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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1) "피로 물든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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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1) "피로 물든 만세시위"

  • 이창번
  • 등록 2025.07.23 10:18
  • 조회수 9,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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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피로 물든 만세시위

  3월 31일(음 2월 30일) 아침부터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집회 예정부근 교인 집에 비밀히 운반했다. 그리고 행동대원들은 정주읍 웃장거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에 집합하면 당국의 눈에 띄기 쉬우므로 개천거리의 주막이나 교인 집에 모였다. 이들은 여기서 각 면 교인들이 들어와 만세를 부르면 일제히 일어나 같이 만세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정오경이 되자 장꾼들이 모여들었고 이윽고 사방에서 만세꾼이 모여들면서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우암 박창건 선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오경이 되자 남면과 해산면 쪽에서는 남산모루로, 서면에서는 서문쪽으로, 이언·덕달·아이포·마산면에서는 대진고개와 달천강 쪽으로, 동주면에서는 당째고개로 몰려들게 되었다. 동부면 쪽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봉면동 신두부락 천도교인들이었는데 이미 동주면 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오면서 고현면과 신안면 교도들과 합세하였다. 

  사방에서 수만 명이 정주 시가에 들어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북과 나팔을 불며 만세를 외치니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했다. 읍내에 대기하고 있던 결사대원들도 대오를 정비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들고 행진, 군중을 인도하였다.

  남문거리를 지나 정주우편국 앞에 이르렀을 때 무장헌병들이 진을 치고 길을 막았다. 결사대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행진을 강행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일본 기마헌병이 칼을 뽑아들고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돌진하는 최제일 교구장의 오른팔을 내려쳤다. 오른팔이 잘려지면서 태극기가 땅에 떨어지자 왼팔을 내밀어 다시 태극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왼팔을 내려쳤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태극기를 입으로 물고 전진하자 목을 쳤다. 교구장이 선혈을 내뿜으며 쓰러지자 뒤에 있던 김사걸이 잽싸게 피로 물든 태극기를 거머쥐고 전진했다. 이번에는 김사걸을 내려치니 단번에 쓰러졌다.

 이에 대해 김위제 선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최 교구장의 바로 뒤에 서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교구장이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어들고 만세를 부르며 계속 선두에서 나아갔다. 그러자 헌병보조원이 들개를 때려잡는데 쓰던 장창 같은 쇠갈고리로 그의 배를 쳐서 쓰러뜨린 다음 질질 끌고 가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때부터 발포가 시작되어 여기저기서 시위군중들이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게 되었다.

  최제일 교구장은 포덕 40년(1899)에 입도, 봉훈·교훈·강도원을 거쳐 당시 6대 교구장으로 있을 때였다. 그리고 김사걸(金士傑)은 의암성사께서 포덕 53년부터 55년까지 7회에 걸쳐 전국 교구 중견지도자들을 모아 연성수련을 시행할 때 제7회째 지명을 받아 각지에서 모인 105인과 더불어 봉황각에서 특별수련을 마친 분이다.  

  정주의 만세운동은 우체국 앞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불종거리에서도 같은 시간에 피의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박창건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동주 고현 신안면의 천도교인들이 정주 당째고개를 넘어 선발대가 불종거리에 이르렀을 때 만세를 부르자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던 경찰이 총을 난사, 군중들이 쓰러졌다. 총만 난사한 것이 아니라 소방대원들을 동원하여 불을 끄는 갈고리로 닥치는 대로 쳐 죽이니 처참했다. 부상자이건 성한 사람이건 색출된 사람이건 잡히기만 하면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날 정주에서 만세 부르다 순국한 인원은 무려 92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튿날에 왜경은 웃장거리에 양옥 2층으로 잘 지어진 천도교 교당건물(24칸)에 불을 질러 완전히 태워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각 부락에서 산발적으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곽산 방면은 따로 천도교 곽산교구장인 김경함을 중심으로 이국영 등 수천 명이 곽산역 부근에서부터 시가지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에는 3월 3일에 천도교의 김경함 교구장과 예수교가 제휴하여 1천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하였다.

  이국영의 장남인 이태근의 증언에 의하면 정주군 소재지보다 앞서 곽산에서 3·1만세운동을 하게 된 것은 김상설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따로 가져오면서 총부의 지령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김상열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갖고 평안북도 의주까지 갔다가 거기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3월 31일 정주 만세시위 때 희생자 성명은 대부분 멸실되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교인은 다음과 같다.  

   崔晢一,金仕傑,白文京,承處達,毛信永,毛元奎,毛元鳳,桂洪成,金七星,

   朴一擎,朴昌瑞,承應七,承吉龍,趙苦水,玄德昇,洪應根,

  김위제 선생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헌병대장 기하라(木原) 대위는 시위가 끝나자 곧 바로 천도교 간부를 체포했는데, 徐仁和 白重彬 李國榮 李根培를 비롯하여 각 면 전교사와 기타 수많은 교도들이 검거되어 6개월 간의 옥살이를 했다. 일반인까지 합하면 70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체포당하면 심한 고문으로 불구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천도교 간부들은 오랫동안 고문을 당하여 몇 사람은 업어냈다고 한다.


  맺는 말

  천도교 정주교구는 이겸수·홍기억·김창하·김진팔·김진영·최제일·김여경·최낙경·박찬수·박기호·박형석·임창열·홍종현·김공선·백중빈·김정섭·서인화·김장제·이국영·김경함 등 쟁쟁한 지도자에 의해 지켜져 왔으며 3·1운동 후 다시 일어섰다.

  일본헌병이 불 질러 버리고 간부를 체포하자 그해 4월에 정주교구는 태천군에 접하고 있는 신안면 연봉동으로 이전했다가 9월에 정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포덕 61년(1920) 3월에 타다 남은 창고를 수리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그 다음해인 포덕 62년(1921) 1월에는 다시 짓기로 하고 새로 대지를 구입, 김진팔·박찬수·서인화·오찬수·전용운 등이 모금위원이 되어 2월에 착공하였다. 그리하여 벽돌 반양장으로 정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3동 15칸짜리 교당을 완공하였다.

  그 후 교세는 더욱 늘어나 포덕 77년(1936) 3월에는 낡은 교당을 헐고 그 자리에 50평짜리 교당과 20평짜리 사무실을 붉은 벽돌 반양옥식으로 크게 새로 지었다. 백호산 기슭에 우뚝 솟은 천도교 교당은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었다. 3·1운동의 주동자였으며 주관 도정이었던 재암 김진팔 선생의 훌륭한 지도력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김진팔 도정은 정주군 아이포면 석산리에서 포덕 13년(1872) 12월 3일에 태어났으며, 3·1운동 때 영변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후 왜경에게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포덕 85년(1944) 12월 25일 서울에서 8·15해방을 보지 못하고 향년 72세에 환원하였다.  



          2. 단천교구의 만세운동   

                                                

  머리말

  함경남북도의 천도교 중 단천군 교인들만큼 3·1만세운동을 격렬히 벌인 곳도 드물 것이다. 3·1만세운동으로 피살자 33명, 중경상자 24명, 피검자 290명이 희생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단천교구에서는 서울 우이동 봉황각 수련 3기에 신태천, 4기에 김순택, 6기에 최봉천·차낙준, 7기에 김봉순 등 5명이 참가하였다.  

  단천군 천도교인들의 3·1만세운동에 대하여 포덕 122년(1981) 3월호 『신인간』지의 김용문 선생 기록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1971년 12월에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 그리고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실록(하)』 및 『천도교연원록』, 『창건록』 등을 참고로 살펴보고자 한다. 


  단천의 천도교세  

  김용문 선생에 의하면 맨 처음 동학을 받아 포교한 사람은 수하면 만덕리에 사는 최기주였다. 최기주는 함흥으로부터 동학을 받아 수하면·신만면·남두일면·북두일면에 포교했다.

  그 후 포덕 43년(1902)부터 포교가 크게 일어나 전군에 동학교도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 입교하여 포교에 힘쓴 교인은 파도면에 안창헌과 서만면 개평리의 염인환이었다. 그리고 신봉천,최봉천,염원형,염석하,설혁봉,원수홍 등이 널리 활동하였다. 포덕 45년(1904)경에 교세는 1천호가 넘었다. 그런데 포덕 47년(1906)에는 의병활동으로 친일파라는 오해를 받아 100여 명이 살해되는 교난을 당하면서 교세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후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교 호수는 약 3백 호에 이르렀다.  


  3·1운동의 준비

  단천군교구에 3·1만세운동에 관한 밀사가 도착한 것은 3월 3일이다.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 의하면 홍원군 교구의 박용회가 독립선언서를 단천에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세시위는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태극기를 들고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 필수요건이다. 따라서 독립선언서 배포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3·1동지회 간행 ‘3.1독립운동실록’에 의하면 서울 팔판동에 사는 천도교인 안상덕은 강원도와 함경남북도에 선언서를 배포하는 밀령을 받았다. 이종일 보성사 사장은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강원도에 2천장, 함경도에 1300장을 보내기 위해 안상덕에게 넘겨주었다. 안상덕은 선언서를 강원도 평강교구장 이태윤에게 무사히 전달하고 곧바로 영흥교구로 갔다. 영흥교구장인 김용환에게 전달하고 다시 홍원교구로 갔다. 강인택은 박용회를 시켜 함경남도 북부지역과 함경북도 지역에 전달하였다. 이것이 3월 3일 단천교구에 도착하였다. 

  포덕 57년(1908) 현재의 연원직접안에 의하면 단천에는 안창헌과 염인환이 연원대표로 되어 있다. 안창현은 파도면 단천읍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가까운 교인들이 모여 계획을 의론했다. 단천교구장인 염원형은 안창헌 연원대표와 최석곤 공선원, 설운용 금융원과 상의하여 3월 10일로 만세운동을 정했다. 대개 다른 지방에서는 장날을 택하는 예가 많았으나 단천에서는 교인들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이 강했기 때문에 대신사 순도일로 정한 것이다.

  이에 교구장과 실무자 3인(공선원 최석곤, 전제원 이문구, 금융원 설운용)등 4명은 우선 밤중을 이용하여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800장가량 인쇄하였다. 천도교의 전국 교구에는 포덕 50년대 초에 중앙총부에서 등사기를 구입 비치토록 하여 이미 등사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교구 임원들은 낮에 각 면 전교실 전교사나 연원 관계자를 은밀히 만나 동원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군 교구로부터 비밀지시를 받은 각 면 전교실 간부들은 밤중에 독실한 교인댁을 찾아가 동원 준비를 하는 등 계획대로 진행시켰다.

 단천군의 지형은 해안에서부터 길게 북쪽 산악지에 이르는 골짜기형이다. 그래서 단천읍으로부터 북두일면은 60km가 넘었고, 서쪽에 있는 신만면과는 30km가 넘었다. 교통관계가 매우 불편하여 북두일면 교인들까지 동원하기는 어려워 북쪽의 수하면, 남두일면 동쪽의 광천면, 이중면 서쪽의 하다면·신만면, 그리고 남쪽 해안지대의 복귀면 등과 단천읍 등 8개 면의 중견 교인 약 300명을 동원토록 진행했다. 일반교인들에게는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어 대신사순도기념일인 3월 10일 오전 11시에 단천교구에 모여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위장하였다. 


  기념식 후에 만세시위

  3월 10일이었다. 각 면 교도들은 꼭두새벽에 출발하여 11시에 교당으로 모여들었다. 11시 정각에 대신사 순도기념식을 시작하여 약 30분간 진행하였는데, 300명이 넘는 교인들이 교당에 가득 찼다. 이윽고 염원형 교구장이 등단하여 의암성사께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경위와 각지에서 진행된 만세시위 상황이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독립을 위해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아울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자고 독려했다.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큰 태극기는 서봉화가 들고 앞장섰다.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만세를 연거푸 외치며 교인들은 중심가인 하서리로 향했다. 시민들은 조선독립만세 소리에 뛰쳐나왔고 젊은 남녀들은 합세하였다. 사방에서 시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어느덧 일천여명이 되었다.

  온 단천 시가가 떠나갈 듯 만세를 외쳐대니 참으로 장관이었으며 피가 끓었다. 헌병대 앞에 이르자 사태는 돌변하였다. 김용문 선생의 기록을 보자.

  만세시위에 당황한 왜경과 헌병대는 즉시 기마대를 풀어 시위군중을 제지 해산시키려 갖은 위협을 다하였다. 시위군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만세를 부르며 저지선을 돌파했다.  이때 선두에서 나가던 서봉하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다까하시(高橋) 현병대장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내 나라를 내 놓아라”하며 만세를 부르자 그는 말에서 내려 총 개머리로 그의 어깨를 내려쳤다. 이에 웃통을 헤치고 다가서며 고함을 지르자 살인마인 헌병대장은 일본도를 뽑아 사정없이 복부를 찔렀다. 붉은 피가 쏟아지며 창자가 빠져 나왔다.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쥔 서봉화는 계속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대를 향해 돌진하다 쓰러졌다.

  피를 보게 된 교인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제히 헌병대로 돌격했다.  왜경과 헌병은 총을 난사하여 살육전을 벌였다. 이처럼 일진일퇴를 되풀이하기를 3시간 만에 해산당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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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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