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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와 3 · 1운동(21)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
기사입력 2025.10.01 09:41 조회수 6,837 댓글수 0
『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2. 잊혀져 가는 3.1운동
우상화로 왜곡된 3.1정신 (참고 박성수 자료)
우리에게 자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 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을 잊지 말자
올해로 3.1운동 90주년을 맞는다. 당연히 축하해야 하지만 반성할 것도 많다 3.1운동이 일어난 해는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한지 10년이 되기 직전 인 9년차였다.
우리민족이 돌연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독립선언을 하기까지 민족대표 33인, 그중에서도 손병희 선생의 노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3.1운동이 아무 준비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이어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까지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3.1운동이 성공한 것인데 그런 것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았다. 준비과정이 모두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발각될 뻔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고 보면 그런 일들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세월의 물결에 씻겨 가지와 잎이 떨어져 태백산 정상의 주목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었다는 사실, 선언서를 인쇄한 사람이 천도교 보성사의 이종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를 손병희 선생이 했다는 사실은 확실한데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낭독한 사실만 교과서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으나 모두가 거짓이다. 일이 잘되면 자신이 했다며 공을 내세우지만 일이 잘못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뒤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가면서 많은 사람이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품에 감추고 혹은 걸어서 고향을 찾아갔다. 유관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관순 이전에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매국노 이완용까지도 민족대표의 한사람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나라가 독립되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절한다고 말했으나 만세운동 준비를 일본경찰에 알리지는 않았다. 3.1운동 앞에 매국노의 양심이 무릎을 끓은 것이다.
3.1때처럼 모두가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애국심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세계화 운운하는 바람에 애국심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개인주의만 꽃피는 요즈음 배워야할 역사의 교훈이다.
북한의 3.1운동 왜곡
최근 몇 년 사이 3.1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충격을 주고 있다. 건망증은 본래 노인들의 지병으로 알고 있는데 요즈음 젊은이들도 건망증에 걸린다는 것이니 세태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심지어 젊은 학자들도 3.1운동이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니 용서받을 일이 아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3.1운동의 나라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한 사실은 유명하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 그대 한국이여 네가 다시 한번 불을 켜는 날엔 한국아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이 시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던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실려서 지금도 우리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3.1운동의 비폭력 정신은 인도의 간디와 네루까지도 고개를 숙였다는데 우리는 왜 3.1운동을 잊어만 가는가?
역사는 기억해야 역사라고 한다. 잊으면 역사는 영원히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고 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망각보다 더 무서운 범죄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한번 왜곡된 역사는 다시 살리기 어렵다. 3.1운동을 가장 심하게 왜곡하고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의 역사왜곡은 날조라 할 정도다.
폐쇄된 공간 북한은 우리 근대사를 온통 김일성 위주의 역사로 개악하였다. 철창 속에 갇힌 북한 인민민주주의 인민들은 독립운동을 김일성 혼자 한 것처럼 꾸민, 아니 날조한 연극을 보고 박수치라고 강요받고 있다.
1911년을 김일성이 태어난 해라하여 주체 원년으로 삼고 조금 있으면 대대적인 주체 100년 축제를 할 모양이니 이쯤 되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북한에서는 3.1운동 때 여덟 살 난 김일성이 시위대를 이끌고 평양 대동문까지 갔다는 거짓말을 믿어야한다. 거기에 더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서울의 민족대표보다 먼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믿어야한다. 북한에서는 이 거짓말을 믿지 않으면 강제수용소에 가야한다.
한편 남한에서도 3.1운동에 대한 역사인식이 불완전하다. 3.1운동은 학생들이 먼저 일으킨 학생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만일 민족지도자들의 독립선언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학생과 군중들의 무질서한 시위운동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그야말로 일제가 바라고 바라던 폭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지도자들은 미리 못을 박고 당부하기를 질서를 지키고 비폭력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3.1운동은 훌륭한 독립운동으로 네루와 간디 그리고 타고르까지도 부러워했던 독립운동으로 기억된 것이다.
민족자결로 충분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당시의 연합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이 같은 국제승인이 있건 없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지 우리민족의 요구와 선언만으로 수립된 것이다. 굳이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독립이 미국의 독립선언만으로 가능했듯이 우리의 독립도 우리민족의 자결만으로 독립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자칫하면 이 같은 대원칙을 우리는 잊는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으로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독립을 선언하고 1910년의 국권침탈조약을 무효화시킨 것이 3.1독립운동이었다.
우리는 1965년 한일양국 간에 기본조약을 맺어 오랫동안 끊어졌던 국교를 정상화 하였다. 만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가 없었다면 기본조약 제 2조 “1910년 8월 22일에 체결된 한일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은 무효”라는 조문을 고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그때 한일회담을 반대하였고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였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3.1독립정신에 입각하여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무효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외쳤던 독립만세의 함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을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명문화한 것이니 어찌 우리가 3.1운동을 잊었다 할 수 있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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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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