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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탈핵 순례를 마치고천지만물과 지구 생태계 전부를 위협하는 핵 발전소를 멈추고 태양과 바람의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생명, 평화를 향한 종교인 탈핵 순례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노후 핵발전소 10곳의 수명연장 중단”을 요구하는 문서를 전달한 후 시청-광화문-조계사-천도교중앙대교당까지 1시간 반 동안 걷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천도교 기도문은 한울연대 임남희 공동대표님이 낭독해주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봄날을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도록, 병든 지구를 살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실천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달 순례는 5월 22일 예정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향한 발걸음에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 신해(천도교한울연대 사무국장)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
천도교와 3·1운동(2) "일제의 무단통치"『천도교와 3.1운동』은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3.1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이창번 선도사가 집필하였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상적·조직적 기여를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3.1운동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천도교가 지닌 민족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저자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인터넷신문에서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2. 일제의 무단통치 일본이 조선에서 헌병 경찰 제도를 시행한 것은 병합 이전부터였다. 병합을 준비하면서 1907년 10월 7일 ‘한국주차 헌병에 관한 건’이란 법령을 제정하여 “한국에 주둔하는 헌병은 주로 치안 유지에 관한 경찰업무를 장악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악명 높은 무단통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주한 일본헌병대 782명으로 46개 분견대를 설치하였던 것이 전국이 헌병 경찰의 강력한 통제 아래 들어가면서 헌병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1910년에는 헌병 2019명에 653개의 분견대가 설치되었으나 1년 후인 1911년에는 헌병 7749명에 953개소의 분견대가 설치되어 전국의 산간벽지까지 파출소가 설치되어 헌병과 순사가 배치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한 사내(寺內正穀)는 남달리 언론탄압에 혈안이 되었다. 자신의 언동은 물론이요, 그의 시책에 대해서도 일체의 보도를 금지시켰다. 한국인이 간행하는 신문만이 아니요, 제 국민이 간행하는 일어신문과 통신에 대해서도 극심한 단속과 검열을 가하여 걸핏하면 발행금지와 압수로 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극비리에 주한 병력을 서울 중심으로 재배치하여 철통같은 계엄태세를 갖춘 다음 1910년 8월 29일 합방조약을 발표했다. 합방 후 일제는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을 근간으로 무단통치를 시행하여 근대 세계사상 유례없는 식민지통치를 자행했다. 그들은 언론기관과 출판물을 폐멸시킴과 동시에 일간신문은 총독부 기관지 일어판 『경성일보』와 한글판 『매일신보』외에는 전부 폐간시키고 말았다. 사내(寺內)통감은 한일합병후에도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계속 재임하였는데, 그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그날부터 일반 공중집회를 철저히 금지하여 서울 거리에서 왕래하는 시민 2~3명의 회합도 엄금한 상태에서 대소의 유명 무명의 정치결사와 사회단체 내지는 학회 체육 단체까지 모조리 강제 해산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중요 단체의 대표를 경무 총감부로 호출하여 즉시 해산할 것을 명령하는 동시에 약간의 해산료를 던져주기도 하였다. 의암성사를 배신하고 매국행위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친일 주구 이용구의 일진회도 일금 15만 원을 주고 가차 없이 해산시켰다. 3. 국권 회복은 내가 한다 일제의 침략행위가 노골화하자 성사께서는 여러 차례 이를 경계하는 말씀을 남기셨다. 1910년 6월 8일 총부직원과 시내 유지 교인을 모이게 한 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마치 머리 없는 사람같이 되었다. 나라의 세 가지 요소는 주권과 토지와 인민이며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나라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주권 없는 나라이니 머리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일본이 몇 해를 두고 우리나라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보호한 것이 무엇이냐. 토지를 보호하였단 말인가, 재산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주권은 사법이요 사법은 주권인데 사법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사·농·공·상을 보호하였단 말인가. 선비는 인민의 대표인데 심지어 능참봉까지 빼앗고, 토지는 인민의 생명선인데 척식회사를 두어 전국의 좋은 농토를 모조리 빼앗고, 상공업만 해도 담배 심는 것까지 처음에는 허가를 내주다가 나중에는 전매품이라고 독점을 하니 이런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살기 좋은 때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어찌 통탄치 않겠는가. 내가 일본사람에게 보호 사실을 질문한다면 한국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토지를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주권과 인민을 보호한 것이요. 한국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농상공업을 보호한 것이라 하리라. 지금 우리나라의 유지니 신사니 하는 사람들이 교육이 제일이다, 경제가 제일이다, 군사가 제일이라 하지마는 우선 나라가 있은 후에라야 할 일이 아니냐. 나라가 없고 보면 교육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경제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군사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리고 인간 생활은 경제가 유지하는 것인데 경제에 착념(着念)이 없으면 한 집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1910년 6월 20일 교리 강습생 졸업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국가를 큰 배에 비유하면 국민은 승객과 같아 일기가 좋을 때는 순풍에 돛을 달고 마음 놓고 행선 할 수 있기 때문에 배안이 조용하고 편안하지만 불시에 폭풍우를 만나게 되면 사공도 마음 놓지 못하게 되고 승객 전체가 당황하게 되어 질서가 문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폭풍우 만난 큰 배와 같은데 우리 국민의 책임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할 때이다. 그 책임은 전생에도 돌릴 수 없고 후생에도 미룰 수 없다. 전생에 돌리자니 이미 죽은 귀신이요. 후생에게 미루자니 아직 나지도 않았으니 부득이 오늘 당한 일은 오늘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무슨 큰일을 하려면 먼저 종교적 감화를 받아서 만사가 무위이화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이라고 다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요, 감화를 받으리만큼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난 체 하는 사람이라도 한울님의 감화를 받지 못하면 사람의 능력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큰일을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그날 아침 성사께서는 총부 조회 석상에서 “앞으로 민족독립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 이 일은 강력한 조직을 가진 천도교만이 가능하다.”고 하시면서 국권회복의 선두에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일제는 처음부터 천도교를 총독 정치에 가장 큰 저해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갑오동학혁명 때는 척양척왜의 기치 아래 일본군과 무력으로 싸웠으며 갑진개혁운동 때는 친일행위를 한 이용구 일파를 교회에서 추방하였다. 더욱이 일본의 비호를 받는 시천교는 쇠퇴하는 반면 천도교 세력은 날로 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세확장에 중요 역할을 하는 성미제도를 강제로 폐지시키는 등 탄압을 계속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병합 후 천도교를 공인종교로 인정치 않고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총독부 경무국에서 특별 관리토록 하였으며, 중앙총부와 지방교구에 정·사복 경찰을 상주시켜 시일식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행사를 사전 보고하여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특히 중앙총부 공선관에는 형사를 상주시켜 발송공문과 수신공문을 일일이 검사하였으며, 경리관은 매월 재무 회계내용을 보고하게 하는 등 천도교의 미세한 동향까지 철저히 감시하였다. (계속) 저자소개 지암 이창번 선도사 1934년 평안도 성천 출생 1975년 육군 소령으로 전역 1978년 천도교유지재단 사무국장 직을 시작으로 천도교종학대학원 원감, 천도교종학대학원 교수, 천도교당산교구장, 천도교동명포 도정, 상주선도사, 의창수도원장, 천도교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
"농업으로 치료해요"…'치유농업'으로 우울감 30% ↓텃밭을 만들고 식물을 키우는 등의 치유농업이 우울 증상 감소 등에 실제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농촌진흥청은 약물 중심인 기존 정신질환 치료를 보완할 수 있는 비약물적 심리 지원 기술로 치유농업에 주목하고 그 효과를 의료기관 현장 실증을 통해 입증했다. 농진청은 16일 농진청 연구진이 조현병 환자와 우울 고위험군을 위한 치유농업 프로그램 2종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치유농업은 농업, 농촌 자원을 활용해 신체적,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는 활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2세 이상 인구의 9.7%가 최근 1년간 우울감을 경험(보건복지부 2023년)했고, 조현병은 인구 100명 중 1명이 겪는 것으로 보고(국립정신건강센터 2024년)됐다. 정신질환 유병률이 지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지역 사회에 기반한 비약물적 치료 수단으로 치유농업 활용이 부각되고 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
국내 최초 3D 점자지구본·7개 국립공원 점자안내지도 제공다가오는 '세계 장애인의 날(4.20)'을 맞아 시각장애인을 위한 3D 점자 지구본, 점자 지도집, 국립공원 점자안내지도 등이 새롭게 제공된다. 국토교통부와 국토지리정보원은 3D 점자지구본, 대한민국 및 세계 점자 지도집, 부산광역시 도시철도 노선 및 7개 국립공원 점자안내지도를 제작해 오는 17일부터 순차 제공한다고 16일 밝혔다. 3D 점자지구본은 국내 최초로 3D 모델링을 통해 세계 대륙과 해안 경계, 날짜변경선, 경도·위도, 북극점·남극점 등 세계지리 교육에 필요한 주요 정보를 입체적으로 표현해 시각장애 학생이 촉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지구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교육 목적의 기본형(지름 30㎝)과 전시 목적의 대형(지름 100㎝) 등 두 가지 형태로 제작했다. 대한민국 및 세계 점자지도집은 2016년~2017년에 제작한 기존 지도에 최신 정보를 반영해 갱신했으며, 시각장애인의 접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전체적인 지도집 설명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정보무늬(QR코드)를 삽입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제작한 부산광역시 도시철도 노선 점자안내도에 노선(부산역 1호선-3호선) 간 환승역 지도를 추가해 새롭게 제작했다. 해당 지도는 부산지역 시각장애 관련 기관뿐만 아니라 부산교통공사와 협업해 부산광역시 주요 도시철도 역에도 비치할 계획이다. 더불어, 국토지리정보원은 환경부 국립공원공단과 협업해 시각장애인이 일상에서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공간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국립공원 점자 안내 지도를 제작해 서비스한다. 이번에 배포하는 지도는 경주, 북한산, 설악산, 소백산, 치악산, 태백산, 팔공산 등 7개 국립공원을 대상으로 현장실사와 사용자·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제작했다. 공원의 위치, 편의시설, 탐방로 안내 및 난이도, 각 국립공원의 대표 생물자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지도는 7개 국립공원 탐방안내소에서 무료로 배포하며, 국립공원생태복지서비스 프로그램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예정이다. 3D 점자지구본과 대한민국 및 세계 점자지도집, 부산광역시 도시철도 노선 점자안내도 및 7개 국립공원 점자 안내 지도는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https://map.ngii.go.kr)에서 17일부터 누구나 무상으로 내려받아 활용할 수 있다. 조우석 국토부 국토지리정보원장은 "공간정보는 모두를 위한 공공 자산이며, 점자지도는 시각장애인의 자유로운 이동과 학습을 돕는 중요한 도구"라면서 "앞으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공간정보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고, 국토부 국토지리정보원이 앞장서 공존과 포용의 사회로 나아가는 연결망 역할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문의: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지리정보과(031-210-2731)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
다함께 행복한 세상(4) - 새로운 가치관과 사상올바른 정치.경제체제 모색을 위해 앞서 현대 주요 정치.경제체제인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주의.통제경제를 살펴본데 이어, 동학.천도교의 시천주(侍天主), 천지부모(天地父母) 이치에 기반하여 새로운 가치관과 사상의 핵심 내용과 주요 특징을 깊이 있게 짚어본다 -
포덕 166년 4월 13일 천도교중앙대교당 시일설교설교 : 천도교의 봄을 이루자 (혜원당 김춘성 선도사) -
'준비시대' 서문을 읽고1905년 최초로 발간된 《준비시대》는 의암성사님이 저술한 국가경영의 청사진을 밝힌 책입니다. 서문을 읽는 순간 '기미독립선언문을 읽는가 하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우리 집과 다른 집의 구별, 구속과 자주적인 권리, 국가 간에는 강력한 힘이 정의라는 말씀, 자주와 독립의 의미를 밝히셨습니다. 이를 보고 저는 육당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서에 의암성사님의 의중을 그대로 담아내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부국의 방법으로 첫째, 국민의 분발과 진취적인 마음, 둘째,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의 마음, 셋째, 나라를 걱정하는 근면한 마음으로 사업을 하여 나라의 기초 세우기, 넷째, 응용하는 지식과 학술은 세계 모든 나라의 장점을 취하고, 우리의 단점보완하기 등을 내세우셨습니다. 나아가 1905년(광무 5년)을 독립국가를 전제로 한 '준비의 시대'로 보고 지금의 지방자치제에 해당하는 국가경영서인 향 자치제 청사진을 제시하셨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미 100년 전에 자율적인 지방자치제를 설파하셨으니, 어찌 성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에는 대정부가 있고, 그 아래 도가 있고, 도 아래 군이 있으나, 그 당시는 대정부의 시행만 있을 뿐, 지방정부에 해당하는 도, 군, 면의 독립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향이 군 아래에 있어 최하위 정치기관이지만, 이 향의 정치가 확고해야만 나라의 정치가 확고할 수 있다고 판단하셔서 향 자치제를 주창하셨던 것 같습니다. 향 자치의 구성원과 직무를 보면, 1. 향무소 구성원 - 향장, 부장, 수세원, 서기 2. 향무소의 직무 분담 1) 지적 사무 2) 호적사무 3) 민업사무 4) 도로사무 5) 수세사무 6) 소학교 유지 사무 7) 위생사무 8) 징병사무 9) 재산관리 사무 10) 공동묘지 사무 11) 일체 공공사무 특히 토지대장과 호적부표는 그 시대와 현재를 아우를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어져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끝으로, 《준비시대》를 현대어로 옮긴 손윤 선생님과 이 책을 동귀일체 회원들에게 소개하고 배포한 김창석 회장님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천도교 동귀일체고문 - 운암 오제운 심고 * 준비시대 서문을 쓴 사람을 '의암 손병희'라고 쓰지 않고 '동영우옥東瀛寓屋'으로 한 것은 일본에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 쓴 자호라 여겨집니다. 필자는 그 뜻을 '동쪽바다에 머무르는 집(사람)' 정도로 해석합니다.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
동학이 세상에 태어난 은적암에 다녀오다사람에게는 정말 연(緣)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천도교와 연을 맺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인사동과 안국동을 오가며 첨탑이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특이해 기억에 남아 있던 수운회관에, 오랜 지인이었던 천도교 동두천교구 연암 강정환 교구장의 초대로, 2024년 12월 수운 최제우 대신사 탄신 200주년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나간 역사로만 알고 지내던 동학에 관해 공부해보자는 생각에, 포덕 166년에 천도교종학대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4시간씩 동경대전과 주역을 배우며 동학과 천도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경대전과 주역이 한자로 되어 있는 데다, 한자를 이해한다 해도,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참뜻을 이해하기는 정말 버거웠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수운 최제우 대신사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양반인데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시대에 그는 크게 깨달은 뒤 먼저 자신의 여종 둘을 해방한다.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고, 다른 사람은 며느리도 삼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링컨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대통령 신분으로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남부와 몇 년간 남북전쟁을 했다. 하지만 수운 최제우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기반으로,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에서 동학을 창도했다.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서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수운 대신사의 동학에 동조하는 동학교도들이 늘어나자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유림의 질시와 관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다. 이를 피해 자신이 주장한 바를 글로써 남기고자 1861년 겨울에 남원의 은적암에 은거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동학을 밝히는 동학론(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의 내용을 정리하여 ‘동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번에 대신사께서 천도교의 귀한 경전들을 집필하신 남원의 은적암으로 성주현 교수님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덕들과 함께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선국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길을 오르니 은적암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서울교구가 세운 “은적암 터’ 안내판과 남원 문화원에서 세운 교룡산 산신단 유래비 그리고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 성지”란 비목이 서 있었다. 은적암 터 안내판에는 “이곳은 제1세 교조인 대신사께서 관의 탄압을 피해 포덕 2년(신유년, 단기 4194년) 12월 그믐날에 오셔서 은거하시던 곳이다. 대신사께서는 이곳 덕밀암을 은적암이라 이름하시고 머무르시며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 등을 집필하셨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안쪽으로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암벽만이 그곳이 은적암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은적암 터에 도착하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주문 13자(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암송하며 걸었다. 수운 대신사님의 체취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나만의 의식을 치렀다. 은적암을 떠나면서 든 생각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6개월 이상을 은둔하며 처음으로 동학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을 집필하고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정리한 동학의 성지인 이곳이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곳 은적암 터에서 내 안에 모신 한울님께 진심으로 간청드렸다. 글, 황규만(종학대학원 수강생) 일용행사가 도(道) 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단상과 깨달음의 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 교리 탐구 등을 주제로 이어집니다. 원고주제, 분량, 형식은 자유입니다. 교인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원고접수 : news@chondogyo.or.kr -
종학대학원, 남원 은적암으로 현장학습 진행지난 4월 12일(토요일), 종학대학원은 전북 남원에서 동학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는 현장학습을 실시했다. 이번 현장학습은 성주현 종학대학원 교수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광한루원 주차장에서 오후 1시에 집결하여 광한루 탐방, 은적암 터 답사, 검결비 등으로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인근에서 식사를 나눈 뒤, 2시부터 30분간 광한루원을 둘러보며 남원의 역사적 배경을 체험했다. 이후 오후 3시부터는 본격적인 답사 일정으로 은적암터를 찾았다. 은적암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직접 산문을 열고 도를 닦았던 동학의 성지로, 참가자들은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고요한 산세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특히 은적암으로 오르는 길은 수운 대신사의 숨결을 몸소 느끼는 여정으로, 참가자 모두에게 깊은 의미와 울림을 주었다. 이 날 일정은 예기치 못한 교통 상황과 우천으로 인해 일부 지연되었으나, 전체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며 오후 5시 30분 검결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종학대학원 관계자는 “은적암터와 같은 동학의 성지를 직접 밟으며 수운 대신사의 사상과 삶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참가자 모두에게 뜻깊은 배움의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자료 및 사진 : 천도교종학대학원 제공 -
[칼럼] 의암성사의 일본 외유 행적 조사(2)(지난 호에 이어) 오사카역(大阪驛) 오사카역은 성사가 오사카에서 고베, 나라, 교토 등지를 다닐 때 이용하던 역이었다. 성사는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주할 때도 이 역을 이용했다. 일본의 자료를 살펴보니 최초의 오사카역은 포덕 25년(1884) 5월 11일 문을 열었다. 당시 오사카에서 고베로 향하는 노선이 개통되면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초대 역사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우메다 스텐쇼(梅田驛)”라는 애칭이 있었다. 이 일대에 매화밭이 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 불린 듯하다. 오사카역은 포덕 52년(1901) 7월 1일 제2세대 역사로 확장되었다. 제2세대 역사는 초기 역사에서 약 200m 동쪽으로 이동해 지어졌다. 역 앞에는 인력거꾼을 위한 광장이 조성되었고, 역 동쪽 끝에는 오사카우체국 우메다 지점과 전신국 등 공공시설이 함께 건설되었다. 제2세대 오사카역은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이었으며, 당시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 센푸칸(泉布觀)과 함께 ‘오사카 3대 명소’로 불렸다. 성사가 일본에 왔을 때는 제2세대 역사가 지어진 직후였다. 이후 오사카역은 포덕 91년(1940) 제3세대 건축으로 확장되었고, 일본의 발전과 더불어 오사카역의 기능도 확장되어 포덕 120년(1979) 제4세대 오사카역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오사카역은 제2세대 자리에 시대의 흐름에 맞게 현대적으로 확장된 것이다. 카미후쿠시마(上福島) 카미후쿠시마는 성사가 오사카에서 처음 묵었던 여관이 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丁目) 733번지’였다. 성사는 포덕 45년(1904) 3월 19일 오사카에 도착해 이곳에 머물렀다. 성사가 머물렀던 여관이 있었던 이 일대는 현재 주택가로 변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성사께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오사카역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답사 당시 일대를 돌아보며 ‘카미후쿠시마’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上福島” 우체국뿐이었다. 조사단이 우체국을 찾아가 직원에게 물었지만, 너무 오래된 지명이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조사단은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가능한 최대 범위까지 조사하기 위해 일대를 훑었다. 그 결과 카미후쿠마치(上福町) 2정목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으나, 733번지는 지번 자체가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지역에서 오래된 “福島天滿宮”을 찾아 주지에게 물어보니, 그곳의 예전 주소가 카미후쿠시마 154번지였다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한 지번 확인을 위해서는 일본 지적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느꼈다. 성사가 묵었던 733번지는 이번 답사로는 찾을 수 없어 추가 답사가 요망된다.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도지마우라마치는 성사가 포덕 45년(1904) 3월 말부터 6월 30일까지 약 3개월간 거주했던 곳이다. 당시 주소는 ‘오사카시(大阪市) 기타구(北區) 도지마우라마치(堂島裏町) 3정목(丁目) 11번지’였다. 성사는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인근에 사무실을 하나 더 구입해 사용했다. 성사는 이곳을 끝으로 오사카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도쿄로 이주했다. 이후 이곳은 천도교인들이 오사카를 방문했을 때 사용되었으며, 천도교 유학생들이 체류한 곳이기도 했다. 현재 이 일대는 일본의 통신회사 NTT(Nippon Telegraph and Telephone Corporation)의 도지마 지부가 자리 잡고 있다. 자료집에는 이곳이 NTT의 고베지부라고 되어 있었지만, 조사를 통해 도지마지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이전 조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유의미한 성과였다. 자료집에는 도지마지부 건물 안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그 자리가 11번지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건물 안내도에는 4개의 큰 건물이 있었고 중앙에는 주차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위치를 잘못 찾은 줄 알았지만, 한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보니 주차장 지붕 위에 테니스코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성사가 기거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쁜 마음에 사진을 찍고 조사단을 불렀다. 이 위치에 대해 설명하는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위기에 처한 교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성사의 힘겨운 외유 생활이 떠올랐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답사의 고단함과 정확한 위치를 찾은 안도감이 겹쳐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 감옥 터 제4사단사령부 감옥 터는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를 성공시킨 윤봉길 의사가 갇혔던 곳이다. 이 감옥은 오사카성 안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는 여러 차례 오사카를 방문하고 오사카성을 찾았지만, 이 사실을 몰랐다. 이번에 김동우 사진작가의 안내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답사할 수 있었다. 오사카성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풍국신사(豊國神社)가 보이고, 신사 조금 못 미친 왼편 정원 안에 ‘제4사단사령부 건물터’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 옆에는 일본 시인의 시비도 있다. 안내문에는 “동대번두소옥적(위수감옥적)(東大番頭小屋跡(衛戍監獄跡))”이라고 쓰여 있다. 윤봉길 의사는 포덕 73년(1932)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11월 18일 윤 의사를 우편 수송선에 태워 오사카로 보냈고, 11월 20일부터 약 한 달간 오사카 형무소, 즉 이 제4사단사령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12월 18일 가나자와 구금소로 이송되어 다음 날인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총살되었다. 그의 마지막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주문을 낭랑하게 읊으며 순국한 것이었다. 조사단은 이 감옥 터에서 청수를 모시고, 윤 의사의 순국 정신이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이 되리라는 믿음을 담아 같은 주문을 외쳤다. 텐노지(天王寺) 공원과 통국사(統國寺) 텐노지 공원은 포덕 60년(1919) 3월 19일, 3·1운동 이후 오사카 재일 유학생들이 만세를 외치기로 모였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23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시위를 이끈 인물은 염상섭이었다. 현재 텐노지 공원은 일본인의 휴식처로 잘 조성되어 있다. 근처에는 통국사라는 사찰이 있다. 통국사는 ‘백제고념불사(百濟古念佛寺)’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들이 고향을 기리는 절이다. 해방 이후 오사카의 재일교포가 이 절을 매입하여 ‘원효종’이라는 종파로 운영하고 있다. 절 안에는 재일교포들의 묘와 함께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가 봉안된 납골당이 있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유해 74구는 2019년(포덕 160년) 2월 27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국으로 송환되었으며, 지금은 미송환 유해 1구가 별도로 봉안되어 있다. 절에는 제주 4·3항쟁 희생자 비와 함께 각 마을의 돌로 조성된 공간도 있으며, 입구에는 베를린 장벽도 설치되어 있다. 오모리(大森) 정류장 오모리 정류장은 오사카 외곽의 사카이시 미나미구에 위치한다. 오사카 시내에서 약 4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성사는 이 먼 곳까지 조희연 등 개화파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요시찰 문서에는 성사가 오모리 정류장까지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 이 한적한 곳을 택했는가? 조희연 등이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성사의 작은 움직임조차도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해 기록에 남겼다. 유적 조사의 기쁨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은 책이나 문서로는 경험할 수 없는 깊은 감응을 준다. 필자는 스승님들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잊지 못할 체험을 여러 차례 해왔다. 이번 성사의 일본 행적 답사도 그러한 경험 중 하나였다. 성사의 외유가 지닌 깊은 의미를 다시금 떠올렸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개벽의 정신,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기상이 느껴졌다. 찾은 장소도 있었고 찾지 못한 곳도 있었기에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아직 조사해야 할 행적도 남아 있으며, 이를 후속 조사에 반영할 예정이다. 조사에 함께해준 사회문화관과 동료 조사원들에게 감사드리며, 이 기록이 뒤를 잇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끝. 글. 덕암 성강현(동의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 대동교구)
