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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사 전국 교구에 필립스 살균기 판매를 대행한다2월 18일 오후 2시 종로구 경운동 수운회관 905호 ㈜신인간사 사무실에서 ㈜신인간사는 ㈜다시물류와 업무 협약식을 갖고, 희암 성주현 ㈜신인간사 대표이사와 금암 이종민 ㈜다시물류 대표가 협약서에 서명하였다. 협약 내용은 향후 3년간 ㈜신인간사는 천도교단 내 필립스 UV-C 살균기 판매 및 홍보 등 영업 창구 역할을 수행하고, ㈜다시물류는 필립스 UV-C 살균기 판매영업지원 및 배송, 설치, A/S를 책임지며 신인간사를 통해 판매된 수익금은 신인간사가 갖는다는 내용이다. 성주현 ㈜신인간사 대표는 협약서에 서명 후 인사말에서 “아시다시피 어려운 상황이 많았었는데 다행히 ㈜다시물류와 좋은 관계가 형성돼서 신인간사의 새로운 경영 정상화 등 여러 측면에서 훌륭한 업무 협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번 계기를 통해 신인간뿐만 아니라 천도교도 조금 더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으로 갈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금암 이종민 ㈜다시물류 대표는 “제가 이 세계적인 대기업인 필립스 살균기를 사업 아이템으로 선택을 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 국민이 세상사람한테 덕이 된다는 측면, 돈 계산 보다도 덕이 된다는 측면입니다. 3년 전에 이 사업을 시작해서 진행하다가 그 덕의 열매가 우리 천도교에서 맺힐 줄 몰랐습니다. 전혀 생각 못 했는데 이게 한울님 감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감응이 우리 교인들한테도 덕이 되고 나아가서 우리 신인간의 덕이 되고 또 이러한 사례가 우리 천도교회 단체들의 덕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
2일, 수원교구 정기총회 열려수원교구는 포덕 166년 2월 2일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에 앞서 참석인원 30명, 위임 15명으로 총회가 성원되었음을 알리고, 운암 이창용 교화부장의 집례로 개회식순에 따라 청수봉전, 심고, 주문 3회 병송 후 교구장(지암 장구갑)과 감사장(축암 김천일)의 인사말 후 포덕 165년 교구 업무보고를 하였다. 이번 정기총회에서 교화부는 업무보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포덕 163년부터 해마다 5월부터 10월까지 둘째 토요일마다 교인 간의 심화기화를 위하여 교당에서 하루수련을 하였다. 5시에 새벽기도식을 시작으로 새벽, 오전, 오후 3차례 주문수련과 영상시청, 경전봉독, 저녁 6시 오후 수련을 하는 일정으로 올해에는(포덕166년) ‘도심 속의 열린 수도원’으로 수원교구 교인 외에도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진행하겠다고 하였다. 또 매 시일식 후 30분간 주문 수련을 진행하고 있으며 올해에도 계속해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포덕165년 1월 1일부터는 함께하는 기도식을 아침과 저녁에 교구 카톡방을 활용하여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 “새벽 기도식과 저녁 9시 기도식의 좋은 습관과 함께하고 있다는 좋은 기운으로 모아졌다”고 말했다. 성남, 송탄, 수원교구가 진행한 합동시일식이 있었으며, 포덕 166년에도 인근 교구와의 합동시일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어린이 시일(사회문화부, 장효재, 이윤정, 조인숙, 김순연 동덕 진행)은 매월 둘째 시일에 전국 어린이 온라인 시일, 매월 셋째 시일에는 인근 교구 어린이들과 함께 수원교구 1층에서 어린이 시일을 하고 있으며, 총부의 즐거운 도가 모임 지원과 수원교구 여성회의 지원으로 보다 유익하고 다양한 행사를 어린이들에게 제공하며 어린이 사업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이외에도 매 시일 설교내용을 녹음하여 교구대화방에 올려서 시일 참여 못 하신 분들도 설교내용을 들을 수 있고 반복 청취도 가능하도록 하였음을 경과보고하였다. 한편 교무부는 매달 진행하고 있는 교인 생일축하식과 기념일행사 등 교내활동과 제암고주리 추모 행사 등 대외행사에 대한 평가도 하였으며 기존의 도서관리와 교적부관리를 전산화시켜서 보관하고 있으며 1년 동안의 활동사진을 영상으로 제작하는 사업과 기타 경조사 관련 등 교무부 활동 보고를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사회문화부는 어린이 시일활동과 3.1운동 기념사업회, 경리부는 지면자료를 교인들과 함께 보며 항목별 수입. 지출내역 등을 교인들에게 경과 보고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어서 임시의장(운암 이창용 교화부장), 서기(순심당 조인숙 교무부장)신임 교구장 및 감사장 선출을 진행하였다. 임시의장께서 교구장, 감사장 선출 방식에 대한 교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암 안춘보 교구장, 축암 김천일 감사장(연임)으로 만장일치 추대하였다. 신임교구장으로 추대된 지암 안춘보 교구장은 첫째, 어린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어린이 전담교사를 두어 어린이 시일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어, 청년회 사업, 여성회 활성화의 사업계획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축암 김천일 감사장은 오고 싶은 교구, 즐거운 교구가 되도록 노력하는 교구가 되자고 말했다. 포덕 166년, 수원교구가 새로운 교역자들과 함께 힘차게 교구를 발전시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
해월신사 법설 : 천지이기 p.241~242 -
동학교서에 나타난 동학혁명기 일본군의 인식(2)3.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과 그에 대한 인식 일본군의 개입과 경복궁 점령으로 재기포한 2차 동학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동학군의 직접적인 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일본군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를 중심으로 후비보병 제18대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의 제4중대와 제7중대의 일부 병력, 그리고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 해군 츠쿠바함(筑波艦)과 죠코함(操江艦)이었다.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인 후비보병은 만 20세에 상비병으로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예비역으로 4년을 보낸 후 다시 5년의 복무를 한 군 경험이 많고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동학군 진압의 주력부대라고 할 수 있는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일본 에히메(愛媛) 지역 출신들이었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11월 12일(음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하였다. 출발에 앞서 전달된 훈령에 의하면, 첫째는 동학군의 근거지를 찾아내어 이를 초절(剿絶)할 것, 둘째 동학군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초멸(剿滅)함으로써 동학군이 재흥하는 후환을 남기지 말 것, 셋째 조선군의 진퇴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지휘 명령을 받을 것, 넷째 보병 1중대는 서로(수원-천안-공주-전주), 보병 1중대는 중로(용인-죽산-청주-성주), 보병 1중대는 동로(가흥-충주-문경-낙동-대구)로 행진할 것, 다섯째 동학군을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내몰도록 하며 가능하면 러시아 국경으로 향하지 않게 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조일연합군(朝日聯合軍)에 의해 철저하게 진압당하였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천도교창건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군이 일본군과의 첫 교전은 괴산이었다. 이에 괴산에 당도하니 괴산군수, 충주군 주차 일병을 청하여 영전함에 포환(砲丸)이 여우(如雨)라. 도중(道衆)이 사(死)를 서(誓)하고 교전하여 피차 살상이 상당하더니, 마침 일모(日暮)한지라. 다수 교도 일제히 눌함(吶喊) 전진하여 일군(日軍)을 습살(襲殺)하였다.(『천도교창건사』) 동학군과 일본군은 괴산에서 첫 교전이 있었는데, 이 괴산전투에서는 동학군이 비록 승리하였지만 많은 희생을 해야만 했다. 당시 동학군은 2만여 명에 달하였으며, 일본군은 2개 분대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하라다(原田) 소위 등 부상 4명, 병사 1명 즉사에 불과하였지만, 동학군은 2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외에 일본군과의 전투는 공주 우금치전투를 비롯하여 태인전투, 용산전투, 광양과 섬진강전투 등에 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전략) 때에 마침 관군의 원병인 일군이 대거 합류한지라. 동군(東軍)이 공주 효포에서 혈전 7일에 전세 불리함을 보고 퇴각하여 태인에서 일군과 교전하고(『천도교창건사』) 동군(東軍)이 용산에 이름에 뒤로 일군의 추격이 심하고 앞으로는 관군이 영격포위(迎擊包圍)하여 진퇴유곡이 된 지라.(『천도교창건사』) 퇴각 중의 도인 수만은 광양 섬진강 안에 둔하였다가 관군과 일군의 피습한 바 되어 강수(江水)에 빠져 진멸(盡滅)하고(『천도교창건사』) 이라고 하여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교전을 한두 줄로 언급만 하였다. 하지만 이들 전투는 동학혁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우금치전투는 동학혁명 기간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으며 동학군 역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동학군 전사자가 37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사』에서는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병은 세를 합하여 동학군의 앞을 막아들어 온다”라고 하여 일본군의 진압과정에 대해 축소하였다. 이후 동학군의 퇴로과정에서 적지 않은 일분군과의 교전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부 지역 교정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수원부를 점령하고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바, 관병과 일병을 만나 여러 날을 두고 싸우다가 (동학군이) 마침내 패하였고, (중략) 황해 일도의 동학군 수만을 일으켜 장차 남군과 세를 합하여 경성을 치고자 해주감영을 점령하고 있었던 바, 또한 관병과 일병을 만나 수십 일 동안을 두고 서로 싸워 양방의 많은 사상을 내었고, 마침내 동학군은 관일병에게 패한 바 되었다”(『동학사』)라고 하여, 수원전투와 해주전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각지의 교전에서 “관병과 일병도 많이 죽고”라고 하여 일본군도 적지 않은 피해자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동학혁명이 끝나가는 1894년 12월 이후부터는 “조선의 남쪽은 관병과 일본군의 천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일본군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일본군을 포함한 관군, 수성군, 민보군 등의 동학군을 참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며, 그 결과 3, 40만 명의 동학군이 피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천도교창건사』도 20만 이상의 동학군이 죽임을 당하는 대참(大慘)이었다고 하였다. 그럼 해방 후에는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먼저 『천도교백년약사』를 살펴보자. 우선 동학군이 재기포한 배경은 “범궐(犯闕)한 일군들이 국왕을 핍박하고 국권을 유린”과 일군이 각지에서 동학군을 마구 참살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반봉건에서 반침략으로 전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동학군이 재기포하자 일본군은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군 진압할 것을 제안하고 관군을 지휘하여 작전계획에 따라 동학군을 초멸코자 하였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안동을 비롯하여 괴산, 세성산, 홍성, 이인, 공주, 해주, 원평과 태인, 은률, 서흥, 홍천, 하동 등지에서 치열하게 교전을 하였으며, 수백 명의 동학군이 살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전봉준의 피체와 재판과정에 일본군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천도교백년약사』는 앞서 살펴본 『천도교창건사』와 『동학사』보다는 구체적으로 폭넓게 일본군의 동향을 다루고 있다. 특히 동학혁명이 끝날 무렵에는 “일본군의 수색이 극심해지자 전국적으로 전토(田土)가 황폐해지고 도시와 농촌이 모두 일군의 왕래를 꺼리어 수확을 포기하고 촌민(村民)들이 도망하여 마을이 모두 비었다”할 정도로 일본군의 폐해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약사』에서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즉 세성산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멸당하였다”거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는 “일본군 연합군이 최신무기로 무장한 채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금치전투 이후 “일본군과 정부 연합군은 계속 동학군을 추격 공격하였다”하고 하여, 동학군을 섬멸하고자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인전투와 종곡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전하였음도 아울러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동학혁명 개입에 대해 “아시아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최초 대량학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간행된 교서에서는 동학군과 일분군과의 전투과정 뿐만 아니라 그 실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이로 볼 때 일본군에 대한 인식은 초기 동학교서에서는 가급적이면 필요 이상으로 학살 등에 대해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후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동학혁명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연구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제에 대한 책임을 보다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선도사) -
˝경주시 동학 정신 계승과 문화관광 자원 활용에 대한 방안˝ 제안경주시의회 이강희 의원은 13일 제288회 경주시의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경주시 동학 정신 계승과 문화관광 자원 활용에 대한 방안’을 주제로 5분 자유발언을 실시했다. 먼저 이강희 의원은 동학이 1860년 외세의 침략 등으로 혼란한 시대적 위기 속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천주 사상을 바탕으로 등장했고, 후천개벽·보국안민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국가와 백성을 지킨다는 사명을 강조하며,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져 근대 민권운동의 초석이 되었음을 설명했다. 이처럼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사회개혁운동이자 자주정신의 표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그 정신을 보호·계승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최제우·최시영 선생 관련 유적지에 대한 복원 사업의 추진, 동학 역사교육 프로그램의 운영 및 학술 연구 지원, ‘동학문화제’ 개최 등을 제안했다. 특히 동학 관련 사료의 보존을 위한 자료관의 효율적 관리와 연구 지원금을 마련하는 규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 등, 동학 관련 정책 마련과 조례 제정을 통해 경주시가 동학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강희 의원은 동학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와 인권존중 등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고 강조하고, 경주가 동학의 발상지이자 성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경주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며 5분 자유발언을 끝맺었다. 다음은 이강희 의원의 5분 발언 내용이다.(제공기관 : 경상북도 경주시의회) 존경하는 경주시민 여러분 그리고 이동협 의장님과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 그리고 주낙영 시장님과 관계공무원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이강희 의원입니다. 오늘 저는 경주시가 동학의 발상지이자 성지로서 그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경주를 생각하면 신라 천년의 수도이자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경주는 동학의 발상지이자 동학의 정신이 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과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경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은 물론 경주시민들조차도 경주와 동학을 연결 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주시가 동학의 성지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계승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동학은 1860년 경주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봉건적 신분제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고 이러한 실제적 위기 속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은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라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내세우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였습니다. 최제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은 후천개벽의 사상, 즉 억압받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국가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 동학의 사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운동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 민중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운동이자 자주정신의 표출이었습니다. 특히 해월 선생은 경주출신으로서 동학을 전국적인 사상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훗날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며 근대 민권운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동학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발상지인 경주는 동학의 성지로서 그 정신을 당연히 보호 계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현재 동학의 역사적 가치를 기리는 일부 기념사업과 교육원 건립사업은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개별연구단체나 연구자의 노력에 의존되는 경우가 많아 체계적인 정책추진이 이루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경주시가 조례 등을 통하여 동학의 역사적 가치보존과 계승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요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제안드리겠습니다. 첫째, 경주시내 동학관련 유적지로 최제우 선생 탄생지, 해월 최시형 선생 생가터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유적지 보존을 위한 정기적인 조사 및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경주시 차원의 동학역사교육프로그램 개설, 학생 및 시민을 대상으로 한 동학사상 및 역사강좌 운영, 동학 관련 학술연구 지원 및 세미나 등을 통하여 시민들의 동학 알기에 힘을 쓰는 일입니다. 셋째, 동학문화제 등을 개최하여 경주를 동학의 성지로 알리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며 동학의 역사적 가치를 반영한 관광프로그램 개발 및 홍보를 제안합니다. 끝으로 동학 관련 사료 및 문헌수집, 보존을 위한 자료관의 효율적 관리와 동학연구활성화를 위한 연구지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규정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조례 및 정책이 이루어진다면 경주시는 단순한 역사적 유산 보존을 넘어 동학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학이 추구했던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 인권존중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의 근본적인 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동학은 단순한 이념적 운동 아니라 민중이 직접 참여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동학의 정신을 오늘날 경주시가 되살린다면 시민참여형 정책 및 공동체 중심의 도시발전모델을 마련하는 데에도 중요한 방향성을 제공할 것입니다. 경주시는 신라 천년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와 근대사의 변혁을 이끈 동학의 성지로서도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의장님과 동료의원 여러분! 그리고 경주시민 여러분! 동학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며 우리가 지속적으로 계승해야 할 민주주의와 평등의 정신입니다. 이상으로 본 의원의 5분 발언을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천도교산하단체, 대전 초등학생 피살사건 성명서 발표지난 10일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피살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천도교 산하단체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피해를 당한 초등학생은 대전 서구의 한 초등학교 본관 2층에 있는 돌봄교실에서 나와 학원 차를 타려고 나오다가 40대 여교사에 의해 이 학교 시청각실 자재실로 유인된 뒤 흉기에 찔려 숨졌다. 방정환어린이도서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천도교여성회본부, 천도교청년회, 동학소년회 등 이들 단체는 성명서를 통해 “정부와 관계 기관은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즉시 마련할 것, 이에 더해 12일 정부가 밝힌 ‘정신질환 등으로 교직 수행이 곤란한 교원에게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직권휴직 등 필요한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은 실질적인 예방책이 될 수 있도록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성명서에는 정부 및 사법 기관에 대한 요구 사항이 포함되었으며, 재발 방지 대책 및 추가 요구 사항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천도교 산하 단체 관계자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천도교는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어린이 보호를 위한 사회적 연대와 지원 활동에 적극 동참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피해 아동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라고 밝혔다. 아래는 성명서 전문이다. 대전 초등학생 피살사건에 대한 성명서 대전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피살사건은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보호하는 데 있어 얼마나 부족한지 다시금 드러낸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부모님의 깊은 슬픔과 고통을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천도교인은 피해 아동의 성령출세를 심고합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범죄를 넘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구조를 얼마나 견고하게 마련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정부와 관계 기관은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즉시 마련해야 합니다. 특히, 12일 정부가 밝힌 ‘정신질환 등으로 교직 수행이 곤란한 교원에게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직권휴직 등 필요한 조치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은 실질적인 예방책이 될 수 있도록 반드시 실행되어야 합니다. 해월신사님은 “아이를 때리지 마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모든 생명이 귀하다 할 것이나 특히 어린이들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기에 더욱 소중히 대하고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올해는 천도교에서 세계 최초로 어린이인권선언을 한 102년이 되는 해이고,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한지 103년(천도교 어린이날 104년) 되는 해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운동이 시작된 지 100년이 지났으나 우리 사회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 보호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합니다. 정부는 ▲학교 및 지역 사회의 아동 보호망 강화 ▲위험 감지 및 즉각 대응 시스템 구축 ▲아동 대상 강력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의 실질적인 조치를 신속히 시행해야 합니다. 또한, 교육부는 ▲교사 대상[전문 심리 상담]프로그램 강화 및 의무화 ▲각급 학교에 학생 생활 책임 교감 별도 임명 ▲학교 내외에서 발생하는 범죄 예방을 위한 아동 안전 전담 인력 배치 확대 ▲학생 ‘안심 귀가 시스템’ 구축 등을 하여 학생 안전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더불어, 근본적으로는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맡겨야 하는 현실 자체를 개선하는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합니다. ▲노동시간 단축 ▲육아 휴직 제도 개선 ▲양육자와 양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등의 노력을 통해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어린이 보호를 위한 사회적 연대와 지원 활동에 적극 동참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피해 아동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포덕 166(2025)년 2월 14일 방정환어린이도서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천도교여성회본부, 천도교청년회, 동학소년회 심고 -
3월 1일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삼일절 기념식 열려천도교중앙총부는 오는 3월 1일 제 106주년 삼일절 기념식을 봉행한다. 삼일절을 맞아 1919년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의지와 희생을 기억하고 모든 국민이 다시 한 번 나라의 독립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날 기념식은 오전 11시 천도교중앙대교당 및 전국 교구에서 봉행된다. 개식-국민의례-청수봉전-심고-주문3회병송-독립선언서 낭독-천덕송 합창-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기념식 후 거리행진 및 의암성사 동상 참례(중앙대교당-탑골공원)가 이어진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보도자료를 통해 “‘3·1대혁명’으로 순도순국(殉道殉國)하신 선열들의 영령 앞에 고개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선열들이 성령출세(性靈出世)하여 세계 평화와 국가 발전을 도와주시고, 교단의 앞길을 밝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심고(心告)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3·1대혁명’의 위대한 정신을 올곧이 계승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상생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는 이번 삼일절 기념식을 통해 1919년 의암 손병희 성사님께서 이끄셨던 삼일운동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엄혹한 일제탄압시기에 우리 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친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봉행하오니,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어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교인 및 일반인들이 삼일절을 맞아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삼일절 기념식에 함께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서울교구, 포덕 166년 동계특별기도서울교구에서는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생활 속의 수도'를 목적으로 동계특별기도를 봉행한다. 이번 특별기도는 온, 오프라인으로 봉행하며 '서울교구 삼경방'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생활 속의 수도'를 목적으로 동계특별기도를 봉행한다. 온라인 기도식과 함께 서울교구 성화실에서도 특별기도를 봉행한다. 2월 10일(월)-14일(금) 오후 7시-8시 50분, 9시 저녁 기도식을 봉행하며, 2월 15일(토)-16일(시일) 오후 3시-5시에도 특별기도를 봉행한다. 많은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 -
해월신사 법설 : 천지이기 p.241 -
중편소설 <하얀 혁명>(6)(지난 호에 이어) 4. 후퇴 남접군과 북접군이 후퇴하여 집결한 곳은 논산이었다. 동학군은 우금치와 봉황산 전투에서 퇴각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패인은 물론 무기의 열세였지만, 무리하게 고지 공격을 시도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수뇌부 회의 끝에 군사적 요충지가 될 만한 봉우리를 선점해 방어전을 펴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을 변경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공주 전투 이후 동학군의 약점을 파악한 관군과 일본군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섰고,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가 논산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19대대는 오로지 동학군 궤멸만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파견한 최정예부대로, 현역과 예비역 7년간의 병역을 마치고 다시 소집된 3개 중대 663명의 백전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식 소총에, 최신 군사정보와 작전지도는 물론, 군량과 탄환을 보급하는 병참대까지 대동하고 있었으며, 근대식 훈련과 숙련된 지휘관, 상명하복의 엄격한 군율로 다져진 부대였다. 이런 부대가 동학군을 섬멸하기 위해 3개 지대로 나누어 서울에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학군이 19대대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건다는 건 자멸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주 전투에서 다수의 양총과 탄환을 노획한 것이 있고, 군사 요충 고지를 선점해 양총 부대를 전면에 배치하여 방어한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동학군은 정예병 위주로 부대를 재편성해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산성(黃山城)에 진을 쳤다. 연산(連山)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져 있어 많은 수의 동학군이 포진하기 적당했고, 전방 개활지가 넓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에도 용이했다. 신식 양총으로 무장하고 고지를 선점한 동학군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와 군량의 부족에 더해 점점 추워지는 날씨였다. 두 달 넘게 외지로 다니며 전투를 벌여온 동학군의 입성은 처음 출진할 때 입었던 홑옷 차림 그대로였다. 두꺼운 방한복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겨울 날씨에 바람이 숭숭 새어드는 석새삼베 홑옷을 입고 전투를 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천포는 한규석의 지휘 아래 화목을 장만하고, 대나무를 쪼개 엮은 발에 가랑잎과 마른 솔잎을 채워 넣은 장태를 만들었다. 화공(火攻)을 위한 준비였다. 장태 공격은 고지를 점령한 부대가 장태에 불을 붙여 산 아래로 굴리는 방식의 전통적 화공법이다. 투석전을 위해서도 바위를 깨뜨려 산더미처럼 돌멩이를 쌓았다. 진영도 백병전을 고려해 1열은 양총 부대, 2열은 화승총 부대, 3열은 장태와 투석전 부대로 재편성하고 기동훈련도 마쳤다. 드디어 관군과 일본군의 선공으로 연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창진 수접주는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데도 전날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가 왔다며 힘차게 독전기를 흔들었다. 본진의 신호가 떨어지자 이에 응답하는 깃발의 펄럭임과 함성이 연산 일대의 산과 들녘에 울려 퍼지며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쳤다. 적군은 동학군의 기세와 저지대의 불리함을 간파했는지 정면을 버리고 측면과 후사면으로 파고들었다. 뜻하지 않은 전선의 변경에 따라 접전 면적이 넓어졌으나 부족한 탄약을 절약하기 위해 전선을 이동하지 않고 선점한 고지를 고수한 채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눈이 와서 미끄러우면 고지를 점령한 동학군에게는 문제가 없으나 산을 타고 올라야 하는 적군에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차츰 굵어지는 눈발 속에 양 진영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눈이 그치지 않자 다급해진 쪽은 관군과 일본군이었다. 먼 거리를 우회해 돌아오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했고, 강설을 핑계로 총 한 방 못 쏴보고 후퇴한다는 것은 백전노장 후비보병 19대대의 위신을 깎는 일이었다. 이윽고 산정을 향해 올라오는 움직임이 보였다. 적병의 복장이 확연히 구별되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자세히 보니 관군과 일본군이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 지휘관 뒤에 색동옷을 입은 관군 여럿이 따르는 형국이었다. 일본군이 지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조선 관군은 지휘권도 빼앗긴 채 일본군 꽁무니나 따르며 제 나라 백성인 동학군을 죽이러 다가오는 것이었다. 대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1열 양총 부대의 사격을 시작으로 2열의 화승총 부대가 번갈아가며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동학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적군의 대열이 횡으로 움직이며 넓게 퍼지는 게 보였다. 대열이 흩어짐에 따라 화망도 넓어졌다. 동학군의 집중사격 효과를 반감시키고 허투루 쏘는 실탄의 사용량을 늘리려는 계략이었다. 적군이 굵은 나무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서서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인 적설이 유탄에 맞아 흩어지며 동학군을 향해 조여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빈도의 사격이라도 동학군은 언 발에 오줌 누기였고, 한 번을 쏴도 연발로 긁어대는 적군의 총격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맹렬했다. 실탄 보유량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황은 동학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열의 양총부대 사격이 끝나고 2열의 화승총 부대가 사격을 준비하는 동안 일본군 지휘관이 외치는 돌격 명령 소리는 총성 못지않게 매섭고 날카로웠다. 일본군은 화승총을 겁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날리는 눈발에 심지가 꺼지면서 격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접전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고, 양측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동학군의 실탄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창진 수접주가 승부수를 띄웠다. “장태에 불을 붙여라.” 한규석이 지휘하는 장태꾼이 일제히 달려들어 불붙은 나무막대를 장태에 찔러넣었다. “장태를 굴려라.” 장태가 불살을 튕기며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때아닌 화공에 놀라 도망치는 적군을 향해 남은 총알 전부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장태는 한번 구르고 지나가면 그만이었고, 총알이 다한 총은 헌 나무막대기에 불과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돌멩이를 던지고 바위를 굴렸다. 그것도 곧 바닥이 드러났다. 무기가 동나자 관군과 일본군이 물밀듯 들이닥쳤다. 사생결단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낫과 창을 든 동학군과 소총과 기관총을 든 일본군과의 비대칭 전투가 연산 일대의 산봉우리에서 피를 튀겼다. 싸움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를 낳았다. 동학군은 살기 위해 싸웠고, 관군과 일본군은 죽이기 위해 싸웠다. 전장은 차츰 흰 눈과 붉은 피로 칠갑한 무간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장태로 불붙은 연꽃 산봉우리는 희고 붉은 반점을 뿌린 선계(仙界)처럼 영롱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총 맞아 죽어가는 동학군의 비명과 피눈물이 범벅된 연옥(煉獄)의 불구덩이였다. 연산의 산맥이 무너지고 피바다의 해일이 밀려왔다. 공수의 위치가 바뀌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동학군은 산 아래로 떠밀려 내려갔다. 무기가 동나서 고지를 지킬 수도 없었지만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한규석은 한사코 후퇴하지 않겠다는 이창진의 독전기를 빼앗아 짚고 그를 업은 채 산에서 내려왔다. 반 이상 줄어든 패잔의 대열은 피투성이 옷을 육단처럼 걸쳐 입고 눈보라 속 밤길을 걸어 논산으로 향했다. 연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동학군은 논산에 재집결했으나 다시 기병치 못하고 추격을 피해 전라도 지경으로 후퇴해 내려갔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삼례를 지나 전주, 원평, 태인까지 내려갔다가 북접군은 정읍에서 남접군과 헤어져 장성, 담양, 순창을 지나 충청도로 방향을 틀었다. 낯선 전라도보다는 보은 대도소가 있는 충청도로 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추위에 지치고 길은 험해도 타향에서 낙오되면 끝장이란 생각에 북접군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여 임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만났다. 해월은 청산 기포령 이후 북접군과 동행하지 않고 충청도에 남아 있다가 관군의 추적을 피해 전라도 임실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학교의 정신적 지주인 해월을 만나자 북접군은 사지에서 손오공을 만난 듯 기뻐했다. “내가 불민하여 통령을 이토록 고생시켰소.” 해월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북접군을 이끌고 나타난 손병희를 보자 칠순을 바라보는 노구임에도 눈물을 흩뿌렸다. “친명(親命)을 완수치 못하고 살아 있음이 수치일 따름입니다.” “솔병에 익숙한 영장(營將)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승전만을 바라겠소?” “스승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꿈만 같습니다. 한울님이 우릴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손병희 통령이 해월에게 청수를 봉전하고, 그간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한 후 곤궁한 상황을 고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의복이옵니다. 동장군의 횡포 앞에 동사하는 군사가 부지기수이옵니다.”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도 예사롭지 않다 들었소.” “다행히 일본 후비보병은 남접군을 뒤쫓아 광주와 나주로 내려갔고, 관군인 장위영 병대와 경리청군 역시 남원으로 직행해 들어가 우리가 임실로 향한 것은 모르는 듯하옵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어찌 정하였소?” “일본군은 물론이고, 당장 관군과 조우하게 되면 패전은 불 보듯 뻔합니다. 일단은 종적을 숨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허면?” “무진장(茂朱, 鎭安, 長水) 쪽으로 은밀히 움직여 영동으로 가려 하옵니다.” “그곳은 천하의 험지가 아니오?” “허를 찌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런 험로를 택하리라곤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여기서 장수까지는 멀지 않으니 그곳 관아를 기습하고 장터를 점거하면 다소간 행렬을 수습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민폐는 없어야 하오. 우리가 기포한 이유가 만백성을 한울님으로 모시고자 함이거늘 민가를 핍박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도인들을 단단히 타일러 스승님의 심려를 덜겠습니다.” “군사 중에 무뢰배 부랑자도 다수 끼어 있다 들었소. 그런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 장차 동학군 전부를 죽이는 화근이 될 것이오.” “난민(亂民)이 전혀 없지는 않사오나 군율로 엄히 다스려 낭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수도(修道)가 얕으면 정병(精兵)으로 거듭나기 어려운 법.”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북접군은 해월을 만나자 그동안 겪었던 풍찬노숙도 잊은 채 무진장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 장수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예상은 적중했다. 장수는 동학군의 위세가 강성했을 당시 남접의 김개남 군이 지나갔던 곳으로 이곳 관원들은 그때의 여얼(餘孼)을 다시 입을까 두려워 북접군이 나타나자 한두 합 만에 영관, 교졸 할 것 없이 무기를 팽개치고 줄행랑치기 바빴다. 영읍(營邑)이 크지 않아 물산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향리와 포교로 조직된 민보군까지 패퇴시켜 얻은 무장과, 관아에 쌓아둔 대동목, 전세목(田稅木)을 수습해 추위로 얼어붙은 손발을 동여매고 다음 목적지인 무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충천했다. 교주인 해월이 앞장서니 동학의 부적만 몸에 지녀도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이 꼭 들어맞는다며 자청해 입도하는 농민들이 늘어나 군세는 배로 불어났다. 전투 경험이 쌓이자 행군 도중 길목을 막아서는 민보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전진을 이어갔다. 북접군은 무주 초입의 설천(雪川)과 월전(月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전라도 땅을 벗어나 충청도 땅 영동으로 짓쳐 들어갔다. 충청도에 들어서자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푸근해졌다. 살을 에는 추위가 연일 엄습했어도 들리는 사투리가 익숙하고 정겨워 누구를 만나도 고향 친구인 듯 반가웠다. 더욱이 영동은 동학도가 태반인 곳으로 이들이 전해주는 첩보를 통해 일본군이나 관군과 조우하지 않고도 적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영동의 사정도 그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민보군이 조직되어 북접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민보군은 주로 양반 사족이나 향리, 지방 수령을 중심으로 지주나 마름, 소작인을 모아 조직한 민병대이다. 이들은 원래 지금은 동학군이 된 농민과 한 동리에 살던 이웃이었으나, 전래적으로 누려왔던 기득권을 빼앗길 거라는 위기감 때문에 동학군과 맞서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전에 동복 천 벌을 내놓은 영동의 이용직이었다. 그가 민보군을 조직해 전에 당했던 치욕을 갚으려 벼르고 있었다. 민보군의 전투력은 대단치 않았어도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위험의 소지는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원수가 되어 싸운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싸움의 결과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 모두가 공멸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했다. 게다가 동학군이 상대해야 할 적이 일본군, 관군에 이어 민보군까지 가세해 셋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정녕 처음 기포할 당시 우려했던 일들이 미상불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북접군은 영동에 들어가기에 앞서 황간(黃澗) 관아를 기습해 무기와 광목, 공전(公錢)을 전취하고 용산(龍山) 장터에 진을 쳤다. 기포령 이후 처음으로 사람 냄새 풍기는 마을에서의 주둔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방에서 몰려드는 관군과 민보군의 도착 소식에 북접군은 장터 뒷산인 용산으로 들어가 산마루에 진을 쳤다. 용산은 두 마리 용이 맞대어 엎드려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골짜기가 깊어 수비하기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그간의 전투를 통해 산정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의 첩경임을 잘 아는 북접군으로서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능선 너머 천관산 밤재를 지나면 동학군의 은거지인 청산 문바위골이 자리하고 있어 용산은 고향마을 앞산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다. 북접군은 본진을 산정에 두고 산 아래로 매복을 보내 연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만일 일본군이 관군과 합류해 있다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정면을 피해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해올 것이기에 사방의 경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적군은 골안개가 자욱한 새벽, 북접군이 포진하고 있는 산정을 향해 정면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무리 북접군의 무장이 빈약하다 해도 지세가 불리한 정면을 치고 올라올 리는 없었다. 전략에 익숙한 일본군이 합세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확실했다. 북접군은 산 중턱에 매복병을 은신시켜 두었다가 골짜기 깊숙이 전진해 들어온 적군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쏘아대는 적군의 총소리가 어지러웠으나 북접군은 매복과 기습을 반복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안개가 걷히자 과연 누런 옷의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고, 청황색의 관복을 입은 관군과 구구 각색 복장의 민보군뿐이었다. 매복병의 공격이 뜸해지자 적군이 우세한 무기를 믿고 빠르게 전진해 들어왔다. 매복병이 골짜기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매복이 사라지자 적군은 진영을 남북으로 나누어 산정을 향해 협공해 들어왔다. 그러나 황간 전투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고 산정에서 내리쏘는 북접군의 반격 앞에 적군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북접군이 철성을 치며 청산 방향으로 패주하는 적군을 쫓아 북상을 서둘렀다. 북접군은 오랜만에 맛보는 승전의 통쾌함에 취해 천관산 밤재를 한달음에 치달아 올라 문바위골로 진격해 들어갔다. 밤재를 넘어 길게 내리뻗은 골짜기에 들어섰으나 적군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터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 굽이를 돌아서자 멀리 동학군이 은거하며 정병 훈련에 여념 없었던 훈련장이 나타났고, 맞은편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든 초막이 보였다. 북접군은 오랜 타향살이에서 돌아와 고향 들머리에 서서 살던 집을 내려다보는 감회에 젖었다. 기포령이 발한 지 실로 삼 개월여 만에 찾은 한겨울의 귀소였다. 마침내 훈련장에 당도했다. 눈 쌓인 훈련장에는 토끼와 고라니, 살쾡이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골바람이 해찰하는 학승(學僧)처럼 언 눈밭을 비질하고 있었다. (계속) 작가소개 김현종 -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해방기의 북한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간문예지 《한국문학시대》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천살의 시대』, 소설집 『보다 보이다』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