학교, 동흥학교, 창동학교, 의동학교, 선흥의숙, 연추학교, 모현의숙, 수청학교, 금당서숙, 흥원학교 등의 11개 학교가 설립, 운영 중이었다.)

한민회는 1909년 계동학교를 한민학교로 확장, 민족교육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는데 그 수용 규모가 240명에 달했다. (「朝鮮人狀況取調ニ付在長春守田大佐ヨリノ依賴ニ關スル件(1909. 11. 25.)」, 『한국근대사자료집성 (要視察韓國人擧動 3--要視察外國人ノ擧動關係雜纂 韓國人ノ部 (九) 』. 1909년 10월 한인거류민회가 개편되면서, 계동학교를 확충, 소학교들을 통합할 예정이라며 경비 충당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당시 연해주에는 최소 70여 개 이상의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윤병석, 앞의 글, 480쪽.) 일정 인구 기준 학교 수에서 한반도나 다른 지역 한인사회를 압도하는 보급률이었다. 이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교육열이 세계 한인사회 가운데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권업회 회원 수와 마찬가지로 한인사회의 높은 민족의식과 정치의식과 연결되는 지표이다. 

권업회는 1913년 북간도 간민회 계열 인물들과 함께 왕청 나자구에 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를 개설하고, (뒤바보, 「김알렉산드리아전」, 『독립신문』 1920년 4월 20일자. 이동휘 계열 주도로 설립되었다.)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는 등 무력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병력 29,365명, 총기 13,000정, 총탄 50만 발 등 강력한 군세를 보유했지만, (金正柱, 『朝鮮統治史料』 5, 東京, 한국사연구소, 1970, 664쪽∼665쪽.)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직접적인 군사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이 병력에는 간민회 계열 인물들이 북간도에서 설립, 운영한 학교에서 배출한 청년·학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연해주 한인사회는 미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09년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이상설, 정재관을 연해주와 간도에 파견, 1911년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와 ‘만주리아지방총회’를 설립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국권수호운동Ⅱ』, 1987. 679-680쪽.

 연해주와 간도의 한인사회는 독립이라는 전략 아래 해외 한인사회와 연결하며 한민족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3. 이동휘와 주변 인물들의 활동


우리가 이 지역의 운동에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북간도와 연해주가 이동휘 계열 인물들 (이들은 북간도와 수많은 단체를 결성하고, 운동을 주도하며 두 지역의 운동을 통합적으로 재구성헸다. 김립, 박애, 계봉우, 안정근, 김하석, 김하고, 윤해, 구춘선, 이용, 박진순, 한형권 등 다수의 활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 활동으로 상호 연결되어 민족 관련 의제에 대해 하나의 지역처럼 연동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연해주의 권업회, 권업신문, 조선인거류민회, (「憲機 제1156호 제285호- 5월 30일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지방 조선인 정보(1911. 5. 14.)」,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 한민학교, (「朝憲機 제110호-최근 排日氣勢의 槪況과 間島방면의 不穩說에 대하여(1914. 2. 14.)」,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4』.), 애국저금단, (「朝憲機 제250호-排日鮮人 등이 조직한 愛國貯金團에 관한 건(1916. 5. 23.)」,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한인신보, (「機密 제43호-조선인의 近狀에 관한 보고의 건(1917. 7. 12.)」,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한인사회당,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3-3·1운동』, 1988, 461쪽.) 한족총회, (「朝憲機 제364호-조선인 革命黨員의 역사에 관한 신문기사에 관한 건(1918. 6. 10)」,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전로한족대표자회의, (「朝憲機 제429호-全露韓族代表者會議에 대한 過激派의 행동에 관한 건(1918. 7. 11.)」,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청구신보, (「機密 제41호-排日鮮人 李東輝에 관한 건(1918. 3. 27.)」,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노인동맹단, (「機密 제46호-露領在住 鮮人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1919. 3.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국민의회 (「電報 補參 제439호-露領在住 조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1919. 3. 4.)」,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등과 간도의 간민회, (「朝憲機 第260號; 秘受 1137號-墾民會 組織總會에 관한 건」,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2』.) 동제회, (「在間島 排日鮮人結社 同濟會에 관한 건 (1914. 10.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만국개량회. (東洋拓殖株式會社, 『間島事情』, 大正 7年, 882쪽.) 간도국민회, (「朝憲機 제742호-不逞鮮人의 暴擧說(1914. 11. 26.)」,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대전학교, (뒤바보, 「김알렉산드리아전」, 『독립신문』 1920년 4월 20일자.) 북빈의용단(北濱義勇團), (「機密 제12호-排日鮮人이 조직한 北濱義勇團에 관한 건(1915. 6. 22.)」,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독립의군, (「機密 제15호-東方 露支國境線 부근지역에서의 鮮人 동정에 관한 건(1916. 3. 6.)」, 『일본외무성기록-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철혈광복단 등과 이밖에 수많은 민족운동단체들에 이동휘 계열의 인물 상당수가 중복적으로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이들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고, 운동을 주도하면서 연해주와 북간도의 민족운동을 선도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18년 4월 결성된 한인사회당은 아시아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으로 한인 민족운동이 사회주의의 혁명적 전망까지 끌어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인 민족운동이 시야를 넖히고 다양한 전술, 전략을 확보하는 확장성으로 연결되었다. 실제로 일정 시기 레닌과 코민테른의 이들에 대한 지원은 독립전쟁이나 초기 사회주의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이들은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적극적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지역의 한인들을 의식화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을뿐 아니라 세계 각지 한인사회의 언론사들과 교류하면서 전 세계 한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민족적 의제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조직활동과 역할은 3·1 운동과 독립전쟁이 발발하는 기초 역량이 되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북간도와 연해주는 대한인국민회, 중국 관내 민족운동 세력, 일본 유학생 단체 등과 적극적으로 연결을 주도하며 세계 한인네트워크의 중심지로 만들어갔다. 3·1운동이 임박했던 1918년 11월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선발하기 위해 이동휘, 문창범, 김립, 윤해, 계봉우, 오영선, 김하석, 이동녕 등과 간도의 김약연, 정재면, 상해의 여운형 등이 빈번하게 회합하는 것이 확인되는데, (「政機密送 第47號-朝鮮人槪況 送付의 건 (1919. 3. 27.)」, 『일본 외무성기록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이러한 상황은 당시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의 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동휘 계열의 인물들이 세계 한인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민족을 단위로 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설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1910년대 북간도, 연해주 한인사회는 3·1운동과 같은 혁명적 변혁을 추동할 내재적 역량을 축적해가고 있었다.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는 일본, 중국, 러시아의 정책에 따라 시기별로 다른 운동의 전술을 구사해야 했지만, 전략적 차원에서는 일관되게 총체적 역량을 키우면서 운동과 사회의 질적 도약이라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질적 도약은 ‘근대 민족’의 성립과 민족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근거로 추동되는 운동의 등장을 의미하며, 새롭게 정의된 민족 정체성을 근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끄는 국가적 체계 안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등 운동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북간도의 간민회, 연해주의 권업회는 당국의 탄압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운동은 일시적 위기를 맞지만, 이들 사회 내부는 지속적으로 총체적 역량을 축적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이행하기 위해 ‘경계’ (경계의 가치는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하는 것에 있지 않고, 충돌, 융합, 통합, 전도, 간섭 등을 통해 질적 변화의 기회를 부단히 확장하는 것에 있다. 경계는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여 기존의 가치를 전도하고, 새로운 질적 이행을 위해 에너지와 가치를 축적하는 역동적이고, 다변적인 공간이자 과정이다. 한인사회에서 수행된 경계의 확장은 운동과 사회라는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질적 변화를 추동하고 있었다.)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일시적 위기는 역설적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적 전이를 가능하게 할 축적과 준비의 과정이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세계질서의 재편, 패전국의 식민지국가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다 준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민족독립의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러시아혁명은 전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혁명의 전망과 사회주의 이념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와 인접한 연해주와 북간도 한인사회, 이들 사회를 통해 러시아와 연결되었던 다른 지역의 한인사회 역시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파리강화회의와 러시아혁명의 성과를 운동의 전망에 포용하기 위한 논의가 이동휘 계열 주도로 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에 구축된 한인네트워크를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 성과 역시 결과적으로 내적 경계를 확장하고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에 흡수되어갔다. 

              


Ⅳ. 3·13운동과 3·17운동의 전개


  1919년 초, 연해주, 중국 관내, 일본, 미주, 한반도 한인사회와 연결되어 있던 북간도의 민족운동 세력은 기독교 대전도회의 총회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연해주에 김약연, 정재면을, 한반도에 계봉우를 파견하였다. (四方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독립신문』 1920. 1. 10.) 김약연 등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결성에 참여, 국내외 민족운동 지도자들과 독립선언서 작성과 선포, 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출을 협의하고, 연해주와 함께 같은 날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한편, 2월 18일에는 간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33인이 박동원(朴東轅)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북간도의 학생들 역시 2월 중순부터 시위운동을 위해 단체를 조직, 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월 중순 명동, 정동, 광성학교 학생들 주도로 ‘기독교동지청년회’를 결성하고, 연설단을 조직, 북간도 한인 대중들에게 반일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명동, 정동학교 학생들은 시위대 보호를 위해 320명의 ‘충렬대’를 조직하고 김학수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학생들은 외지에서 총기를 구하는 한편, 최경호를 단장으로 하여 자위단도 조직하였다. (김양, 「중국 조선 민족의 3.6반일시위운동과 3·13반일시위운동」, 『아시아문화』 제 15호,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2000, 57쪽,) 

3월 17일 연해주와 함께 시위운동을 하려 했던 원래 계획은 3월 6일 서간도 환인현에서 7,200명이 참여한 시위가 일어나고, (권립, 『중국조선족사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3, 171쪽.) 3월 7일 국내의 ‘조선독립선언서’가 전해지면서 (강덕상, 『現代史資料』 26, 87쪽.) 3월 13일로 앞당겨졌다. 한인사회와 학생들의 자발적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월 9일 ‘간도한족독립운동의사부’를 결성하고, 3월 13일 용정에서 3·1운동을 지지하는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0일에는 명동, 정동, 광성 학교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선전문’을 북간도 각지에 살포하며 3·1운동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3월 13일 용정 천주교회 광장에는 북간도 전역에서 모인 3만여 명의 한인이 운집했다. 정오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각자 품에 지닌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고, 대회 회장인 김영학(金永學)은 대회 개막을 선포한 뒤, 김약연 등 17인이 서명한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선포하였다. 다음은 공약 3장의 내용이다.


1. 오인들의 이 거동은 정의인의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의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않는다.

2.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표달한다.

3. 일체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공명정대하게 한다. (강덕상, 앞의 책, 41쪽∼42쪽.)


공식 대회 이후 반일시위행진이 시작되어 ‘충렬대’를 선두로 ‘대한독립’이라고 쓴 ‘오장기(五丈旗)’를 앞세우고 일본총영사관으로 향하자 중국 군경이 발포하여 사망자 10명,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하였고, 시위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부상자 중 4명은 치료 중 사망했다. 당일 17인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3월 17일 다시 수천 명이 모여 3·13 희생 열사들에 대한 추도회를 열었고, 5월 1일까지도 간도 곳곳에서 시위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다음은 북간도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발생지역 및 참여 인원이다. (四方子, 「북간도」,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 ; 김양, 앞의 글, 59쪽∼6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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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3·13운동은 3월 13일∼5월 1일, 수십 차례에 걸쳐 북간도 전역에서 연인원 125,000명 이상이 참여한 북간도 한인사회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125,000 명은 기록을 근거로 한 필자의 통계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집회 역시 많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참여한 연인원은 최소 2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3·13운동은 성별, 나이, 직업, 계급, 사상을 떠나 북간도 각 지역 한인들을 하나의 의제로 통합하였다.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독립선언 회의의 결과 연해주 한인사회는 간도 및 국내와 연결하며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북간도에서 3.13운동이 벌어지면서 북간도와 함께 운동을 전개하려던 계획은 차질이 생겼고, 3월 17일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독교청년회’석상에서 김하구가 이를 설명하였고, 신한촌에는 조선이 독립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 3월 13일 용정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연해주의 한인 단체들 역시 3월 14일 각 가정에 태극기를 배포하고 운동기금으로 5루블씩을 거두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학생, 청년 1천명을 북간도로 보내 그곳의 청년단 8, 9천명과 결합하여 국내로 진공할 계획을 세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월 15일에 거행하려던 시위는 박은식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러시아 및 영문 번역이 지연되고, 계엄령으로 인한 탄압에 대한 우려, 러시아 당국의 시위 불허 등의 이유로 잠시 보류되었고, 계엄령이 시행되지 않은 니콜리스크 등지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3월 17일 오후 4시, 한인 2명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러시아어와 한글로 쓴 선언서를 전달했다. 선언서는 대한국민의회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 등의 명의로 되어있었다. 오후 5시, 신한촌 한인들 집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오후 6시부터 여러 명의 학생이 몇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를 누볐다. (「朝憲機 제 148호(1919, 3, 19)」, 『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國會圖書館, 1979, 98쪽.) 일본 영사관이 러시아 당국의 단속을 요구하자 오후 7시 러시아 당국은 시위운동을 금지하고, 한인 학생 2명을 구인하였으며, 신한촌의 태극기를 모두 내리게 하였다. 이튿날에는 러시아 당국의 조치에 반발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였다. 

  니콜리스크에서는 17일 아침 선언서를 발표하고 상당수 한인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중 약 1백 명은 라즈돌리노예에서 시위를 벌이려 했지만, 한인 시위대가 일본군대를 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러시아 민병이 이들을 해산시켰다. (「在外鮮人의 獨立運動槪況」, 騷密 제 968호(1919, 4, 26), 앞의 책, 358쪽.

 4월 7일 녹둔도에서도 태극기가 게양되고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 주도로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오후부터 연해주, 북간도 각 지역 학생들이 몰려와 오후 3시경에는 1,000명이 넘게 운집하였다. 「獨立運動에 관한 件」, 騷密 제 848호(1919, 4, 25), 앞의 책, 341쪽.) 한편, 4월 9일 구사평의 한인 유지 이갑장의 회갑연이 열렸는데, 200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마치 시위운동처럼 잔치를 벌이고 해산하였다. (앞의 자료. 앞의 책, 341쪽.)

 

3·17은 연해주의 이동휘, 문창범, 간도의 김약연, 정재면 등 양 지역 지도자들의 합의로 동시에 진행하기로 하고, 김하석 등을 파견, 국내와도 긴밀히 연결하면서, 당시 한인운동이 구축해가던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가동하여 거족적인 운동으로 전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Ⅴ. 1919년 만세운동과 한인사회


  3·13운동과 3·17운동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운동 과정에서 청년·학생 등 이민 2세대가 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청년·학생층의 성장은 기존의 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운동의 전망을 확산시켰다.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없는 이들에게 조국의 의미는 부모세대와 다르게 해석되었다. 이들은 북간도나 연해주에서 현지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과 교류하며 자란 세대였다. 부모세대는 조국의 독립과 귀향을 꿈꿨지만, 이들에게는 북간도와 연해주가 현재와 미래의 삶의 터전이었다. 부모세대가 생계 때문에 이주를 감행하고, 개척해야 했던 낯선 땅은 현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대들에 의해 고향과 터전으로 재해석되면서 한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타인 밖으로 흩어진 유태인 공동체의 총칭. 본고에서는 해외에 건설된 한인공동체라는 의미.)로서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획득해가고 있었다.   

신세대의 대두는 운동의 세대교체와 질적 변화를 추동하고, 운동의 전략, 전술의 차원에서 기성세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망을 사회로 확산시켰다. 특히, 이들이 주도한 3·1운동은 이전과 이후의 한인사회를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규정하였다. 세계 각지에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 한인네트워크를 통해 전세계 한인이 독립이라는 민족적 의제를 공유하고, 그 실천에 동참함으로써 ‘민족’이라는 세계 보편의 근대적 정체성을 갖춘 ‘역사적 존재로 거듭나는 질적, 혁명적 변화가 수행되었다. 3·1운동 직후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이 수행한 질적 변화를 기반으로 운동을 ‘민족’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재정의하고, 민족의 가치에 기반한, 이전과 차원이 다른 지도력을 성립시켰다. 이후 북간도의 여러 단체가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조직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가 ‘민족’적 의제를 전략으로 내세운 대표기관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3.1운동 이전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는 사회와 운동 두 요소를 중심으로 질적 변화를 위해 경계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한인사회에 혼재한 다양한 가치와 한민족 네트워크가 끌어안은 다양한 사상적, 지역적, 정치적 가치들은 경계를 확장하고 경계에 변혁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을 촉진하였다. 경계의 확장 과정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질적 변화의 과정이었다. 북간도와 연해주를 비롯한 한인사회에서 수행된 경계의 확장은 한민족이 탄생하고, 민족적 가치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의 운동이 전개되는 질적 이행으로 귀결되었다. 

3·1운동 이후 등장한 북간도와 연해주의 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간민회나 권업회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들 지역의 운동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단체를 주도한 이동휘 계열의 인물들이 구축한 인적 기반, 운동의 전술, 전략, 이론, 사상 등을 한인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북간도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함으로써 각 지역의 고립을 극복, 한인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민족운동의 폭과 역량을 확대하였다. (3·1운동 전후 북간도와 연해주의 민족운동은 서로 연동되어 있었고, 특히 무장독립운동 단체는 두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배후에 이동휘 및 이동휘계 인물들이 있었다.) 특히, 이러한 네트워크의 구축 및 통합의 노력은 이동휘가 참여한 임시정부가 1920년 독립전쟁을 계획, 수행할 수 있었던 기본 토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북간도에서는 대한국민회와 북로군정서가 갈등하였고, (기독교도 중심의 간민회와 유교적 복벽주의를 주장한 공교회는 이미 오랜 시간 반목하였다. 대종교계열의 대한군정서가 공교회 세력을 받아들이자, 간민회를 계승한 대한국민회와 갈등이 불거졌다.) 연해주에서는 한인사회당과 대한국민의회의 갈등이 뷸거지고 있었다. 이들 단체 간의 갈등은 운동의 방식, 기득권, 헤계모니 쟁탈전의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실상은 한인사회 내부에 잠재되었던 모순이 운동의 통합, 재편의 과정에서, 외부에서 유입된 충격으로 인해 첨예한 충돌로 발전한 측면이 있다. 종족적, 지리적 공감대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극명하게 다른 환경, 기회, 조건, 문화를 가진 집단 간에는 사상, 문화, 정치, 운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순의 가능성이 있다. 이러힌 갈등은 한인사회 내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논리적 이해가 가능하다. 북간도와 연해주 한인사회, 그 내부의 논리에 착목하지 않는 한 그 표방과 충돌이 의미하는 맥락,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작동하던 시스템과 방식, 그 결과로서 진행된 운동의 총체적 모습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끝>

 

 

글, 장우순(한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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