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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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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 천도교와 3.1혁명-근대를 관통한 천도교의 ‘독립정신’(3)

  • 장우순
  • 등록 2025.05.29 15:41
  • 조회수 4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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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포덕 164년, 천도교중앙총부 주최로 열린 '동학·천도교 그리고 3·1운동과 탑골공원 성역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3·1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지난 호에 이어)

 

2) 동학농민혁명이 표방한 근대적 평등사상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된 후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었다.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의해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더욱 진보하였고, 교세는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더욱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사인여천은 말 그대로 사람을 하늘처럼 여기고 존중하라는 의미로 시천주 사상보다 더욱 구체적, 적극적으로 인간의 평등을 강조한 사상이다. 종교적 성격이 강한 동학의 평등관이 보다 근대적이고 세속적 의미의 평등관으로 진보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사인여천의 평등관을 공유한 동학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었다. 

    동학사상의 근대적 성격은 전주화약에서 제기되었던 ‘폐정개혁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이 천명한 폐정개혁안의 조목들이다.


1. 전운소(轉運所)를 폐지할 것

2. 국결(國結)을 하지 말 것  

3. 보부상들의 작폐를 금할 것

4. 도내 환전은 옛 감사가 거두어갔으니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 대동미 상납 전에 각 포구 잠상의 미곡무역을 금할 것

6. 동포전은 각 집마다 봄, 가을 2냥씩으로 정할 것

7. 탐관오리들을 파면, 축출할 것

8. 임금을 둘러싸고 관직을 팔아 국권을 조롱하는 자들을 모두 내쫓을 것

9. 관장이 된 자는 해당 경내에 입장(入葬)할 수 없으며, .또한 논을 거래하지 말 것

10. 전세는 전례에 따를 것

11. 연호(烟戶)의 잡역을 줄일 것

12. 포구의 어염세를 혁파할 것

13. 보세(洑稅)와 관답(官畓)은 시행하지 말 것

14. 각 고을에 원이 내려와 백성의 산지에 늑표(勒標)하고 윤장(倫葬)하지 말 것

15. 균전어사를 혁파할 것

16. 각 읍 시정 물건들에 대한 분전수세(分錢收稅)와 도가명색(都賈名色)을 모두 혁파할 것

17. 백지 징세와 사전 진결을 거두지 말 것

18. 대원군을 국정에 간여토록 하여 민심이 바라는 대로 할 것

19. 진결(賑結 )을 혁파할 것

20. 전보국이 민간에 대한 피해가 크니 혁파할 것

21. 각 읍 관아에서 필요한 물건은 시가대로 사서 쓸 것

22. 각 읍 아전을 임명할 때 돈을 받고 하지 말고 쓸만한 사람을 택하여 쓸 것

23. 각 읍 이속들이 천금을 축냈으면 그 자만 처형하고 친족에게 징수하지 말 것

24. 묵은 사채를 관장을 끼고 억지로 거두는 일을 금할 것

25. 동학교도를 무고히 살육하지 말며 동학과 관련하여 가둔 이를 모두 신원할 것

26. 京營邸吏料米는 과거의 예에 따라 삭감할 것

27. 포구에서 장사하는 각국 상인들의 동성 시장 출입을 금하고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행상하지 못하게 할 것  

(1-14조는 「전봉준판결선고서원본」(『동학관련 판결문집』,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 1994), 15-27조는 정창열의 「갑오농민전쟁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1, 170-171쪽) 참조. 25-27조는 정창열이 다른 폐정개혁안들을 분석하여 추가한 것임.)



    이들 조항은 세제나 탐관오리의 횡포에 대한 개혁을 주된 내용으로 하며, 심지어 국정의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조항에는 보국안민, 축멸양왜 등 농민군이 봉기하면서 내세운 핵심 가치가 온전히 반영되지 않았다. 주로 ‘안민’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확인될 뿐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던 2차 봉기의 성격 및 구호가 반영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조항은 정부군과 교전하여 전주화약을 맺을 당시 농민군 지도부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차 봉기 시에는 갑오개혁의 영향과 반일, 반외세에 대한 내용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어야만 한다.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였으므로 이들 폐정개혁안은 농민군의 봉기과정을 따라 점차 완성적인 모양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2차 봉기를 앞둔 상황, 즉 갑오개혁의 영향을 받고, 일제의 침략에 분노하던 시기 동학 집강소의 ‘폐정개혁안’에는 당연히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나 근대적 개혁의 요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으로 볼 때 오지영의 『동학사』 (오지영, 『동학사』, 민학사, 1975.)에서 기록된 폐정개혁안 12개조는 반외세와 갑오개혁의 내용이 대폭 반영되어 있으므로 2차 봉기 당시 개정된 폐정개혁안일 가능성이 있다. 이 폐정개혁안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인물이 직접 기록한 것이므로 충분히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조항에는 2차 봉기에서 목적으로 천명한 척왜에 대한 태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고, 갑오개혁의 영향을 받은 듯한 신분 개혁 등의 조항도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동학사』의 폐정개혁안 12개조의 내용이다.  


1. 도인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와 간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이다. 

(이 12개 조의 폐정개혁안은 오지영이 『동학사』에서 가공적으로 만들어 내 신뢰할 수 없다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대체로 폐정개혁안 자체는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12개 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된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가 집약,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영섭(「『(역사소설) 동학사』의 12개조 폐정개혁안 문제」, 『시대정신』 68, 2015, 136-147쪽), 박종근(「갑오농민전쟁(동학란)에 있어서의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역사논평』 1962년 4월호(일본)), 한우근(「동학군의 폐정개혁안검토」(『역사학보』 23, 역사학히, 1964, 55-69쪽) 등이 사료성을 부정하는 연구를 발표하였지만, 12개 조항에는 보국안민, 반외세라는 이들의 봉기 목적에 그대로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게 반영되지 못하였다.)




    앞서 살펴본 27개조 보다 상당히 정돈이 되었고, 일제에 대한 태도와 갑오개혁의 내용이 일부 반영된 점으로 보아 여러 폐정개혁안 중에서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평등을 일관되게 표방하였던 동학의 핵심사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이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들 폐정개혁안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혁명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가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혁파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구현하는 근대적 가치의 사회였음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동학혁명은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건의 하나로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과 평등관이 근대적 형식을 갖추고 근대성을 확보하는 결적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의 전통사상 속에는 이미 근대의 핵심 가치인 평등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였고, 수운 최제우는 전통사상 속에서 이러한 평등의 가치를 추출하여 주창함으로써 한국이 가야 할 근대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동학의 평등사상이 전국의 민중들에게 급속하게 전파되는 통로가 되었고, 이러한 평등사상의 전파는 유교적 봉건사회의 낡은 신분질서를 급속하게 해체하고 근대민족으로서 한민족의 출현을 촉진하는 교량 혹은 징검다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한국사회의 근대적 성격은 더욱 심화되었고, 동학혁명이 제시한 근대적 개혁의ㅣ 의제는 이후의 2, 3차 갑오개혁이나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 반영되면서 한국적 근대를 전망하고, 견인하는 핵심 기준과 요소들로 작용하였다.


 3) 3.1혁명과 동학-근대민족 한민족의 탄생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의 근대를 설계하고,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조정과 유생, 일제의 조직적이며 가혹한 탄압은 동학 세력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농민군의 수장이었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2대 교주 최시형 역시 1998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아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국내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오세창 등 개화파와 교류한 손병희는 1904년 동학교단이 주도하는 ‘진보회’를 통해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갑진개화운동은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반봉건, 근대화 운동이었지만, 동학농민혁명이 보여준 혁명적 성격과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다.

    1905년 손병희는 동학이라는 교명을 천도교 변경하고, 일진회계 천도교인들을 축출하면서 교단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천도교는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등 문명개화론을 지지하는 교인들에 의해 운영되면서 교단 조직과 교리가 근대적으로 재편되었다. 현재 천도교에서 보이는 3권분립 형태의 교단 구조도 이 시기의 개혁을 통해서 도입된 것이다. 손병희는 최제우가 제시한 인간평등의 사상인 시천주 사상을 인내천(人乃天)으로 재해석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시천주, 사인여천 등과 같은 내용이지만, 보다 근대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천도교의 교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 시기 천도교 주도 세력은 포교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동시에 민족 간 평등을 위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 권력을 장악하여 계층, 계급 간 평등을 구현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 역시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조규태, 「3.1운동과 천도교」, 『유관순연구』 1, 천안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20, 184쪽.)

 손병희는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조국을 되찾기 위해 제2의 동학혁명을 전국 천도교도의 주도적 참여와 선도적 제휴로 민중의 호응을 받아 착수해야 한다’ (이종일, 『목암비망록』, 1919. 9.30.)고 인식하고 있었다. 손병희가 이 시기 비록 애국계몽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전술을 주로 구사하였지만, 이는 제2의 동학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펼친 위장 전술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손병희가 근대화된 일본을 목격하고 개화파와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실력양성 등 문명개화론의 입장을 수용한 것은 사실지만, 『목암비망록』의 기록처럼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이라는 충격적 사건은 손병희가 민족운동의 전략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19년 1월 손병희는 최린 등에게 “장차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대하다. 우리들이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무위무능하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이미 정한 바 있으니 제군은 10분 분발하여 대사를 그롯됨이 없도록 하라.”고 (최린, 「자서전」, 『여암문집』 상, 여암선생문집편찬위원회, 1971, 182쪽.) 말했다고 한다. 적어도 1919년 1월 당시에는 손병희가 독립운동으로 대대적인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정황은 다른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손병희는 1919년 1월 5일부터 봉황각, 해주, 의주, 길주, 원주, 경주, 서산, 전주, 평강 등지를 선정하여 특별기도를 실시하도록 하였고, 각각 4명씩의 간부를 파견하였다. (「오세창 신묹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국사편찬위원회, 1990, 53-54쪽.) 이 때의 상황을 『천도교경주교구연혁』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自60年 1月8日至 同年 2月25日 49日間 3月1日 독립선언식을 앞두고 중앙총부에서 지명, 특별기도롤 본교당에서 행하다.” 『천도교경주교구연혁』(최인경, 「3.1운동의 전개와 천도교」, 『신인간』 통권 320, 신인간사, 2019, 18-19쪽에서 재인용.



    이 기록을 보더라도 손병희가 1919년 1월 이전에 혁명적 독립운동으로 3.1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종이 1월 21일 일제에 의해 독살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천도교가 계획한 만세운동은 더욱 강력하고 커다란 동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1919년 1월 하순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수립하였다. (최린, 앞의 책, 앞의 자료, 182쪽.)

 이렇게 결정된 독립운동의 방식과 원칙에 따라 천도교 지도부는 여러 세력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천도교의 시도는 그들이 접촉한 한규설, 김윤식, 윤치호 등의 동의를 구하지 못해 곤란한 상황을 맞았다. (「최린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국사편찬위원회, 1990, 135-137쪽.)

 이런 상황에서 이승훈이 선천, 평양 등의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한 후 서울에 아서 권동진, 최린 등과 만났는데 천도교 인사들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하되, 그 방식은 독립청원이 아닌 독립선언의 형태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권동진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50쪽)

 천도교 측의 제안을 받은 기독교 측은 2월 23일 함태영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천도교 측의 제안대로 독립선언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이승훈, 함태영 등을 대표로 선정하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과 만나 독립선언을 결행하기로 합의하였다. (최인경, 앞의 글, 20-22쪽.)

 한편, 천도교 지도부는 불교 측과의 연합도 진행하였는데 최린으로부터 2월 24일-27일 독립운동의 계획을 들은 한용운은 참여하기로 하고 백용성을 동지로 끌어들였다. (최인경, 앞의 글, 22쪽.)

  

 3.1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천도교 지도자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양한묵, 이종일, 이종훈, 임례환, 홍기조, 홍병기 등으로 모두 15명에 달하였다. 천도교는 ‘3.1 독립선언’의 과정에서 단지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살펴보았듯이 다른 종교계와 활발히 교섭하며 연합을 성사시켰고, 모든 경비를 충당하였으며,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기까지 하였다. 아울러 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도 지역의 천도교 신자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천도교의 역량이 없었다면 3.1독립선언서, 3.1만세운동, 3.1혁명은 결코 성립될 수 없었다. (‘3.1독립선언서’는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3.1만세운동은 3.1혁명이 완성되어가는 운동의 방식이었다. 3.1독립선언서가 도화선이 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3.1만세운동으로 잠재되었던 민족의식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고, 이렇게 한민족의 근대적 민족의식이 드러남으로써 근대민족 한민족이 역사의 실체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근대민족을 출현시킨 질적,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사건을 3.1혁명이라 지칭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천도교는 이들 의제를 논의할 때 당연히 그 중심에 위치해야만 한다.  

 

    3.1혁명이 중대한 의의는 전 민족이 하나의 가치와 목소리로 통합되었다는 점이다. 국내의 농민, 노동자, 청년, 학생 등 거의 모든 계층의 민족구성원이 하나가 되어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하였고, 중국, 러시아. 일본, 구미의 한인들 역시 이러한 ‘대동단결’의 흐름에 동참하였다. 동학에서 시작된 조선 민중들의 근대적 자각은 일제의 수탈과 함께 진행된 근대적 모순들과 부딪히면서 평등과 해방, 조선의 독립이라는 확고한 근대의 지향점으로 수렴되었다. 드디어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지식인, 청년, 학생, 일제에 의해 근대적으로 재편되어가던 산업을 통해 양산된 의식화된 노동자, 일제의 수탈로 토지와 곡식을 수탈당해 붕괴 직전에 직면한 농민들은 그들의 근대적 민족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3.1혁명을 폭발시켰고, 3.1혁명은 그들을 근대적 각성과 근대적 의식으로 무장한 근대민족 한민족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렇게 거대한 역사적 지표가 되어버린 3.1혁명이 전개될 수 있었던 사상적 근원에 동학의 평등사상이 있었다. 동학사상의 전파가 한국적 근대의 핵심 가치인 평등이념을 제시함으로써 한국적 근대의 시작점이 되었고, 동학혁명을 통해 이러한 평등사상이 민중의 근대적 전망으로 공유되었으며, 이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3.1독립선언과 3.1혁명이 전개되었다는 점 (독립선언서에 이러한 평등이념과 평화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무오독립선언서’나 ‘3.1독립선언서’ 모두 한결같다. 5장의 내용 참조.)을 고려한다면 동학이 주도한 한국적 근대의 시작은 3.1운동을 통해 근대민족 한민족이 출현함으로써 하나의 역사적 여정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최제우의 동학 창시로부터, 동학혁명, 3.1혁명으로 이어진 동학, 천도교 주도의 근대적 여정은 3.1혁명을 통해 근대민족 한민족이 탄생과 함께 한 단원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쉽게도 3.1혁명의 시기까지 한국의 근대를 주도하였던 동학과 천도교는 역사의 주역에서 주변인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 여정의 중심에는 동학 창시와 포교-동학농민혁명-3.1혁명이라는 거대한 근대의 역사를 써나가기 위해 막대한 피해를 기꺼이 감수한 천도교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계속)

 

 

글, 장우순(성균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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