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포덕166년 2025.12.07 (일)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2. 일제의 무단통치
일본이 조선에서 헌병 경찰 제도를 시행한 것은 병합 이전부터였다. 병합을 준비하면서 1907년 10월 7일 ‘한국주차 헌병에 관한 건’이란 법령을 제정하여 “한국에 주둔하는 헌병은 주로 치안 유지에 관한 경찰업무를 장악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악명 높은 무단통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주한 일본헌병대 782명으로 46개 분견대를 설치하였던 것이 전국이 헌병 경찰의 강력한 통제 아래 들어가면서 헌병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1910년에는 헌병 2019명에 653개의 분견대가 설치되었으나 1년 후인 1911년에는 헌병 7749명에 953개소의 분견대가 설치되어 전국의 산간벽지까지 파출소가 설치되어 헌병과 순사가 배치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한 사내(寺內正穀)는 남달리 언론탄압에 혈안이 되었다. 자신의 언동은 물론이요, 그의 시책에 대해서도 일체의 보도를 금지시켰다. 한국인이 간행하는 신문만이 아니요, 제 국민이 간행하는 일어신문과 통신에 대해서도 극심한 단속과 검열을 가하여 걸핏하면 발행금지와 압수로 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극비리에 주한 병력을 서울 중심으로 재배치하여 철통같은 계엄태세를 갖춘 다음 1910년 8월 29일 합방조약을 발표했다.
합방 후 일제는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을 근간으로 무단통치를 시행하여 근대 세계사상 유례없는 식민지통치를 자행했다. 그들은 언론기관과 출판물을 폐멸시킴과 동시에 일간신문은 총독부 기관지 일어판 『경성일보』와 한글판 『매일신보』외에는 전부 폐간시키고 말았다. 사내(寺內)통감은 한일합병후에도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계속 재임하였는데, 그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그날부터 일반 공중집회를 철저히 금지하여 서울 거리에서 왕래하는 시민 2~3명의 회합도 엄금한 상태에서 대소의 유명 무명의 정치결사와 사회단체 내지는 학회 체육 단체까지 모조리 강제 해산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중요 단체의 대표를 경무 총감부로 호출하여 즉시 해산할 것을 명령하는 동시에 약간의 해산료를 던져주기도 하였다.
의암성사를 배신하고 매국행위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친일 주구 이용구의 일진회도 일금 15만 원을 주고 가차 없이 해산시켰다.
3. 국권 회복은 내가 한다
일제의 침략행위가 노골화하자 성사께서는 여러 차례 이를 경계하는 말씀을 남기셨다. 1910년 6월 8일 총부직원과 시내 유지 교인을 모이게 한 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마치 머리 없는 사람같이 되었다. 나라의 세 가지 요소는 주권과 토지와 인민이며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나라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주권 없는 나라이니 머리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일본이 몇 해를 두고 우리나라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보호한 것이 무엇이냐. 토지를 보호하였단 말인가, 재산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주권은 사법이요 사법은 주권인데 사법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사·농·공·상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선비는 인민의 대표인데 심지어 능참봉까지 빼앗고, 토지는 인민의 생명선인데 척식회사를 두어 전국의 좋은 농토를 모조리 빼앗고, 상공업만 해도 담배 심는 것까지 처음에는 허가를 내주다가 나중에는 전매품이라고 독점을 하니 이런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살기 좋은 때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어찌 통탄치 않겠는가. 내가 일본사람에게 보호 사실을 질문한다면 한국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라 하리라. 지금 우리나라의 유지니 신사니 하는 사람들이 교육이 제일이다, 경제가 제일이다, 군사가 제일이라 하지마는 우선 나라가 있은 후에라야 할 일이 아니냐. 나라가 없고 보면 교육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경제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군사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리고 인간 생활은 경제가 유지하는 것인데 경제에 착념(着念)이 없으면 한 집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1910년 6월 20일 교리 강습생 졸업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국가를 큰 배에 비유하면 국민은 승객과 같아 일기가 좋을 때는 순풍에 돛을 달고 마음 놓고 행선 할 수 있기 때문에 배안이 조용하고 편안하지만 불시에 폭풍우를 만나게 되면 사공도 마음 놓지 못하게 되고 승객 전체가 당황하게 되어 질서가 문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폭풍우 만난 큰 배와 같은데 우리 국민의 책임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할 때이다.
그 책임은 전생에도 돌릴 수 없고 후생에도 미룰 수 없다. 전생에 돌리자니 이미 죽은 귀신이요. 후생에게 미루자니 아직 나지도 않았으니 부득이 오늘 당한 일은 오늘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무슨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감화를 받아서 만사가 무위이화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라고 다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요, 감화를 받으리만큼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난 체 하는 사람이라도 한울님의 감화를 받지 못하면 사람의 능력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큰일을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그날 아침 성사께서는 총부 조회 석상에서 “앞으로 민족독립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 이 일은 강력한 조직을 가진 천도교만이 가능하다.”고 하시면서 국권회복의 선두에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일제는 처음부터 천도교를 총독 정치에 가장 큰 저해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갑오동학혁명 때는 척양척왜의 기치 아래 일본군과 무력으로 싸웠으며 갑진개혁운동 때는 친일행위를 한 이용구 일파를 교회에서 추방하였다. 더욱이 일본의 비호를 받는 시천교는 쇠퇴하는 반면 천도교 세력은 날로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세확장에 중요 역할을 하는 성미제도를 강제로 폐지시키는 등 탄압을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병합 후 천도교를 공인종교로 인정치 않고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총독부 경무국에서 특별 관리토록 하였으며, 중앙총부와 지방교구에 정·사복 경찰을 상주시켜 시일식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행사를 사전 보고하여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특히 중앙총부 공선관에는 형사를 상주시켜 발송공문과 수신공문을 일일이 검사하였으며, 경리관은 매월 재무 회계내용을 보고하게 하는 등 천도교의 미세한 동향까지 철저히 감시하였다.
(계속)
저자소개
![]()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홀로 피어 꽃이 되는 사람』 천도교신문에서는 시인이자 숲 해설가인 이시백 동덕의 생활 명상 글과 라명재 송탄교구장이 엄선한 동학 경전 구절을 함께 엮어, 자연...
지난 11월 30일은 제가 전주교구에서 120주년 현도기념 특강을 한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고천하 – 천지부모라는 제목이었습니다. 120년 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
"함께 써온 100년의 역사, 다시 여는 100년의 미래" 포덕 166(2025)년 11월 23일 신인간사 대표 휘암 윤태원
해월신사 지난 10월 칼럼에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포덕168(2027)년에는 천도교 세계화를 선언하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