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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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66년 11월 16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내가 생각하는 신인간""내가 생각하는 신인간" 포덕 166(2025)년 11월 16일 신인간사 주간 오암 박길수 -
포덕 166년 11월 9일 중앙대교당 시일설교 "포덕, 어떻게 할 것인가"박인준 교령, “AI 시대의 포덕은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 수운·해월의 정신을 통한 포덕의 현대적 재해석…전국 순방 통해 교화 혁신 의지 밝혀 포덕 166년 11월 9일 봉행한 시일식에서 박인준 교령은 ‘포덕’의 참된 의미와 이를 오늘날 AI 시대에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했다. 박 교령은 “포덕은 나의 수행을 넘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덕을 베푸는 삶 전체”라고 강조하며, 천도교 핵심 가치의 시대적 확장을 제시했다. 포덕의 의미와 수운대신사의 가르침 박 교령은 먼저 포덕의 본질을 수운대신사의 가르침에서 찾았다. 수운대신사가 “사람을 하늘같이 모시는 길(侍天主)”을 백성들에게 전하며, 자신의 마음을 닦는 수도(修道)를 넘어 타인을 돕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행을 강조했던 점을 상기시켰다.이어 “AI 기술의 급속한 확산 속에서 인간의 가치가 흔들릴 수 있지만,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인간의 덕이며, 이것이 바로 포덕의 핵심”이라고 강조하였다. 수운·해월의 숭고한 희생과 제자들의 정성 박 교령은 교단의 뿌리가 된 숭고한 희생을 되짚었다. 수운대신사와 해월신사가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몸으로 도를 실천하며 제자들과 함께 나라와 백성을 위한 포덕의 길을 걸었던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참된 포덕은 자기희생과 봉사에서 시작된다”며, 오늘날 교인이 나아가야 할 길은 말이 아니라 행동, 이론이 아니라 실천임을 역설했다. 천도교 쇠퇴 문제와 AI 시대의 새로운 포덕 방안 제시 박 교령은 “천도교의 쇠퇴는 교단의 본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로만 도를 전해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포덕 실천 방향으로 △가정에서의 포용과 화합 실천 △교단 조직 간 연대 강화 △지역사회 속에서의 봉공 확대 △청년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실질적 교화 콘텐츠 개발 등을 제안하였다.“천도교인 각자가 ‘작은 모범’이 되는 삶을 살 때, 가족과 이웃, 사회 전체가 변할 수 있다”며 지상 천국 건설의 구체적 길을 제시했다. 전국 순방 통해 교령 직무에 새 활력…현장 중심 교화 강조 한편 박인준 교령은 지난 4월부터 남해, 부산, 경주,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연속적인 교령 순방 및 교육자 간담회를 진행해 왔다. 각 지역 교역자와 교인들을 만나 교화의 현실을 듣고, 향후 교단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뜻깊은 시간이 이어졌다. 이번 시일식을 기점으로 박 교령은 서울을 포함한 중부 지방 순방에 나서 수도권 교역자들과의 교화 간담회를 본격화할 예정이다. 이는 “현장에서 답을 찾겠다”는 교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교단의 통합과 혁신을 위해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보여준다. 천도교중앙총부는 박 교령의 설교가 교단 구성원들에게 포덕의 본래 의미를 다시 일깨우고, AI 시대의 새로운 교화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칼럼]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 탄신 200주년 어떻게 준비할까?오늘, 출근길. 차창 밖,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들이 시야에 다가오며 온통 노오란 은행잎들로 세상이 물들 듯하였다. 아파트 주택을 벗어나고, 기념관 사무실까지 오는 동안만큼이라도 만추의 계절,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들, 울긋불긋 오색단풍들,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고 뽐내는 채송화, 봉선화, 들국화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가을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즉시 차 한 잔과 손에 턱을 괴고, 칼럼을 독촉하는 유난히 눈과 키가 큰 천도교신문 신채원 차장이 생각났다. 더 한소리 듣기 전에 후딱 써서 보내야지 하며, 컴을 열었다. 그 순간 컴 바탕화면에 꽉 들어찬 온갖 글들의 제목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글과 ppt가 완성된 것, 글을 쓰다가 만 것, 제목만 있는 것, 특히 해월 최시형 스승님과 관련된 학술토론회, 강연회 등의 글들이 눈에 팍 들어오면서, 또 해월 스승님 관련 칼럼을 쓴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생각나는 대로 쓰기로 했다. 얼마 전 천도교 종무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재선 전주교구 교화부장으로부터 가칭)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준비위원회 조직구성을 대충 설명들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오는 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에는 천도교인들만의 잔치가 아닌, 해월 선생의 사상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는 조직구성과 정책개발이 되었으면 한다. 그럼 무슨 정책과 콘텐츠로 기획할 것인가는 지면상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압축적으로 사전 준비 차원에서 우리가 연구하고 토론하고 기획할 내용을 열거해본다. 주제: [역사문화개념으로]<1.콘텐츠 정책과 방향, 2.콘텐츠 개발, 3.콘텐츠와 도시부랜링, 4.발굴과 활용, 5.스토리텔링 방법, 6.지역 스토리텔링, 7.설화와 스토리텔링, 8.축제와 콘텐츠, 9.공연과 콘텐츠, 10.영상과 콘텐츠, 11.스토리텔링 전략, 12.지역자원과 웹툰 등으로 기초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기념 행사를 기획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해월 스승님의 삶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지금 만약 해월 스승님이 나타난다면 과연 무슨 말씀과 어떤 일들을 하실까? 우리들은 과연 해월스승님과 같은 일들을 하나라도 하고 있을까? 해월 스승님은 아마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고, 오고갈 때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해월 최시형 신사님의 순도 직전의 모습, 단성사 뒤편 고등법원 감옥서(監獄署_교형장)에서 1898년 6월 1일 사형 판결을 받고, 6월 2일 순도(순국) 직전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찍은 72세의 해월신사 모습이다. 사진 상단 오른쪽에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이란 팻말이 보인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특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환경파괴 등으로 대멸종이 다가오고 있는 것에 교인은 물론 국내외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할 방법을 찾고 대국민, 대인류, 생명평화 운동을 하실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 기념은 기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과 실천을 궁리하고 몸소 직접 나서는 그런 일들을 해야 진정 해월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侍天主, 人乃天, 事人如天, 物物天事事天, 人吾同胞 物吾同胞, 등 敬天, 敬人, 敬物의 삼경사상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이다. 글 이윤영(천도교직접도훈, 동학혁명기념관장, 2차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국민연대 공동대표) -
포덕 166년 11월 2일 천도교중앙대교당(수운회관) 시일설교 "사해운중월일감"지난 11월 2일 시일식에서 라명재 송탄 교구장은 설교를 통해 ‘사해운중월일감(四海雲中月日鑑)’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청년 세대의 절망을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이끌었다. 라명재 교구장은 최근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캄보디아 사기 사건, 그리고 청년들의 불안정한 현실을 언급하며 “오늘의 먹구름 같은 사회현상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이 만든 그늘”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먹구름에 가려져도 해와 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듯, 우리 각자에게는 본래적 밝음을 비추는 ‘마음 거울’이 존재한다”고 설파했다. 이어 동학 수행의 본질을 ‘마음을 닦는 공부’라고 강조하며, “욕망과 불안, 분노에 흐려진 마음 거울을 다시 닦아내는 일이야말로 부조리에 맞서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또한 “청년들의 절망은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며, 기성세대의 포용과 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라 교구장은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서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동학의 가르침”이라며, “미래 세대를 위한 새로운 길은 오늘 우리가 마음을 맑히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다. 시일식에 참석한 교인들은 라명재 교구장의 설교는 교리의 깊이를 현대의 문제와 연결한 의미 있는 강론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
[칼럼] 태안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길태안 방갈리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기포비 뒷면 지난 10월 29일 『태안동학농민혁명사』가 간행되어 출판기념식이 열렸다. 집필자의 한 사람으로 지난 여름 땡볕에 구슬땀을 흘리며 태안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답사한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쁘다. 둘러보니 태안(泰安)은 글자의 뜻 그대로 ‘태평하고 안락한’ 곳이었다. 높고 거친 산이 없이 백화산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모습에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해안과 내륙을 겸비한 태안은 전통적으로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태안은 삼한 시대 신소도국(臣蘇塗國)이었다. 삼한은 지금의 직산에 근거한 목지국(目支國)이 통괄했는데, 신소도국은 목지국의 제천행사인 소도를 주관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태안은 신성하고 종교적인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태안으로 이름을 고친 이후 일제강점기 한때 서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에 태안군으로 회복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이 거세게 일어났던 곳으로 격하했기 때문이었다. 방갈리 가시내 갑오동학농민혁명 순국선열 추념식(1965년 5월 5일) 방갈리 가시내 갑오동학농민혁명 순국선열 추념식(1965년 5월 5일) 충청도 서부의 동학은 1880년 공주를 시작으로, 1883년에는 내포의 동학을 이끌었던 삽교의 박인호와 아산의 안교선 등이 입교해 포덕의 발판을 마련했다. 은밀하게 교세를 유지하던 태안을 포함한 내포 일대의 동학은 1890년 들어 급성장했다. 이때 서산의 최형순은 교주 해월이 서산을 방문했을 때 입도해 서산과 태안 일대에 동학을 전했다. 특히 교조신원운동이 한창이던 1893년 2월 박희인 대접주가 그릇 장수로 변장해 방갈리 가시내에서 조운삼을 입도시켰고, 이어 방갈리 갈머리 마을의 문장준, 문장로, 문구석 등을 입도시켜 태인 동학의 중심인물로 키웠다. 물산이 풍부한 태안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고 동학의 시천주와 유무상자의 정신은 태안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태안의 동학은 원북면 방갈리, 근흥면 수룡리, 이원면 포지리가 특히 강했다. 그 이유는 지리적 조건과 신망있는 지도자 등이 갖추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박희인은 방갈리 문구석, 가시내 조문필, 수룡리 문동하의 집에서 동학 교리를 가르쳤다. 태안의 동학도는 보은 장내리의 신원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성장했다. 1892~3년 교조신원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박인호는 덕의대접주, 박희인은 예산대접주로 임명되어 내포 일대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동학 세력이 커지자 태안부사 신백희는 충청감사 조병식과 공모해 태안 관내의 동학도로부터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 6만6천 냥을 강제징수하는 횡포를 부렸다. 조석헌과 문장준을 중심으로 태안의 동학은 2~3년 만에 급성장했다. 태안을 포함한 내포의 동학도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시천주를 가까이 했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전봉준이 기포(起包)하자 내포의 동학도는 2월 6일 전직 고관 출신 이정규의 팀힉과 수탈에 저항하는 덕산기포를 감행했다. 내포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인 덕산기포는 4월 농민을 괴롭히던 토호 이진사의 응징을 위한 원벌기포로 이어졌다. 태안은 내포 동학의 핵심으로 전라도의 동학농민혁명과 호응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전주화약으로 타협한 후 내포의 동학도는 시세를 관망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과 청일전쟁으로 상황이 급변하였고, 평양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 정부에 동학군 탄압을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어 전봉준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했고, 교주 해월은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렸다. 태안의 동학도는 해월의 총기포령을 기다려 분연히 일어났다. 10월 1일 내포의 동학군은 서산 관아를 점령해 군수 박정기를 처단했다. 이튿날인 2일에는 태안 관아를 공격해 부사 신백희와 안무사 김경재, 이방 송봉훈을 처단하고 사전에 붙잡힌 동학접주 30여 명을 구출했다. 이후 내포 동학군은 대흥군 관아를 점령하고 홍주성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홍주 목사 이승우는 예포 대도소를 습격해 어려움을 겪었다. 흩어졌던 태안의 동학군은 10월 15일 태안 경이정에서 재집결했다. 승기를 잡은 관군과 일본군은 내포 동학군을 추격했고, 동학군은 이들을 승전곡으로 유인해 크게 무찔렀다. 승전곡 전투 승리는 일본군에 대한 최초의 승전이었다. 이어 내포 동학군은 관작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홍주성으로 향했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무기와 전술로 인해 패배했다. 이후 동학군은 해미성, 매현에서 거듭 패했다. 태안의 동학군은 매현 전투 이후 백화산에서 최후의 항전에 돌입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백화산을 포위해 동학군을 고립시켜 몰살시키려 했다. 백화산의 동학군은 동짓달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을 견디며 11월 11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하게 조・일 연합군과 항전했으나 끝내 새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산화했다. 백화산 동학군들은 비록 역부족이지만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태안에서는 대대적인 동학군 체포와 참혹한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지금의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있는 백화산의 교장(絞扙) 바위에서는 동학군 수백 명을 붙잡아 10여 명씩 포승으로 묶어 목을 조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백화산 북쪽의 모래기재, 태안여고 개울, 샘골 마을, 남문리 냇가, 정주내 등 여러 곳에서 동학군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 근흥면 토성산에 숨어든 동학군은 총개머리로 잔인하게 때려죽였고, 작두로 머리를 잘랐다. 산 아래로 던져진 머리는 집 추녀에 매달았다. 산 사람을 집에 가두고 방화하는 만행도 저질러 토성산은 도살장을 방불케했다. 토성산 동학혁명군 처형지 다소 장황하게 태안을 포함한 내포의 동학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에 대해 아는 이가 적고 한편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동학혁명에서 충청도의 서부 태안에서 전개된 동학혁명은 그에 못지않게 크게 전개되었다. 태안을 포함한 내포 지역에서만 대접주(大接主)가 박인호, 박희인, 최형순, 장세헌, 한영교 등 5명일 정도로 내포의 동학군 조직은 탄탄했다. 태안군에 한정해서 보면 수접주(首接主)가 11명, 차접주(次接主)가 1명, 접주(接主)가 55명, 접사(接司)가 28명, 접장(接長)이 1명이었고, 육임(六任)의 직책으로 도집(都執) 14명, 집강(執綱) 2명, 대정(大正) 3명, 중정(中正) 3명, 이밖에 다른 호칭의 직책 등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휘부만 121명에 달했다. 이처럼 태안의 동학혁명은 장엄했다. 태안의 동학혁명에 관한 내용이 잘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동학군의 기록과 이를 이은 후예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안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조석헌은 『조석헌역사』, 문장준은 『문장준역사』를 남겨 동학군의 시각으로 바라본 동학혁명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태안은 해방 후 전국에서 대표적으로 동학혁명에 관한 기록을 정리한 곳이다. 1965년 천도교 태안교구 문원덕 교구장은 『갑오동학혁명 당시 순도한 순도자 명단』를 작성했다. 문 교구장과 교인들은 동학혁명 참여자의 후손을 일일이 찾아 당시의 기록을 정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학정신선양회’를 조직해 태안의 동학혁명을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일에 앞장섰다. 태안의 동학군 후예들은 힘을 모아 1977년 교장바위에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을 건립했다. 문 교구장은 토성산에서 동학군의 목을 자르던 작두를 발굴해 천안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이 작두는 동학군 학살의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동학농민혁명태안유족회’를 이끌었던 문영식 등의 노력으로 2015년에는 태안 동학의 중심지인 원북면 방갈리 태안 화력발전소 내에 “동학농민혁명기포지” 비를 건립했다. 60여 년간 꾸준하게 태안의 동학혁명 선양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21년 10월 22일 전국 지자체로는 3번째로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동학군이 순절한 백화산 아래 건립되었다. 태안 갑오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 제막식(1978년 10월 2일)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에 세워진 태안 동학농민혁명군 추모탑 백화산 교장바위 그러나 태안의 동학혁명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여름 답사를 다녀보니 아직 태안 동학혁명 유적 가운데 제대로 정리된 곳은 교장바위와 방갈리, 태안 관아 정도 밖에는 없었다. 동학군이 학살된 토성산, 태안 동학군이 집결한 진벌, 동학군이 학살된 모래기재와 개구랑, 통개, 목네미샘, 정주내 등에는 이곳이 동학혁명의 유적임을 알리는 표식이 하나도 없다. 통개에는 고사리손으로 만든 작은 나무 팻말이 하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직 태안의 동학혁명은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태안이 동학혁명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태안은 그 어느 곳보다 동학혁명의 역사를 지키려고 애쓴 곳이다. 이제 이에 대한 답을 우리들이 해야 하겠다. 태안 동학혁명 유적지를 연결하는 태안 동학길도 만들고, 백화산 항쟁이 벌어졌던 날 가운데 하루를 택해 “태안동학혁명 기억일”을 만들어 동학군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추모제도 이어 나가자. 다행히 이번에 『태안동학농민혁명사』가 간행되어 그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번 기회에 태안의 동학혁명을 알리고 기리는 일에 나서자. 태안 동학혁명을 기억하는 일에 나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동학군의 마음과 하나 되자. 그 힘으로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