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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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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하얀 혁명>(6)

  • 편집부
  • 등록 2025.02.1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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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4. 후퇴


남접군과 북접군이 후퇴하여 집결한 곳은 논산이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와 봉황산 전투에서 퇴각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패인은 물론 무기의 열세였지만, 무리하게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수뇌부 회의 끝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만한 봉우리를 선점해 방어전을 펴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을 변경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주 전투 이후 동학군의 약점을 파악한 관군과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섰고,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가 논산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19대대는 오로지 동학군 궤멸만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파견한 최정예부대로, 현역과 예비역 7년간의 병역을 마치고 다시 소집된 3개 중대 663명의 백전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식 소총에, 최신 군사정보와 작전지도는 물론, 군량과 탄환을 보급하는 병참대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며, 근대식 훈련과 숙련된 지휘관, 상명하복의 엄격한 군율로 다져진 부대였다. 이런 부대가 동학군을 섬멸하기 위해 3개 지대로 나누어 서울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군이 19대대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건다는 건 자멸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주 전투에서 다수의 양총과 탄환을 노획한 것이 있고, 군사 요충 고지를 선점해 양총 부대를 전면에 배치하여 방어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동학군은 정예병 위주로 부대를 재편성해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산성(黃山城)에 진을 쳤다. 연산(連山)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져 있어 많은 수의 동학군이 포진하기 적당했고, 전방 개활지가 넓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도 용이했다. 신식 양총으로 무장하고 고지를 선점한 동학군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와 군량의 부족에 더해 점점 추워지는 날씨였다. 두 달 넘게 외지로 다니며 전투를 벌여온 동학군의 입성은 처음 출진할 때 입었던 홑옷 차림 그대로였다. 두꺼운 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겨울 날씨에 바람이 숭숭 새어드는 석새삼베 홑옷을 입고 전투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천포는 한규석의 지휘 아래 화목을 장만하고, 대나무를 쪼개 엮은 발에 가랑잎과 마른 솔잎을 채워 넣은 장태를 만들었다. 화공(火攻)을 위한 준비였다. 장태 공격은 고지를 점령한 부대가 장태에 불을 붙여 산 아래로 굴리는 방식의 전통적 화공법이다. 투석전을 위해서도 바위를 깨뜨려 산더미처럼 돌멩이를 쌓았다. 진영도 백병전을 고려해 1열은 양총 부대, 2열은 화승총 부대, 3열은 장태와 투석전 부대로 재편성하고 기동훈련도 마쳤다.

드디어 관군과 일본군의 선공으로 연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창진 수접주는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데도 전날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가 왔다며 힘차게 독전기를 흔들었다. 본진의 신호가 떨어지자 이에 응답하는 깃발의 펄럭임과 함성이 연산 일대의 산과 들녘에 울려 퍼지며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쳤다. 

적군은 동학군의 기세와 저지대의 불리함을 간파했는지 정면을 버리고 측면과 후사면으로 파고들었다. 뜻하지 않은 전선의 변경에 따라 접전 면적이 넓어졌으나 부족한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전선을 이동하지 않고 선점한 고지를 고수한 채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눈이 와서 미끄러우면 고지를 점령한 동학군에게는 문제가 없으나 산을 타고 올라야 하는 적군에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차츰 굵어지는 눈발 속에 양 진영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눈이 그치지 않자 다급해진 쪽은 관군과 일본군이었다. 먼 거리를 우회해 돌아오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했고, 강설을 핑계로 총 한 방 못 쏴보고 후퇴한다는 것은 백전노장 후비보병 19대대의 위신을 깎는 일이었다. 

이윽고 산정을 향해 올라오는 움직임이 보였다. 적병의 복장이 확연히 구별되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자세히 보니 관군과 일본군이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 지휘관 뒤에 색동옷을 입은 관군 여럿이 따르는 형국이었다. 일본군이 지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조선 관군은 지휘권도 빼앗긴 채 일본군 꽁무니나 따르며 제 나라 백성인 동학군을 죽이러 다가오는 것이었다. 

대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1열 양총 부대의 사격을 시작으로 2열의 화승총 부대가 번갈아가며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동학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적군의 대열이 횡으로 움직이며 넓게 퍼지는 게 보였다. 대열이 흩어짐에 따라 화망도 넓어졌다. 동학군의 집중사격 효과를 반감시키고 허투루 쏘는 실탄의 사용량을 늘리려는 계략이었다. 

적군이 굵은 나무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서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인 적설이 유탄에 맞아 흩어지며 동학군을 향해 조여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빈도의 사격이라도 동학군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고, 한 번을 쏴도 연발로 긁어대는 적군의 총격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맹렬했다. 실탄 보유량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황은 동학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열의 양총부대 사격이 끝나고 2열의 화승총 부대가 사격을 준비하는 동안 일본군 지휘관이 외치는 돌격 명령 소리는 총성 못지않게 매섭고 날카로웠다. 일본군은 화승총을 겁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날리는 눈발에 심지가 꺼지면서 격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접전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양측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동학군의 실탄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창진 수접주가 승부수를 띄웠다. 

“장태에 불을 붙여라.”

한규석이 지휘하는 장태꾼이 일제히 달려들어 불붙은 나무막대를 장태에 찔러넣었다. 

“장태를 굴려라.”

 장태가 불살을 튕기며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때아닌 화공에 놀라 도망치는 적군을 향해 남은 총알 전부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장태는 한번 구르고 지나가면 그만이었고, 총알이 다한 총은 헌 나무막대기에 불과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돌멩이를 던지고 바위를 굴렸다. 그것도 곧 바닥이 드러났다. 무기가 동나자 관군과 일본군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사생결단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낫과 창을 든 동학군과 소총과 기관총을 든 일본군과의 비대칭 전투가 연산 일대의 산봉우리에서 피를 튀겼다. 

싸움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았다. 동학군은 살기 위해 싸웠고, 관군과 일본군은 죽이기 위해 싸웠다. 전장은 차츰 흰 눈과 붉은 피로 칠갑한 무간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장태로 불붙은 연꽃 산봉우리는 희고 붉은 반점을 뿌린 선계(仙界)처럼 영롱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총 맞아 죽어가는 동학군의 비명과 피눈물이 범벅된 연옥(煉獄)의 불구덩이였다. 연산의 산맥이 무너지고 피바다의 해일이 밀려왔다.

공수의 위치가 바뀌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동학군은 산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무기가 동나서 고지를 지킬 수도 없었지만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한규석은 한사코 후퇴하지 않겠다는 이창진의 독전기를 빼앗아 짚고 그를 업은 채 산에서 내려왔다. 반 이상 줄어든 패잔의 대열은 피투성이 옷을 육단처럼 걸쳐 입고 눈보라 속 밤길을 걸어 논산으로 향했다. 

연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동학군은 논산에 재집결했으나 다시 기병치 못하고 추격을 피해 전라도 지경으로 후퇴해 내려갔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삼례를 지나 전주, 원평, 태인까지 내려갔다가 북접군은 정읍에서 남접군과 헤어져 장성, 담양, 순창을 지나 충청도로 방향을 틀었다. 낯선 전라도보다는 보은 대도소가 있는 충청도로 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추위에 지치고 길은 험해도 타향에서 낙오되면 끝장이란 생각에 북접군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여 임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만났다. 해월은 청산 기포령 이후 북접군과 동행하지 않고 충청도에 남아 있다가 관군의 추적을 피해 전라도 임실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학교의 정신적 지주인 해월을 만나자 북접군은 사지에서 손오공을 만난 듯 기뻐했다.

“내가 불민하여 통령을 이토록 고생시켰소.”

해월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북접군을 이끌고 나타난 손병희를 보자 칠순을 바라보는 노구임에도 눈물을 흩뿌렸다.

“친명(親命)을 완수치 못하고 살아 있음이 수치일 따름입니다.”

“솔병에 익숙한 영장(營將)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승전만을 바라겠소?”

“스승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꿈만 같습니다. 한울님이 우릴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손병희 통령이 해월에게 청수를 봉전하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한 후 곤궁한 상황을 고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의복이옵니다. 동장군의 횡포 앞에 동사하는 군사가 부지기수이옵니다.”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도 예사롭지 않다 들었소.”

“다행히 일본 후비보병은 남접군을 뒤쫓아 광주와 나주로 내려갔고, 관군인 장위영 병대와 경리청군 역시 남원으로 직행해 들어가 우리가 임실로 향한 것은 모르는 듯하옵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어찌 정하였소?”

“일본군은 물론이고, 당장 관군과 조우하게 되면 패전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일단은 종적을 숨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허면?”

“무진장(茂朱, 鎭安, 長水) 쪽으로 은밀히 움직여 영동으로 가려 하옵니다.” 

“그곳은 천하의 험지가 아니오?”

“허를 찌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험로를 택하리라곤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여기서 장수까지는 멀지 않으니 그곳 관아를 기습하고 장터를 점거하면 다소간 행렬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민폐는 없어야 하오. 우리가 기포한 이유가 만백성을 한울님으로 모시고자 함이거늘 민가를 핍박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도인들을 단단히 타일러 스승님의 심려를 덜겠습니다.”

“군사 중에 무뢰배 부랑자도 다수 끼어 있다 들었소. 그런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 장차 동학군 전부를 죽이는 화근이 될 것이오.”

“난민(亂民)이 전혀 없지는 않사오나 군율로 엄히 다스려 낭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수도(修道)가 얕으면 정병(精兵)으로 거듭나기 어려운 법.”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북접군은 해월을 만나자 그동안 겪었던 풍찬노숙도 잊은 채 무진장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 장수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예상은 적중했다.

장수는 동학군의 위세가 강성했을 당시 남접의 김개남 군이 지나갔던 곳으로 이곳 관원들은 그때의 여얼(餘孼)을 다시 입을까 두려워 북접군이 나타나자 한두 합 만에 영관, 교졸 할 것 없이 무기를 팽개치고 줄행랑치기 바빴다. 영읍(營邑)이 크지 않아 물산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향리와 포교로 조직된 민보군까지 패퇴시켜 얻은 무장과, 관아에 쌓아둔 대동목, 전세목(田稅木)을 수습해 추위로 얼어붙은 손발을 동여매고 다음 목적지인 무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충천했다. 교주인 해월이 앞장서니 동학의 부적만 몸에 지녀도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꼭 들어맞는다며 자청해 입도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군세는 배로 불어났다. 전투 경험이 쌓이자 행군 도중 길목을 막아서는 민보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전진을 이어갔다. 북접군은 무주 초입의 설천(雪川)과 월전(月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전라도 땅을 벗어나 충청도 땅 영동으로 짓쳐 들어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자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살을 에는 추위가 연일 엄습했어도 들리는 사투리가 익숙하고 정겨워 누구를 만나도 고향 친구인 듯 반가웠다. 더욱이 영동은 동학도가 태반인 곳으로 이들이 전해주는 첩보를 통해 일본군이나 관군과 조우하지 않고도 적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동의 사정도 그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민보군이 조직되어 북접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민보군은 주로 양반 사족이나 향리, 지방 수령을 중심으로 지주나 마름, 소작인을 모아 조직한 민병대이다. 이들은 원래 지금은 동학군이 된 농민과 한 동리에 살던 이웃이었으나, 전래적으로 누려왔던 기득권을 빼앗길 거라는 위기감 때문에 동학군과 맞서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전에 동복 천 벌을 내놓은 영동의 이용직이었다. 그가 민보군을 조직해 전에 당했던 치욕을 갚으려 벼르고 있었다. 

민보군의 전투력은 대단치 않았어도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험의 소지는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원수가 되어 싸운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싸움의 결과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공멸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했다. 게다가 동학군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일본군, 관군에 이어 민보군까지 가세해 셋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정녕 처음 기포할 당시 우려했던 일들이 미상불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북접군은 영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황간(黃澗) 관아를 기습해 무기와 광목, 공전(公錢)을 전취하고 용산(龍山) 장터에 진을 쳤다. 기포령 이후 처음으로 사람 냄새 풍기는 마을에서의 주둔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관군과 민보군의 도착 소식에 북접군은 장터 뒷산인 용산으로 들어가 산마루에 진을 쳤다. 

용산은 두 마리 용이 맞대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골짜기가 깊어 수비하기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그간의 전투를 통해 산정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첩경임을 잘 아는 북접군으로서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능선 너머 천관산 밤재를 지나면 동학군의 은거지인 청산 문바위골이 자리하고 있어 용산은 고향마을 앞산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다.

북접군은 본진을 산정에 두고 산 아래로 매복을 보내 연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군이 관군과 합류해 있다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정면을 피해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해올 것이기에 사방의 경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적군은 골안개가 자욱한 새벽, 북접군이 포진하고 있는 산정을 향해 정면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무리 북접군의 무장이 빈약하다 해도 지세가 불리한 정면을 치고 올라올 리는 없었다. 전략에 익숙한 일본군이 합세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확실했다. 

북접군은 산 중턱에 매복병을 은신시켜 두었다가 골짜기 깊숙이 전진해 들어온 적군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쏘아대는 적군의 총소리가 어지러웠으나 북접군은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안개가 걷히자 과연 누런 옷의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고, 청황색의 관복을 입은 관군과 구구 각색 복장의 민보군뿐이었다. 

매복병의 공격이 뜸해지자 적군이 우세한 무기를 믿고 빠르게 전진해 들어왔다. 매복병이 골짜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매복이 사라지자 적군은 진영을 남북으로 나누어 산정을 향해 협공해 들어왔다. 그러나 황간 전투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고 산정에서 내리쏘는 북접군의 반격 앞에 적군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북접군이 철성을 치며 청산 방향으로 패주하는 적군을 쫓아 북상을 서둘렀다. 북접군은 오랜만에 맛보는 승전의 통쾌함에 취해 천관산 밤재를 한달음에 치달아 올라 문바위골로 진격해 들어갔다.

밤재를 넘어 길게 내리뻗은 골짜기에 들어섰으나 적군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터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 굽이를 돌아서자 멀리 동학군이 은거하며 정병 훈련에 여념 없었던 훈련장이 나타났고, 맞은편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든 초막이 보였다. 북접군은 오랜 타향살이에서 돌아와 고향 들머리에 서서 살던 집을 내려다보는 감회에 젖었다. 기포령이 발한 지 실로 삼 개월여 만에 찾은 한겨울의 귀소였다. 

마침내 훈련장에 당도했다. 눈 쌓인 훈련장에는 토끼와 고라니, 살쾡이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이 해찰하는 학승(學僧)처럼 언 눈밭을 비질하고 있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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