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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여성회본부 제22차 정기전국대의원 총회 및 전형위원회천도교여성회본부는 포덕 166년 3월 25일 오후 1시 30분 중앙대교당에서 제22차 정기 전국대의원 총회를 개최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포덕 163년부터 165년까지의 여성회본부 사업 경과를 보고하고,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중요한 절차를 진행했다. 개회의식에 이어 의안상정에 들어가기 전 임시의장에 박차귀(부산시지부 비례대표)고문이 선출 되었다 후보로는 본부 김명덕 부회장과 박혜정 총무가 올랐으며, 후보자들의 신상발언을 들은 후 비밀투표를 실시한 결과 수정당 김명덕 후보가 제43대 회장으로, 수경당 이미희, 인의당 박영화가 감사로 당선되었다. 이튿날인 3월 26일 오전 11시, 여성회본부 사무실에서 열린 전형위원회의에서는 정심당 이정녀, 진경당 홍순억이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중앙위원 49인을 선출하고, 그중 21명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번 총회를 통해 새로운 여성회본부 임원이 구성되며,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 -
천도교 대학생단, 일본 성지순례 진행천도교 대학생단은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4박 5일 동안 일본 오사카, 교토, 고베 일대에서 성지순례를 진행했다. 이번 성지순례는 지난해 가을에 진행된 국내 성지순례에 이어, 국외 성지를 방문하며 천도교의 역사와 한국의 아픔을 되새기고, 과거를 잊지 않으며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첫날, 오사카에서 천도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다 성지순례의 첫날인 2월 13일, 참가자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천도교의 중요한 유적들을 탐방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오사카 쓰루하시 역 부근에 있는 종리원 터였다. 종리원은 천도교의 사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한반도 외의 동포들에게 천도교의 뜻을 전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의암성사께서 일본에 거주하던 숙소를 찾아, 교토와 오사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당시의 흔적을 되새겼다. 오사카 우메다역도 방문지에 포함되어, 의암성사께서 독립운동을 위한 교통 거점으로 사용한 이 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둘째 날, 윤동주 시인 기념비와 이웃 종교와의 만남 둘째 날인 2월 14일, 성지순례 참가자들은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찾아 윤동주 시인의 기념비를 방문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일본 성공회 유시경 신부님과 간담회를 통해 이웃 종교를 이해하고, 천도교와 성공회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으로는 의암성사께서 일본 체류 초기 거주하셨던 곳의 대략적인 위치인 쇼고인몬제키에 방문하며, 일본에서의 천도교 역사를 돌아보았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다. 일본 정토진종 본산인 니시혼간지는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로, 일본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장소다. 참가자들은 사찰 내부를 둘러보며 일본 불교의 신앙과 전통을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천도교와 불교 간의 역사적 연관성을 살펴보며 종교 간의 교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셋째 날, 일본 문화 체험과 자유시간 셋째 날인 2월 15일은 자유 일정으로, 참가자들은 각 팀으로 나누어 일본의 문화와 음식을 체험했다. 오사카성을 방문하거나 일본 전통 음식을 맛보는 등 일본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저녁에는 일정을 되돌아보며 간담회를 진행하고, 성지순례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이 직접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머리와 마음에 잘 새겨져, 일방적 강의식 순례보다 뜻깊게 다가온다는 만족감도 있었다. 마지막 날, 고베에서의 종교 체험과 지진 메모리얼 방문 마지막 공식 일정은 2월 16일 고베에서 진행되었다. 고베 교구는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자진 성금을 모아 설립한 천도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그곳에서 시일식을 봉행했다. 또한 고베항과 고베 지진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하여,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의 피해와 그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의 아픔을 되새겼다. 마지막 일정으로 이쿠타 신사를 방문하여 일본 전통 종교 체험을 통해 대학생단 간의 소중한 인연을 기원하며 성지순례를 마무리했다. 성지순례의 의미와 참가자들이 느낀 점 성지순례를 마친 참가자들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천도교의 역사와 신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앙 생활을 다짐했다. 참가자들는 성지순례 이후, "성지에 담긴 이야기와 정보를 듣고, 천도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며, "이번 성지순례를 계기로 스스로 신앙하고, 탐구하며 전진해 나갈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번 성지순례는 천도교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며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었으며, 대학생단은 앞으로도 국내외 성지를 순례하며 천도교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
일본 고베교구, 공연 같은 시일식으로 함께 하는 공간고베교구는 언제 방문해도 내 집처럼 느껴진다. 1986년 8월 처음으로 고베교구를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20여 차례 정도 드나들었다. 그렇다 보니 고베교구는 내 집 같은 생각이 먼저 든다. 3월 2일 오전 9시 50분경 고베교구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아산교구에서 일본에 있는 유일한 고베교구를 방문하고 합동 시일식을 갖기로 하였다. 필자가 아산교구에서 일제강점기 중국, 일본, 미국, 쿠바 등 해외 교구와 관련해서 설교한 적이 있었고, 이때 일본의 유일한 천도교인 고베교구를 방문하고 의암성사 유적지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제안한 바 있었다. 아산교구에서는 이 제안에 대해 적극 찬성하고 지난해 말부터 준비하였다. 그 결과 8명이 동참하였고, 그 외 4명이 더 참가하여 모두 12명이 고베교구 합동 시일식에 참여하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시간, 고베교구는 고즈넉하였다. 오전 10시에 방문한다고 해서 그런지 문은 닫혀 있었다. 모두 처음인지라 가랑비를 맞으면서도 교구를 둘러 보고 사진도 찍고, 흥분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김태환 교구장에게 도착하였음을 알렸고, 잠시 후 자전거를 타고 교구장이 도착하였다. 교구장이 도착하기에 앞서 아산교구 참여자 일동은 교구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교구장과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교구실로 들어갔다. 시일식 시간이 다가오자, 고베교구 교인들도 한 분, 두 분 모였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이사는 나누는 시간은 함께 하는 동덕들이었다. 여성회원들은 따뜻한 오차를 준비해서 나누어주었다. 시일식에 앞서 필자는 고베교구를 방문한 아산교구 교인들을 한분 한분 소개하였다. 아산교구를 대표해서 차상근 경리부장은 고베교구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전했다. 고베교구는 시일식에 앞서 모니터 영상에 따라 건강체조를 5분 정도 함께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연로한 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하였다. 오전 11시 시일식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가 교당 안을 그윽하게 울려퍼졌다. 시일 집례는 김청길(金淸吉) 동덕이 맡았다. 식순에 따라 청수봉전은 김용부(金勇夫) 동덕이 하였다. 일반적으로 청수봉전은 대부분이 여성 동덕이 하고 있는데, 고베교구는 이날 시일식에서는 남성이 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한 모습이었다. 앞으로 여성 동덕이 아닌 남성 동덕도 청수봉전에 참여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남녀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것도 동학, 천도교가 추구하는 평등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식 심고는 발성으로 하였다. 모니터의 심고문을 함께 낭독하면서 시일을 함께 하는 의미를 되새겼다. 반주 음악에 맞추어 주문3회병송을 한 후에는 김문자(金文子) 여성 동덕이 경전봉독을 하였다. 경전봉독은 『용담유사』 「도수사」 후반부를 하였는데, 먼저 한글로 이어 일본어로 따라 봉독하였다. 이 역시 이체로운 모습이었다. 아산교구에서는 우리말 즉 한글로 된 경전 구절을 읽으면 되었지만, 두 가지 언어로 경전봉독을 한다는 것은 경전의 원뜻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경전봉독을 하던 중 김문자 동덕은 두 가지 언어로 하다보니 쉽지 않았던지 “아이고 어렵다”다고 한마디 하였다. 모두들 웃음으로 화답했지만, 평소 일본어를 사용하는 현지에서는 한글로 경전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천덕송합창은 「대신사환원기도가」를 반주에 따라 함께 불렀다. 8일 뒤인 3월 10일이 대신사환원기도일이기 때문에 미리 익히기 위함이었다. 설교는 김태환(金泰煥) 교구장이 맡았다. 맹암 정의맹 전 연원회 의장이 포덕 160년 5월에 설교한 바 있는 「오관 실행과 행복」이라는 글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함께 공유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중간중간 보완 설명을 하면서 설교를 마쳤다. 이어진 천덕송합창은 「위령송」을 한목소리로 불렀다. 마치는 심고는 발성이 아닌 묵성으로 하였다. 시일식을 마친 후에는 곧바로 고베교구와 아산교구 교인 등 시일식에 참석한 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고베교구는 시일식을 마친 후에는 교구에서 점심을 함께 하였다. 평소에는 시일식에 참석한 동덕들은 미리 주문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나누었는데, 이날은 아산교구 교인들이 참석하는 관계로 여성회원들이 직접 마련한 소고기국, 떡, 김치 등을 준비하였다. 보다 풍성한 점심이었다. 책상을 붙이고 의자를 옮기면서 책상은 바로 식탁으로 바뀌었다.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르고, 자리를 잡았다. 이날은 초밥 도시락이었다. 매월 첫째 주 시일은 초밥 도시락으로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도담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3월 2일 첫째 주인지라 신선한 초밥으로 함께 정을 나누었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였지만, 우리말을 잘하시는 동덕이 있어서 모두 유쾌한 식사 시간이었다. 고베교구를 방문한 아산교구는 파래김을 선물로 전달하였다. 합동시일식을 마친 아산교구 동덕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 일정을 위해 오후 1시 고베교구를 떠났다. 고베교구 동덕들도 아쉬운 마음에 떠나는 아산교구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베교구는 해마다 한국을 찾아 수도원에서 연성을 하고 대교당에서 시일식을 함께 하고 있다. 다음에 한국에 오면 아산교구에서 함께 시일식을 봉행하고 정을 나누기로 하였다. 김태환 교구장은 앞으로 한국에서 보다 많은 교인들이 고베교구를 방문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계기를 통해 한국에서도 교구 단위로 고베교구에서 합동시일이 봉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베교구에는 교당 내에 그동안 활동하였던 사진을 게시해 놓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하고 답사하였던 사진뿐만 아니라 금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대학생단이 오사카·교토·고베 일본 유적지 탐방할 때 고베교구를 방문하고 시일식을 마친 후 촬영한 기념 사진, 그리고 지난해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맞아 고베, 오사카, 교토 일대의 의암성사 유적지를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일행들의 사진도 함께 있었다. 이외에도 고베교구 교인들이 제106주년 3·1절을 맞는 3월 1일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효고현본부에서 개최한 3·1절 기념식에도 참석하였는데, 이때 촬영한 기념 사진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아산교구 일행은 이번 합동시일식 외에 의암성사가 머물렀던 교토(京都)의 쇼고인(聖護院) 일대와 의암성사가 포덕 44년경 천도교 청년을 유학시킨 고노에(近衛)중학교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현장이며 재일 한인의 역사와 삶을 기록하고 있는 교토 우지시(宇治市) 이세다쵸(伊勢田町) 우토로평화기념관(ウトロ平和祈念館)을 관람하고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등을 둘러보았다. 글, 희암 성주현(신인간 주필) -
대학생단 임기를 마치며모시고 안녕하십니까 포덕 165년 제44대 대학생단 천도교청년회 대학생단 단장이었던 조영은입니다. 단장직을 수행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청년회 활동을 하게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2020년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천도교 대학생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천도교를 시작한 건 이미 천도교를 하고 계신 이모와 이모부의 영향으로 봉황각 어린이 캠프에 참여했던 계기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또래 동덕들과 함께 저희들의 눈 높이에 맞춰서 활동을 진행해 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 나는 것 같습니다. 이 계기를 시작으로 매년 여름, 겨울마다 한울 나눔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학생단으로 편입된 것 같습니다. 신입생이 되고 대학생단 활동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19의 여파로 학교는 물론 대학생단 활동도 무기한 연기되는 것을 느끼며 많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42대 단장이셨던 민경 동덕과의 연락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43대 대학생단의 부단장을 맡아 많은 선후배 동덕들과 자리를 가지며 천도교 대학생단만의 색깔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44대 대학생단 단장이 되어 많이 부족하지만 1년간의 시간 동안 더 많은 청소년 동덕들이 대학생단이 될 수 있게,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덕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따스한 봄날 한강교구에서 진행한 정기모임부터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학생단과 청년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치렀던 어린이날,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천도교 어린이 동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기한울학교, 여러 종교 교류 캠프 등 다양한 경험들과 전국의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작년은 대신사 탄신 200주년을 기념해 많은 기념식과 기도식에 대학생단이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현도기념일과 인일기념일에 합창과 공연을 하고 사회문화관에서 진행했던 수운대신사 피체노정과 봉사활동에도 참여해 단순히 정기모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참여 활동도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볼 수 있었던 대학생단 송년회와 청년회원들과 함께 진행한 부산에서의 개벽제까지 정말 쉼 없이 많은 활동들을 진행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값지고 소중했습니다. 단장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때로는 책임감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했던 동덕들과 선배, 후배 동덕들이 있었기에 이 모든 순간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때로는 어려움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앞으로도 제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단장에서 물러나지만, 청년회원으로서, 대학생단을 졸업한 선배로서 후배분들이 성장하고 더 많은 교인들로 채워지는 대학생단을 기대하며 뒤에서 열심히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대학생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선배가 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모든 동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덕 166년 3월 27일 44대 대학생단 단장 조영은 심고 -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100주년 기념 안내판 설치천도교중앙총부는 지난 3월 27일 시민과 방문객을 위해 천도교중앙대교당 건립 100주년 기념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안내판은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 설치되었으며 중앙대교당 건립 100년을 기념하며, 정보 제공을 넘어 점자 안내, 음성 안내 기능, 그리고 태양광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시스템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22년 건립된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종교·문화적 유산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이번 안내판 설치는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누구나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안내판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기가 포함되었으며, 음성 안내 기능을 추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태양광을 활용한 음성 인식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천도교 관계자는 “이번 스마트 안내판이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역사적 문화유산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
한 사람, 한 사람의 걸음이 역사가 되어삼경합창단 김인환 단장님, 천도교신문에서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교단의 여러 행사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들려주셨습니다. 합창단 소개 부탁드릴게요. 우리 합창단은 역사가 깊습니다. 예전에 대교당 시일식을 중앙총부에서 직접 집례를 맡아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일식 집례를 서울교구로 이관하면서, (그게 한 40년 정도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교구 내에서 시일식 합창단을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서울교구 합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창단 결성 초기에는 지금처럼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관심 있는 교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는 정도였어요. 그때 서영모 교수님 등 몇몇 분들께서 지도를 해주시면서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해 왔지요. 그러다가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교단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단 밖에서도 활동하곤 합니다. 고양시에서 속해 있는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주관하는 <남북 평화 합창제>(현 평화합창제)에 참가하게 된 계기로 해마다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화합창제 때 많은 분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무대였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합창제에 참가하시게 되었나요? 평화합창제에는 저희 삼경합창단이 제2회 때부터 참가하게 됩니다. 주최 측인 고양시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함께하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 주셔서 참가하게 되었는데, 다른 단체들은 모두 합창단 이름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때 우리도 합창단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단원들로부터 공모를 해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저희 합창단이 뜻하는 바는 해월 신사님의 ‘성, 경, 신’ 사상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다짐을 해보자는 뜻으로 ‘삼경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해마다 평화합창제에 참가하셨다고 하시던데, 합창단의 연간 주요 사업으로는 어떤 일이 있나요? 저희가 제2회 평화합창제 때 처음 참가하게 되어 벌써 다섯 번이나 참가했네요. 저희의 활동은 교단 내의 행사와 시일식 등에 노래하는 것이 주요 활동입니다. 이를테면 기념 공연이 있는데, 서울교구 결성 기념일에 하는 경축 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외부 행사로써 평화합창제와 KCRP에서 주최하는 평화 음악제와 같은 종교축제에 초청 받아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좀 바빴습니다. 작년에는 특히 남해동학문화제에 초청받아서 다녀오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연습을 또 별도로 더 해야 하니 바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합창단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저희 삼경합창단에 등록된 단원은 한 30여 명 되고요. 공연에 참여하는 분들이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정기 연주회나 평화합창제 같은 때는 좀 더 모이곤 하지요. 각자 개인 생활들이 있어서 한 15명 내외가 나와 대교당 시일식에 함께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열심히 활동해 주는 단원들이 있어서 고맙고 또 서로서로 많은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단장님은 언제부터 합창단 활동을 하셨나요? 단원들과의 화합은 잘 이뤄지고 있나요? 제가 중앙총부에서 종무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중앙감사의 임기까지 마치고 나니까 포덕 160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합창단의 단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한 5~6년 되었는데, 서로가 잘 맞춰가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모두가 좋은 마음이라는 게 느껴지지요. 가장 보람이 된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예요? 매주 시일식에 합창을 하고 요즘은 저희가 엔딩 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시일식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저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시고 박수를 쳐줄 때, 이분들이 이 노래를 함께 들어주고 계시는구나, 그 마음을 느낄 때 가장 보람 있고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삼경 합창단이 천도교를 대표해서 외부로 공연을 나갈 수 있다는 것에서 단원들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참 보람이 있죠. 다른 종단 합창단이나 일반인들이 삼경 합창단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보고 반응은 어떻던가요? 노랫말이 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우리도 다른 종단의 노래를 들으면 또 마찬가지잖아요. 그 종단의 특성이 있고 노랫말이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요. 작품집을 만들긴 하지만 공연장이 어둡기도 하고 그것만으로는 가사 전달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같은 경우에는 가사를 화면에 보여주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 부분을 참 좋게들 봐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합창단의 시각적인 효과를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들이 좀 있었는데, 그 자리는 경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각 종단 간 서로를 알게 되는 면에서는 도움이 됐다는 평이 있더라고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보여줌으로써 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팔 절’이라는 대신사님의 말씀을 노래 중간에 낭독하는 형식을 가져보기도 했는데, 관객분들이 집중해서 듣고 또 관심도가 높았어요. 천도교라는 우리 종단이 참 생소한 것처럼 합창단도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들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합창하면 상당히 고무적으로 관심 있어 하고 천도교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느끼는 보람, 또 우리가 왜 이걸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기독교나 불교나 천주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이 내 안의 한울님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음악에서도 그런 게 확연히 드러날 것 같아요. 저희가 평화합창제에 1회 때부터 참가한 것은 아닌데, 2회 때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천도교 합창단에서 이런 노래를 하는구나’하고 관심 있게 봐주시는 걸 느꼈어요. 선곡도 가곡을 선택해서 갔지요. 그런데 그다음 해에 다른 종단에서도 대중적인 노래로 자유곡을 선정해서 부르시더군요. <남북 평화 합창제>라는 주제에 맞게 남북 문제를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곡을 갖는다는 게 상당히 어렵잖아요. 정치적으로도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작년에는 우리가 ‘임진강’이라는 북한 가요를 불렀는데, 의미가 깊은 곡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아쉬운 건 다른 종단들은 그러한 것들을 매머드급 합창단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한정된 인원이니까 거기에 다른 종단 합창단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인원이니까, 주최 측에 우리가 좀 더 부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좀 아쉽지요. 다른 종단에는 청년합창단도 있지 않나요?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도 종단 별로 차이가 좀 있겠어요. 다른 종단의 경우는 청년들도 많은 데다가 단일 교회나 교구에서 나오지 않고 연합으로 나오니까 뭐 한 두세 개 교회만 모여도 한 5~60명이 되죠. 불교 같은 경우도 사찰 두 군데면 한 60명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도 그 규모를 좀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합창제 공연을 했던 아람누리 극장이 1200석인데요. 그중 1층만 사용했는데, 한 7~800석 정도 되는 그 공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연을 보러 오셨어요. 또 우리 천도교는 일산에 교구가 없고 그러니까 교인분들이 관람하러 오시기도 어려워요. 올해는 11월 4일 날로 예정이 돼 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올해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달에 있을 교구 창립 기념일 날 공연을 앞두고 있고, 11월 4일에 있을 평화합창제 준비도 해야 하고 그 외에는 교단에서 기념일 날 요청이 있는 경우에 저희가 준비된 대로 응하는 것들이 예정돼 있고 지방 교구 행사에도 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요. 합창단 단장으로 활동하시기 전에도 교단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해오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회 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학생회 때는 중고등부 부장을 맡았었고 청년회에 와서는 본부에서 부회장을 했고요. 1981년도에 서울교구 청년회를 재창립했어요. 그때 초대 부회장을 했고 지금은 환원한 정학현 동덕이 그때 초대 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제가 청년회 서울시지부 회장을 했지요. 교단의 역사와 함께해오셨네요. 교회에 처음 나오던 날 기억하세요? 수운회관 낙성기념식이 있던 날이었어요. 그 옛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지요. 4월 5일 날이었는데 그때 아버지 손을 잡고 나와서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고 있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은 여기서 만난 교회 친구들이 다 전부예요. 어릴 때 천도교 집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우리 집보다는 우리 외갓집이 천도교를 더 먼저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는 천도교라기보다도 천도교청우당 쪽에 계시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하셨던 것 같고, 신앙보다도 청우당 활동을 하시면서 근근이 경전만 혼자서 읽으셨던 그런 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외갓집은 적극적으로 천도교를 했던 집안이고요. 북에서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외숙이 우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인데 어머니 살아생전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이 천도교에서 하는 야학 활동을 하셨고, 우리 어머니도 그 삼촌을 통해서 한글을 배우셨다고 그러더군요. 어머니는 천도교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천덕송 교훈가 노래를 알더라고. 그리고 당가를 아셨어요. 송가집에 있는 청우당가 ‘울려라 개벽 소리’ 하는 그 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시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외숙이 청우당 쪽에 계시면서 영향을 준 것 같고 우리 외할머니한테도 나중에 물어보니 외숙이 공부도 잘했대요. 삼촌은 6·25 때 반공 쪽으로 가면서 구월산 유격대 쪽에 합류해서 문산 어디쯤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얘기가 고향 분들이 전한 마지막 행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확인해 봤는데 더 나오질 않아요. 예전에 국방부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고 등록했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천도교에서 시일식을 하던 모습은 기억하세요? 생각이 나죠. 1970년쯤일 거야. 아버지하고 기념일에 나오면 그때는 빵을 줬어요. 근데 할아버지들, 아버지들이 빵 받아서는 당신들이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갑니다. 기념일 날은 이북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서로 얼굴 보는 날이었어요. 그러면 빵 받은 걸 다 나한테 준단 말이야. 내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니 빵을 이만큼 받아서 집으로 가면 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빵 가지고 온다고. 그때도 지금처럼 교회가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교인은 더 많았는데 성미가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돌아보면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참 따뜻하고 재미있었어요. 중학교 1학년 소년이 처음 아버지하고 같이 여기 왔을 때의 첫 느낌이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 선배들이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들에게 일일이 주소를 받더라고요. 전화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죠. 그다음 주 토요일 날인가 집으로 엽서가 왔어요. 난생처음으로 내 앞으로 온 엽서예요. 그런 걸 처음 받아본 거야. 교회 학생회 집회를 알리는 통지문이었어요. 선배들이 전부 손으로 써서 보내준 거야. 그날 처음 온 친구들한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거 보고 나오게 된 거야. 중학교 1학년이 뭘 알았겠어요. 주문도 몰랐지요. 그때 나한테 주문을 가르쳐줬던 선배가 안상숙 선배인데, 지금도 가끔 나오세요. 그때는 시일날 아침에 중고등학생들이 청수를 모셨어요. 지금의 서울교구 여성회 실에서요. 그땐 거기가 다다미방이었어요. 10시부터 10시 50분까지 1시간 정도 주문을 한 105회 묵송을 하고, 경전 한 편을 한 사람이 다 읽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읽어 나가요. 그렇게 해서 용담유사 한 편을 읽고 나면 시일식 보러 들어가죠. 처음 나왔는데 주문을 모르잖아. 남들이 하는 거 마음속으로 따라 읽어요. 그렇게 주문을 배운 거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는 선배들이 많았죠. 학생회가 일도 많았고 일을 참 잘했죠. 학생회 예술제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끌림, 중학교 1학년이면 어리잖아요. 자기에 대한 존중 이런 것도 좀 느끼셨겠어요? 천도교 청년회의 일원으로, 학생회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더 컸겠어요. 그랬죠. 그리고 그때는 포크송이 유행했잖아. 천덕송보다도 선배들이 통기타 가지고 포크송 하니까 그 포크송 배우는 게 재밌잖아. 그래서 토요 집회를 하고 나면은 천덕송 부르지만, 집회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통기타를 중심으로 모여요. 그러면 이 사람 저 사람 포크송을 불러요. 그땐 사람도 많았고 교회 나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선생님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마음에 자리 잡은 그 시기는 언제였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신앙 생활을 해왔어요. 당시에는 예술제가 있었어요. 예술제가 12월 1일 현도 기념일을 즈음에 하는 행사였는데 그때는 중고등학생들이 예술제를 해요. 대학생 선배들이 도와줬지요. 조명이라든가 음향이라든가 선배들이 도와주는데 그 예술제 준비를 무려 3개월 이상을 하거든요. 그 과정 때문에 막이 내려 나간 다음에는 배우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인일 기념일까지는 그냥 교당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청년회를 만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냥 학생하고는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이제 좀 들기 시작했다고 그럴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작은 천덕송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거를 버스에서 잃어버렸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어요. 정신을 어디에 갖다 팔아먹고 다니냐고. 교회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런 걸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혼을 내시는데 눈물이 쏙 빠지더라고. 당신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안 하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렇게 강조하셨어요. 우리가 사형제인데도 나만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내 동생들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동생들은 나 따라서 몇 번 나왔는데, 학생 때 잠깐 하다가 안 나오게 되고. 그런데 말로는 다 천도교인이래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1977년도에 내가 공무원 시험을 봤어요. 1978년도부터 공직 생활을 하다가 2개월 보름 만에 방위 근무를 소집 받아서 18개월을 복무하고 1979년도에 이제 다시 복직하고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1981년도에 다시 서울로 왔어요. 그때 서울교구 청년회를 만들면서 청년회 활동을 하고 청년회장을 맡고 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주말이면 교회 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학교 동기 동창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제 유일한 친구들이 직장생활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되었고 한 40년 유지되고 있습니다. 교회 나오시면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요. 어려서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에 가면 빵도 나눠주고 그러잖아요. 얻어먹을 때는 좋은데 뭔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할까, 사찰에 가도 그랬어요. 천도교는 첫인상이, 선배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그런지 몰라도 푸근해요. 또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청년회 때부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우리 교당은 다른 교회나 절에 가면 있는 예수, 십자가, 부처와 같은 상이 없잖아요. 우리에겐 궁을기 하나밖에 없잖아요. 신앙의 대상도 다른 종교와 차이가 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거기서 온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울님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학생회 활동하시면서 마음에 품었던 신앙심이 평생을 이어져 왔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 학생회 때 어떤 선생님께서 궁을장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한울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그것이 하얀 바탕의 색이 한울님 마음이고 빨간 색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구도화시킨 것이 궁을장이라고요. 옛날에는 대교당에 장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그런 자료들이 사진조차도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삶에서 천도교를 한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사람은 매일매일 잠을 자잖아요. 그냥 단순히 잠을 자는 것과 뭔가를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것은 새로 만난 아침이 다르잖아요. 그렇듯이 천도교 신앙을 하는 것은 일신우일신, 저는 그 뜻이 있다고 봐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어제처럼 생각하고 어제처럼 행동하고 어제처럼 움직이면서 뭔가 새로움을 기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나를 중심 잡게 해준 것은 경전의 말씀이에요. 해월신사님의 법설을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천이 힘듭니다. 믿습니까? 이거는 쉬워요. 그런데 그 믿음을 무엇으로 입증합니까? 뭔가 행동이 있어야 하잖아요. 해월 신사님 법설에 언고행 행고언(言顧行 行顧言)'이라고 하잖아요. 말을 할 때 행할 것을 돌아보라고. 말을 하기에 앞서 내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돌아보고 말을 해야 해요. 또 내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천도교 청년회나 대학생단 후배들 보고 계시면 어떠세요?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그런 당부를 할 수 있는 위치인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리고 나를 닦는 마음으로 순일한 마음으로 활동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은 우리 아들에게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리는 바가 무엇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요. 오늘은 처음부터 합창단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합창단 단원들에게 단장님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단장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심부름꾼이지, 좋은 리더가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합창단을 만들어 온 조각 조각들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역할을 못 한다거나 그 조각이 없어진다면은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때문에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된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서로서로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짜 따뜻한 동덕애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합창단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된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교단을 지켜왔듯 합창단 단원들의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흘러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한울님, 감응하시옵소서. -
천도교여성회 100년을 넘어 101주년 기념식천도교여성회가 창립 101주년을 맞아 포덕 166(2025)년 3월 25일 오전 11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에서 ‘천도교여성회 제101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여성의 권익 신장과 사회 공헌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지난 3월 25일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이번 기념식에는 천도교 관계자, 여성회원, 시민단체 대표 등이 참석했다. 천도교여성회는 포덕 65(1924)년 4월 5일에 주옥경 종법사를 초대회장으로 모시고 ‘천도교내수단’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포덕 72년(1931)에 ‘내성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포덕 81년(1940)에 ‘내수회’, 포덕 97년(1956)에 ‘천도교부인회’를 거쳐 포덕 109년(1968) 지금의 ‘천도교여성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5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해오고 있다. 이날 101주년 기념식은 진수당 박혜정 총무부장의 집례로 개식-청수봉전(정수당 한재신 포덕부장)-심고-주문3회병송-사계명 낭독(지성당 고온자 조직부장)-강령낭독(명진당 조순덕 교화부장)-기념사(성수당 박징재 본부회장)-격려사(현암 윤석산 교령)-상패 수여-장학금 수여-영상으로 보는 여성회-천덕송 합창(동학의 딸)-심고-폐식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박징재 여성회장은 기념사에서 “오늘 우리는 창립 100년을 넘어 101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해월 신사님께서는 ‘대저 도는 용시용활 하는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천도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발전 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천도교 여성회본부는 쉬지 않고 노력하며 시대화 함께 성장하는 여성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암 윤석산 교령은 격려사를 통해 “천도교여성회는 포덕 65년(1924)에 ‘천도교내수단’으로 창단 후,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성회는 천도교단 내의 활동에 머물지 않고 많은 대외적인 활동도 수행해오며,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대신사 출세 200년을 맞아 여성회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천도교여성회는 천도교의 중요한 부문단체로서 우리 교회사에 크나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해 당당하고 슬기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천도교여성회 창립 101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공로패와 장학금 수여식이 있었다. 남해지부 심해당 박삼순, 삼천포지부 효진당 박둘분, 영등포지부 은성당 명은숙, 울산시지부 천심당 지종미, 진주지부 예성당 장예성 동덕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고, 영등포교구 전지성, 시흥교구 최지성 학생에게 민족종교협의회가 후원하는 장학금을 수여하였다. 지난해 여성회의 활동영상을 6분간 시청하고 ‘천도교샘연합합창단’의 축하공연을 끝으로 100번째 다음의 시작, 101번째 창립기념식을 마무리하였다. 천도교샘연합합창단(단장 : 조보아, 지휘 : 김윤경, 반주: 정영주)은 <봄처녀>, <한강수타령>, <우리 모두 즐기세> 등의 무대로 천도교여성회 101주년 기념식의 의미를 더했다. 이번 101주년 기념식은 천도교 여성들이 과거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
다함께 행복한 세상(3) - 사회주의 통제경제올바르고 바람직한 공동체 구현을 위한 시사점을 얻기 위해, 현대의 대표적 정치.경제 체제인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에 이어, 이번에는 사회주의.통제경제의 가치관과 사상, 주요 특징, 오류와 결함, 근본적 한계를 깊이있게 살펴본다 -
포덕 166년 3월 23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 "3·1혁명으로부터의 교훈"설교 :3·1혁명으로부터의 교훈(선도사 연암 임형진) -
해월신사 법설 : 천지이기 p.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