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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0) "의암성사의 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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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10) "의암성사의 환원"

  • 이창번
  • 등록 2025.07.1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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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17. 의암성사의 환원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성사는 그 해 11월 28일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런데도 일제는 병보석을 허락지 않은 채 12월 12일 성사를 들것에 싣고 나와 재판을 진행하였고, 급기야 14일에는 언어불통의 중태에 빠졌다. 이듬해인 1920년 6월 12일에는 뇌출혈이 재발하여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전신불수와 늑막염까지 겹치게 되어 재기불능의 중태가 되었다. 가족과 교회에서는 누차 병보석을 노력하였으나 일제는 끝끝내 이를 허락지 않았다. 결국 1920년 10월 30일 복심법원에서 보안법상 최고형인 3년 징역 언도를 며칠 앞두고 형집행정지 결정이 내려져 그날 오후 영어의 몸이 된지 1년 8개월 만에 풀려나 동대문 밖 상춘원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할 당시 성사의 병세는 극히 위독한 상태였다. 온몸이 부어 있고 의식은 전혀 없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중태였다. 상춘원 양관 2층에서 치료를 시작한 의암성사는 박종환·박덕상 두 사람을 주치의로 하고 총독부의원 내과 주임인 의학박사 有馬岩井를 불러다 진찰을 받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1921년 2월이 되자 병발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동맥경화증과 변비, 그리고 당뇨병의 징조가 있을 뿐 아니라 늑막염까지 겹쳐 병세는 악화되는 듯하였다. 주치의 두 사람은 양약과 한약을 교대로 복용토록 한 결과 용태는 차츰 호전되어 1922년 봄에는 의식이 상당히 호전되어졌고  조금씩 운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성사의 병세는 5월 중순부터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5월 10일 주치의 박종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한의사인 박찬수가 2시간에 걸친 수운제의 훈약(燻藥)을 사용한 것이 큰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다. 훈약 사용 후 열이 높아지고 통증이 심해졌다.

 성사께서는 5월 12일 병상을 찾은 권동진·오세창·최린 세 사람에게 “도에 대해서는 춘암이 있으니 염려할 바 없거니와 군 등 3인이 춘암 교주를 보좌하여 나간다면 교내 교외사를 물론하고 염려할 바 없으리라”고 하시면서 세 사람이 합심하여 교회 일을 잘 처리해 나가도록 당부했다. 그 후 5월 15일 오전에 성사께서 조금 차도가 있자 춘암상사를 불러 교회사를 부탁하시면서 “아직은 교회사업을 내가 정해놓은 대로 해야 해”라고 말했다.

 그 후 심장마비 증세가 발작하기 시작하여 16일 오전에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7일에는 폐렴마저 발병하여 18일에는 다시 혼수상태가 되었다.  그날 밤 주치의 박종환은 진맥한 후 성사의 최후를 예감하고 마지막을 대비하도록 당부했다. 이때 성사의 둘째 딸 손광화는 단지를 하여 피를 성사의 입에 흘려 넣어 조금 회복하는 듯하였으나 효험 없이 전 민족의 기대와 소망을 한 몸에 간직한 5월 19일 오전 3시에 조용히 환원하시니 향년이 62세였다.

 성사님은 300만 교도를 뒤에 남긴 채 조용히 운명하셨다. 성사님의 환원소식은 그날 아침에 신문 호외로 지체 없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파되었다. 천도교 의식에 따라 마련된 성사의 빈소에는 아침부터 조객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수일 전부터 성사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상경한 지방 교도들로 상춘원은 붐볐고, 이런 가운데 사회 각계의 저명인사와 각 학교의 학생 대표들의 문상대열이 뒤를 이었다. 성사께서 생전에 그토록 힘을 기울였던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그리고 종학원에서는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날 하루 휴교하였다.

 한편 빈소가 마련된 상춘원에는 춘암상사를 비롯하여 중앙총부 간부와 지방 두목, 그리고 가족이 회합하여 협의한 결과 주상은 교주 박인호, 장위위원장에 권동진을 선정하고, 장례를 집행하기 위하여 의식, 서무, 응접, 통신, 재무의 5부를 두고 각부에는 위원장 1인과 위원 약간 명을 두기로 하였다. 상표는 평상복에 검은 동정으로, 양복은 검은 넥타이로 표시할 것과, 제복기간은 성복일로부터 105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장례식과 장지를 정하는 문제가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3·1독립운동의 주모자인 손병희가 형집행정지(가석방)로 석방되었기 때문에 장례의식을 성대히 거행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장지는 처음에 청량리 방면에 물색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체념하고 우이동 봉황각 경내로 결정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6월 2일에야 장지 문제와 장의 절차가 확정되었다.

 각계각층의 조객이 물밀듯 모여들었으나 조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일제가 장례를 거행하는 과정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여 과잉 제제와 간섭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5월 21일 입관식을 거행하고 6월 5일 오전 6시에 영구는 상춘원을 떠나 7시반에 경운동 대교당에 도착하였다.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게 된 것은 비록 성사께서 환원하였으나 그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성사께서는 송현동의 구 교당이 협소함을 늘 안타깝게 여기시다가 1918년 봄에 대교당을 신축하고자 대지를 마련하고 그해 12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공사의 완공을 보지 못하자 출감 후에 병상에서도 완공된 대교당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병세가 호전되면 자동차를 타고 가서 보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였으나 병의 악화를 염려하여 후일로 미루어 오던 터였다. 성사께서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신축교당을 끝내 보지 못하고 영면하셨기 때문에 비록 유해나마 대교당에 안치하여 영결식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영구가 대교당에 안치되고 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8시에 영결식을 엄숙히 거행하고 9시에 성사님의 영구가 대교당을 떠나 장지인 우이동으로 출발했다. 장례행렬은 270여 개의 조기와 70여 대의 꽃차 20여 대의 자동차를 비롯해서 보성전문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보성소학교, 동덕여학교의 학생과 교직원 1,500여 명, 교인 조객 등 장례행렬이 대교당에서 창경원에 이르기까지 장관을 이루었다. 장례행렬에 만장은 저지되고 조기만 사용이 허가되었는데 왜경의 간섭 때문이었다.

 장례행렬은 동소문 밖 삼선평에서 고별식을 거행하고 11시 반에 삼선평을 떠나 미아리와 수유리에서 잠시 휴식 후 오후 5시에 우이동 봉황각에 이르러 하관식을 거행하여 장례를 마쳤다. 이날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 만여 명과 일반 사회 및 내외국인의 장례식 참여자가 3만여 명에 달하여 연도에는 장사진을 이루었고 장지에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동안 사회 각계로부터 답지하는 조문 조전과 조화는 상춘원 빈소에 산적되어갔다. 신문에서는 연일 장례 준비의 진행 사항과 각계의 조문을 보도하고 있었다. 

선생의 서거를 애도하는 각계 인사의 조의와 회고담 중에서 5월 20일자 동아일보 논설 전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5월 20일자 동아일보 논설 전문

嗚呼라  孫秉熙 先生이 長逝하였도다 蕭索한 社會는 寂寞의 感이 自生하며 沈淪한 民族은 追慕의 情을 不禁할것이라  匹夫로 民衆의 膽仰이 되어 一言이 天下에 動이 되었나니 社會가 依하여 發展하였으며 民生이 賴하여 振作하였도다  先生의 一世를 通觀하면 重疊한 生活이며 風雲이 無常한 運路이다  그 生하매 草野貧賤의  家門에 在하여 父母의 愛護를 不受한 것이 事實이며 그 小壯時代에 及하여는 호방불기(豪放不羈)한 性格이 自制치 못하여 鬱忿한 志氣를 自禁치 못한지라 遂이 東學에 投入하여 有名한 甲午動亂에 一石을 投하며 一波를 添하였도다.  이리하여 孤蹤雙影을 혹은 중국방면에 寄寓하며 或은 日本地方에 放浪하다가 政局風雲이 多端한 時期를 際하여 李容九等으로 하여금 一進會를 組織하였으나 代洗가 一傾하여 民衆의 反感이 極熱하매 機敏한 先生은 政敎의 分離를 宣言하고 布德天下 廣濟蒼生이라는 主義下에서 天道敎를 復興하여 敎徒를 團結하며 敎育을 振興하여 爾來 十有餘年間 文化上으로도 貢獻한바 多하도다 그러나 時運이 不齋하고 命途가 多변이라 孤島의 愁雲이 暗澹하며 丈原의 寒燈이 경滅한지라 그 奮鬪生活의 終幕光景은 吾人으로 하여금 滿襟의 淚를 禁치 못하노라 先生의 生活이 이와 같이 複雜하고 先生의 運路가 이와 같이 多岐하므로 平素에 在하여는 疑雲이 濛濃하며 妬霧가 紛起한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爾今에는 一大事業의 總勘定하는 時期가 到來하였도다 匹夫로 生하여 匹夫로 死하니 先生에게는何等의 榮爵이 無하며 民衆으로 伴侶하여 民衆으로 苦樂하니  先生에게는 何等의 權威가 無하며 艱難으로 始하여 艱難으로 終하니 先生에게는 何等의 富力이 無하도다  榮爵이 無하며 權威가 無하며 富力이 無한 先生의 生活은實로 平民的이다 다만 그 卓然한 志氣는 山嶽이 特立하며 光明한 心事는 天日이 並照할 뿐이다 吾人의 先生을 欽慕함도 이에 있으며 先生을 追悼함도 이에 있도다  宗敎上 成績은 그 氣格이 <마호멭>에 近似하나 徹底치 못하며 政治的 起點은 陳勝劉邦에 (방불)髣髴 하나 完全치 못하며 敎育上으로는 貢獻이 不少하나 敎育家의 性格을 發見할 수 없도다   要컨대 先生은 抑强扶弱의 特質을 가진 群中에 大者이며 極端으로 精力을 發揮하는 非凡한 人物이라 하겠도다 이러므로 一技一藝와 一知一能으로는 到底히 先生의 眞面目을 窺知할수 없으며 先生의 事業을 評論할 수 없도다   그 部下에 百萬으로 數하는 信徒를 團聚하게 된 것은  그 偉大한 包容力을 證明한 것이며 이 新局面을 展開하는데 機會를 勿失하는 것은 그 果斷性을 標示한 것이며 波瀾이 重疊하며 風雲이 頻繁한 것은 그 豪放不覊한 氣質을 發現한것이라 하노라   嗚呼라 山은 오히려 築할 수 있으며 河는 오히려 穿할 수 있으나 非凡한 人物에 至하여서는 實로 天與의 寶이니 朝鮮民族에게 百萬으로 數하는 結合團體가 있는 것이 一大奇蹟이며 이를 統率指揮할만한 人物이 存在한 것도 容易치 아니 하나니 今에 朝鮮이 先生을 失하게 된 것은 莫大한 缺陷이라 하겠도다   貴族爵位는 다못 帝王의 一呼吸에 依하여 製造할 수 있으나非凡한 人物에 至하여는 吾人의 能力으로 如何히 할수 없도다 先生의 精神은 恒常 이 社會에 留宿하며 先生의 氣魄은 恒常 民衆의 血管에 躍動하소서 

이 數語로써 先生의 最後를 哀悼하노라



 제3장  천도교 지방교구의 만세운동

      3.1독립만세운동은 6월 말까지 연인원 200만 명이 참가하였고 전국 237개 군 중 232개 군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에 참가한 232개 군 중 가장 치열하게 항쟁한 7개 군의 천도교 지방교구의 만세운동을 소개한다.    


1. 정주교구의 만세운동…<참고 : 표영삼 자료>

  머리말 

  평안북도에서 3·1운동 때 만세시위를 하면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정주교구였다. 무려 92명이 사망하였으며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이곳은 천도교에서 처음부터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정신과 투쟁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김위제 선생의 기록과 박창건 선생의 기록을 주로 하고 『천도교창건록』 및 이병헌 선생의 기록을 참고로 정주교구의 3·1운동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립만세운동의 계획

  정주에 동학이 들어온 것은 포덕 32년(1891) 부터이다. 이듬해인 포덕 33년(1892)엔 상당수의 교도가 포교되어 있었다. 그중 접주나 수접주·대접주로 활동한 분들을 보더라도 이겸수·문중승·문익현·고봉서·최제일·김찬전·배유도·현하흘 등을 들 수 있다.

 포덕 40년 (1899)에 이르면 교세는 더욱 커져서 전군 방방곡곡에 동학군이 없는 동리가 없을 정도였고, 아울러 이희수·김창하·옥운초·김진팔·유자승·박찬명 등 쟁쟁한 지도급 인사들이 입도했다.

  포덕 43년(1902)에는 소설가 이광수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을 때 박찬명의 보살핌으로 동학에 입도하게 되었다.

  이때의 교세는 약 3000호(가산·구성에까지 포교) 정도였다고 하며, 정주읍의 바로 남쪽에 인접해 있는 남서면 상단동 마을에 거주하는 이겸수 대접주의 집에 평안북도 도접소(平安北道 都接所)를 설치하여 비밀히 중앙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동학은 대두령제를 실시하여 조직적인 동원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정주교구는 1912년부터 시작된 우이동 봉황각 수련에 무려 14명이나 참가했다. 1기에 김병태, 2기에 김진팔, 3기에 박형석·김기선, 4기에 최효건, 6기에 송옹주·김진형, 7기에 박찬수·서인화·신석호·김덕화·김사정·최종섭·김봉무 등이다. 

  어느 단체, 어느 종교보다 조직이 뛰어났던 정주 지역의 천도교였으나, 3·1운동 초기에 만세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정주라는 지점이 일제 군사요충지요, 교통요충지이므로 감시가 철저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3월 1일을 기해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삼엄한 경비에 돌입했다. 경찰력을 총동원함은 물론 정주 수비대들은 헌병보조원을 각지에 파견하여 물샐 틈 없이 감시하였다. 3월 20일이 넘도록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자 수비대 측은 자기들의 공로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천도교 연원총책인 재암 김진팔이 서울로 올라갔다가 3월 25일 비밀리에 정주로 돌아온 후 정주교구장이었던 최제일과 교구직원인 서인화·백중빈·이근배·박윤길, 그리고 곽산 교구장인 김경함 등과 서주동·박형석 집으로 가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대개 만세운동은 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로 정하게 되는데 정주 장날은 3월 31일이었다. 그래서 그날로 거사 일을 결정하고 각 면으로 사람을 파견하였다. 당시의 군의 면 행정구역은 19면이었다. 곽산·관주·안흥·옥천·임해·정주·동주·고현·신안·마산·대전·도덕·갈산·아이포·덕달·이언. 등이었다.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지목받고 있는 교구임원을 보낼 수 없어 일반 중견교인인 김석보·김공선·방열경 등 세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런데 김석보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위기일발의 사태가 벌어졌다. 우암 박창건은 8·15 후 김석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경위를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석보(당시 40세)는 동주면 봉명동 사람으로 천도교 신앙에 독실하였으며 정의감이 강한 분이었다. 그는 거사할 날자가 확정되자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해산면과 남면·서면 등지의 독실한 교인들을 만나 긴밀히 연락한 후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면고개를 넘어 정주읍내로 들어오는 중간인 남산모루라는 곳에 이르자 뜻밖에도 김달근이란 헌병보조원의 검문에 걸리게 되었다.

  이때 각 지방이 소란하니까 헌병과 경찰들은 큰길가 요소요소에 지키고 있었다. 그는 “어디 갔다 오느냐”고 하면서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래서 “해산면에 있는 사돈댁의 혼인잔치게 갔다온다”고 했다. 그러나 믿으려 하지 않고 몸수색을 하려고 했다. 몸에는 돌리다 남은 독립선선서가 있었으니 발각되면 큰일이다. 김석보는 애원도 해보고 몸수색을 피해보려고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태가 급박해졌다. 이때였다. 돌주먹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세차게 쥐어박고 허리를 안아 동댕이쳤다. 그리고 깔고 앉았다. 얼핏 보니 칼을 차고 있었다. 그것을 뽑으려 했으나 방법을 몰라 낚아채기만 했다. 헌병보조원은 칼을 안 뺏기려고 필사적이었다. 결국 칼이 부러지면서 칼을 뽑을 수 없게 되었다. 김석보는 헌병보조원의 눈알을 뽑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순간에 떠올랐다. 손가락을 눈알에 후벼 넣으려 하나 미끄러워 모래를 한줌 쥐어 눈에 뿌리고 끝내 뽑아버렸다. 그리고는 “이놈 나는 사냥개 눈을 뽑았다”고 호통을 쳤다.

 김석보의 두루마기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큰일이다. 이대로는 피할 길이 없었다. 오던 길을 되돌아 서면고개를 넘어 샛길로 성우 성씨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갔다. 어느 집에 들어가니 손을 내저으며 바삐 나가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다음 집으로 갔다. 부인이 있을 뿐이었다. 전후 사정을 하니 벽에 걸려있던 배감투와 상복을 내어주었다. 재빨리 갈아입고 옥천면 개원사로 가서 백중빈 교구 직원을 만나 안내를 받아 인접 구성으로 가서 몸을 피했다. 그 후 몇 해 동안 숨어 살다가 시효가 지난 다음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상보는 이로 말미암아 굴목대장(掘目大將)이란 별명까지 얻었는데 도호는 부암(阜菴)이며 포덕 41년에 입도하여 접주, 봉교, 봉훈, 전교사, 도사, 종정, 종법사 등 중요 교직을 두루 역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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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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